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은 영화를 봐도 할 말이 생각나지 않는다. 이런 증상이 몇개월째 지속되고 있는 것 같다. 나의 첫 에세이집을 출간한 뒤로 그렇게 된 게 아닐까 생각한다. 이제 지겨워진 것이다. 내 생각을 정리해서 말한다는 것이, 나의 경험과 감정을 글로써 공유한다는 것이. 지겨워진다는 건 디지털스럽다. 0이 아니면 1, 지겹거나 그렇지 않거나. 중간이 없는 감정처럼 느껴진다. 며칠전에 글을 쓸 때 무엇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게 하느냐는 질문을 받았다. 그것에 대해 난 평소에 생각해본 적이 없지만 준비한 것처럼 답변이 떠올라 바로 대답을 했다. "새로운 이야기여야 해요." 그렇다. 남이 했던 말을 또 반복하는 것에는 흥미가 없는 것이다. 어쩌면 예술가적인 마인드인 것일까. 비즈니스를 위한 글쓰기였다면 이런 이유로 글을 안 쓰지는 않을 테지. 그 질문을 받고 대답을 하고 집에 돌아오는 길에 다시 혼자가 되어 생각해보니, 지금 내가 성장이 필요한 시기인 것 같았다. 지금까지 배웠던 것들을 소진한 상태에서 다시 재료를 모아야 하는 시기인 것이다. 처음 영화에 대한 리뷰를 쓸 때 기분이 좋았지만, 갈수록 지겨워진 건 내가 같은 말만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에세이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래도 <빛나는>에 대한 몇마디는 해야 하겠다. <빛나는>은 최근에 봤던 영화 중 가장 인상깊었다. 카메라로 인물을 담는 방식, 캐릭터의 행동 등이 재미있었다. 시력을 잃어가는 포토그래퍼는 필름카메라로 촬영을 하는데 그 카메라가 롤라이플렉스 모델이었다. 그 모델은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는 방식으로 촬영을 하기 때문에 포토그래퍼는 고개를 숙이고 뷰파인더를 보기 때문에 피사체와 포토그래퍼는 서로를 바라보지 않는다. 이런 설정과 포토그래퍼의 상태가 비슷하다. 포토그래퍼는 정면으로 바라보면 사물을 보지 못한다. 고개를 숙인 채 눈을 위로 봐야 희미하게나마 앞에 있는 것이 보이는 것이다. 그러니 포토그래퍼는 현실을 정면하지 못하는 사람이다. 유사하게 여자 주인공이 말을 할 때 그의 눈만 타이트샷으로 잡는다. 말을 할 땐 말하는 모습을 담는 것이 당연한데, 눈의 움직이만 보여주는 것이다. 이런 방식은 영화 전체적으로 드러난다. 마치 시력을 잃어가는 사람이 잘 보기 위해 대상에 가까이 붙어서 보는 것처럼 전체적으로 클로즈업이 많으며 입을 화면에 담지 않는다. 시각 장애인에게는 말하는 입모양은 중요하지 않으니 목소리가 담으면 되는 것이다. 결국 포토그래퍼는 카메라를 해변에 집어던지고 현실에 맞서기로 하는 것처럼 보였다. 마지막 엔딩에서 하는 말 역시 그 뜻의 연장선이 아닐까 싶다. 할말이 많이 없을 줄 알았는데, 적다가 보니 점점 길어진다. 역시 글을 써야 글을 쓸 수 있는 것인가, 그런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