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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작가 Feb 24. 2018

길예르모 델 토로가 재해석한 미녀와 야수

[영화 리뷰] 셰이프 오브 워터: 사랑의 모양

언젠가 잔혹한 동화에 대해 들은 적이 있다. 아마 <스펀지>에서 처음으로 들었고 그 이후에도 여러 사람의 입을 통해 전해들었다. 콩쥐팥쥐에서 나쁜 계모와 언니를 젓갈로 담그는 형벌을 내렸다거나 신데렐라에서 계모의 딸이 구두에 자신의 발을 넣기 위해 발뒤꿈치를 잘랐다는 얘기들 말이다. <셰이프 오브 워터>를 보고 나온 나의 기분이 그랬다. 약간은 불편한 마음이 들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고 생각한다. 이 영화는 괴물과 인간의 사랑을 다루고 있다고 생각을 할 수 있는데 하나씩 뜯어보면 또 그렇지 않다. 괴물로 표현하는 그 생명체의 형상은 인간에 가깝기 때문이다. 주인공 엘라이자의 말을 빌려보자면 "나는 그 사람처럼 수영을 할 수도 없고, 그런 소리를 낼 수도 없어요. 그럼 저는 괴물인가요?" 누가 누구를 괴물로 규정하느냐에 대한 질문이다. 인간의 시선에서 그 괴생명체는 괴물이지만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


수조 속에 갇혀있는 괴생명체와 엘라이자 


<미녀와 야수>


고전만화 미녀와 야수에서 야수는 거대한 성에 살고 있는 괴물이다. 재력이 있으며 저주에 걸렸다. 미녀는 어떤가, 이름부터가 미녀, 아름다운 여인이다. <셰이프 오브 워터>에서 괴생명체는 남미의 원주민들이 신으로 숭배하는 존재였고, 포획되어 미국의 한 연구실로 잡혀온 상태다. 여자는 그 연구실에서 청소를 하는 청소부다. 게다가 말을 할 수 없는 농아. 가족도 없고, 가장 친구 동료는 흑인여자다. <셰이프 오브 워터>에 나오는 주인공과 주변 인물들은 모두 소외되거나 부족한 사람들로 설정되어있다.


내가 흥미를 느꼈던 바로 이런 설정들이다. 남미에서 온 괴생명체, 미국에서 사는 청소부의 사랑. 단순히 괴물과 인간의 초월적인 사랑이라고 설명하기에는 부족하다. 미녀와 야수에서 미녀는 마을에서 드물게 책을 좋아하는 고상한 여인이었고 야수 역시 그랬다. 어떻게 보자면 그 둘의 사랑은 일반인들이 봤을 때는 동떨어진 그들만의 세상 같은 것이다. 우리 사는 세상보다 위, 어떤 으리으리한 성의 세상 말이다.


반대로 <셰이프 오브 워터>는 아래로 내려간다. 고귀한 성으로 들어가지 않고 물 속으로 바닷속으로 들어간다.


(여기서 스포일러)

결론도 다르다. 미녀와 야수에서는 야수의 저주가 풀리며 잘생긴 왕자님으로 돌아간다. 이것은 괴물이었던 존재는 비정상적인 것으로 인식하는 것을 나타낸다. 결국 그 세계에서 말하는 해피엔딩은 둘 다 인간인 상태에서 서로 사랑을 하는 것이다. 그러나 <셰이프 오브 워터>는 어떤가. 괴생명체는 엘라이자를 끌어 안고 바닷속으로 들어간다. 엘라이자의 목에 있던 세 줄의 상처는 아가미가 된다. <미녀와 야수>와는 반대되는 결론이다. 괴물이 인간이 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괴물이 되는 결론. 이것을 해피엔딩으로 말하고 있다. 흥미롭지 않은가.


이 영화를 단순히 인간과 괴물의 사랑으로만 설명하기 힘든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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