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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작가 May 09. 2017

이것도 영웅인가, <가후전>

[만화 추천] 간사한 책사들이 주인공이 된 삼국지

지금은 시들해졌지만, 작년까지만 해도 히어로 무비는 황금기를 보내고 있었다. 전국의 극장가에는 마블 영화가 끊임없이 상영되었고, 길거리에는 캡틴 아메리카와 아이언맨의 얼굴이 프린트된 티셔츠가 심심치 않게 보였으며, 유튜브와 페이스북에는 영화의 의미를 해석해주는 영상 리뷰가 무한히 공유되었다.


하지만 나는 어쩐지 그 열기에 동참하고자 하는 욕심이 생기지 않았다. 마음에 드는 영웅이 없었다. ‘용기나 희망을 노래하는 영웅이 지금 현실세계에 가당키나 한가’라는 배배 꼬인 생각이 들었다. 자신을 희생해 악으로부터 지구를 보호하는 멋진 영웅은 현실 세계에서는 보기 힘들어서 멀게만 느껴졌다. 마치 자신의 한 표가 결국 세상을 바뀔 거라고 믿는 순수한 친구처럼 말이다. 지금 대한민국에 필요한 영웅은 정의로운 영웅이 아니라 교활한 영웅이다.


그래서 차라리 데드풀과 같은 안티 히어로(Anti-Hero)가 더 마음에 들었는지 모른다. 정의감은 없고, 이기기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비도덕적인 영웅. 그 순간 양주라는 중국의 한 철학자가 얘기했던 말이 떠올랐다. “내 정강이의 털 한 올을 뽑아서 천하가 이롭게 된다 하더라도 그 털을 뽑지 않겠다.”하나라도 양보 못한다는 말이 떠올랐다. "보다시피 나는 스승을 배신하고 믿는 사람 뒤통수 치는 걸 꺼리지 않는다네. "라고 말하는 둘의 이기심이 닮았다.


가후의 음흉한 웃음이 매력이다. (출처: <가후전>, 레진코믹스)


나관중의 '삼국지연의' 때문에 우리는 삼국지의 주인공을 유비, 관우, 장비로 대표되는 버디무비 혹은 유비와 조조의 라이벌 구도 정도로만 기억하곤 한다. 하지만 삼국지는 하나의 이야기가 아닌 여러 큰 이야기가 뭉쳐있는 대하드라마다. 이야기의 중심을 누구에 놓느냐에 따라 장르가 달라진다. 군주나 무인이 아닌, 책사들이 주인공이 된 <가후전>(글:마사토끼/그림:브레이브치킨/레진코믹스)은 정치드라마에 가깝다.


'한나라의 황제' 영제는 꼭두각시에 다름없었고, 한 황실은 권력을 쥔 환관들 십상시에 의해 조종당하고 있었다. 관직에 올라가지 않고 재야에 지내던 염충은 어느 날 우연히 사마휘를 만난다. 둘은 서로의 지식에 감탄하며 며칠 동안 깊은 토론을 이어간다. 하지만 단 하나 절대 좁혀지지 않는 의견, 사마휘의 '한나라는 망할 때가 아니다' 염충의 '한나라는 망해야 한다'. 자신의 사상에 반대되는 위험한 사마휘의 존재를 알게 된 염충은 그 토론 이후 자신의 사상을 키우기 위해 제자를 들이기 시작한다. 그 두 번째 제자가 바로 가후다.


별다른 관직 없이 도박판을 전전하며 돈을 모으던 가후. 그는 동탁 휘하에 있던 장제의 제안으로 동탁의 책사가 된다. 가후는 뛰어난 지력에도 불구하고 40대가 되도록 도박을 하며 생계를 유지했는데, 그 이유를 스스로 표현하길 ‘고약한 성질머리’ 때문이라고 한다. "이 가후가 세상에서 싫어하는 부류의 인간들이 몇 있는데, 그중 으뜸이 영웅이란 족속들이요. 보통 사람들은 영웅의 기개에 매료되거나 감탄하지만, 나는 죽어버리면 좋겠다고 생각하지. 그게 이 가후의 나쁜 성질머리올시다"


반면 동탁에게는 그런 점이 없었다. 가후는 목숨보다 체면을 중시하는 영웅의 면을 싫어했던 반면, 초조한 인간을 좋아했다. 초조해서 체면을 버리고 욕심의 민낯을 보여주는 사람. 그래서 '한나라에서 가장 초조한 남자' 동탁을 섬기기로 한다. 동탁은 의리나 명분 따위는 없는 비열한 군주였다. "가후여, 나는 초조하다. 원하는 게 있으면 빼앗고, 거슬리는 놈이 있으면 죽였다."라고 말한다. 목표를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점 바로 가후와 닮았다. 흔히 동탁을 못생기고 멍청한 군주로 묘사하지만, 가후전에서는 신하의 재능을 믿고 도박을 할 줄 아는 간사한 영웅으로 묘사하고 있다.


우연히 손견의 암살 작전에 걸린 가후. 손견의 속마음을 이용해 상황의 주도권을 찾으려 한다.(출처: <가후전>, 레진코믹스)


이런 등장인물의 특징은 어쩌면 '권선징악'의 반대에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한나라의 명운을 두고 설전을 벌이던 사마휘와 염충처럼, 정치에는 선과 악이 없다. 염충의 한나라가 망해야 한다는 주장의 근거에는 십상시의 농간에 황실이 흔들리는 사이, 끼니를 해결하지 못해 굶어 죽는 백성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정치에는 정답이 없다.


<가후전>에서는 삼국지연의에서 주목받지 못하고 스쳐가던 인물들, 진궁, 진규, 희지재의 모습을 볼 수 있다. 관우, 장비, 여포, 하우돈 등 무인 중심의 이야기 구조는 전투가 중심이 되는 액션 영화에 가까웠지만, 염충, 가후, 진규 등 책사들이 보여주는 수싸움은 정치드라마에 가깝다. 칼 소리는 나지 않지만, 이와 이가 맞붙는 설전이 주는 재미 그리고 서로의 정의를 설득하는 싸움 덕분에 <가후전>의 장르는 정치에 가깝지 않나 생각한다. 책사들이 자신을 알아주는 군주를 찾고 그들의 머리를 증명하는 수싸움은 흥미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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