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이에 베이면 아플 수밖에 없다
종이에 베이면 알게모르게 따갑다. '알게모르게'라는 말이 핵심이다. 베인지 조차 모르다가 느낌이 오싹해서 손바닥을 펴서 가만히 살피면 '여기 상처났어요'하고 조용히 말하는 손가락이 보인다. '어떤 놈이 그랬어!'라고 물어봤자 아무 소용이 없다. 수많은 A4용지들 중에 범인은 한 명 뿐이고 난 누가 범인인지는 찾을 수 없다.
가끔 그런 생각이 든다. 내가 종이에 베이는 게 아니라 종이가 날 베는 것 같다는 생각. 이 놈들은 뭉쳐있으면 날 절대 못 베는데 꼭 한 장만 튀어나와서 내 손가락을 베고 손바닥을 공격한다. 종이에 의지가 없다면 어떻게 이런 사건이 생길 수 있을까.
이런 종이의 성질이 글과 닮았다고 생각했다. 사람을 죽이진 못해도 상처를 내기는 쉽다는 것, 그것이 글과 닮았다. 의도 없는 글로도 상처를 알게모르게 입는다. 아니, 정확히는 문장에 상처를 입는다. 누군가가 내뱉는 긴 하나의 글에서 유독 몇 문장만 튀어나와 나를 베고야 만다.
죄 없는 글에 내가 상처를 받은 건지 의도적인 글에 공격을 받은 건지 모르지만, 그래서 때론 글이 밉다. 이 놈이 뭐라고 직선과 곡선으로 이루어진 글자들 주제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