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 <돌아서서 떠나라> 배우 박정복 인터뷰
’조폭’의 사랑 이야기라니, 너무 진부한 소재 아닌가. 연극 <돌아서서 떠나라>의 시놉시스를 읽었을 때 떠오른 생각이다. 관객뿐 아니라 배우와 제작진 역시 이러한 우려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배우 박정복은 말한다. “어쩌면 올드한 것은 사랑 자체가 아닐까요. 남녀가 서로를 좋아하는 그 플롯 말이에요. 저는 그보다는 다른 부분을 신경 썼어요. 작품이 한창 조폭 소재가 유행을 탈 때 쓰여진 것은 아닐까. 다행히 이 연극은 그보다 먼저 쓰여진 작품이었고, 그럼 한 번 도전해보자고 싶었죠. 최소한 연기를 하는 우리 배우들은 올드하지 않으니까, 우리 방식대로 한 단어 한 단어를 문장으로 표현해보자는 생각이었어요.” 스스로를 낯을 가리는 성격이라더니, 막상 질문을 던지자 그는 여유롭고 막힘 없이 이야기를 이어갔다. 특히 작품에 대해 얘기할 땐 더욱 그랬다.
<돌아서서 떠나라>는 2인극이다. 여주인공 희주의 집에서 모든 이야기가 전개된다. 극이 시작하면 90분 동안 무대는 오직 두 배우의 대사로 가득 찬다. 그래서 대사는 더 선명하게 들린다. 극 중 상두는 요즘에는 쓰지 않는 ‘했걸랑’ ‘했누’ 같은 말투를 쓴다. “그렇지 않아도 대본을 보고 이만희 작가님한테 ‘선생님, 이 말투가 느닷없는 것 같아요, 왜 상두는 이런 말투를 쓰는 거예요’ 하고 여쭤봤어요. 그 당시에 연인끼리 쓰는 사랑 표현의 방식이었다고 하더라고요. 요즘에도 서로 친하면 서울 사람인데도 사투리 쓰곤 하잖아요. 둘만의 코드 같은 것으로 이해하니까 문제가 되지 않겠더라고요.” 박정복은 캐릭터의 말과 행동, 어느 하나도 이해가 되지 않으면 한 발자국도 앞으로 나설 수 없는 배우 같았다. 그러나 공상두는 이해하기 쉽지 않은 캐릭터다. 직업은 조직폭력배고, 가장 아끼는 부하가 자신의 죄를 뒤집어 쓰고 감옥에 가 있으며, 사랑하는 이와 연락을 끊은 채 2년도 넘게 두문불출하다가 갑자기 나타났다. “역설적이지만 건달을 연기하기 위해서 건달이라는 사실을 잊으려고 했어요. 그저 한 인간의 사랑 얘기로 접근했죠. 조폭이라고 해도 사랑하는 여자 앞에서는 어떻게 행동할지 모르는 거잖아요. 오히려 건달처럼 거친 사람들이 자기 사람들에게는 더 따뜻하지 않을까, 그리고 상두는 그런 사람이 아닐까 생각했어요.”
상두의 행동에는 얼핏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이 있다. 상두는 왜 처음부터 솔직하게 털어놓지 않았을까. 상두는 희주와 헤어질 때가 되어서야 사실은 자신이 살인을 한 게 맞으며, 자수하기 전 마지막으로 보러 온 것이라고 털어놓는다. “저도 그게 처음에는 납득이 안됐어요. 심지어 희주가 ‘네가 죽인 거 아니지?’라고 물었을 때도 고개를 끄덕였으니까요. 요즘 드는 생각은 그냥 희주를 가만히 보고 싶었던 것 아닐까 싶어요. 희주와 같은 공간에서 눈 마주치고 별다른 얘기 안하고 싶었던 거죠. 이기적인 거죠. 하지만 저도 내일 죽는다면 대단한 걸 할 것 같지는 않아요. 엄마가 차려준 밥 한 끼가 먹고 싶겠죠. 그렇게 생각하니까 요즘에 연기할 때는 오히려 힘을 빼게 되더라고요.”
<돌아서서 떠나라>의 주된 감정은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져야 하는 슬픔이다. 그가 출연했던 연극 <레드> <거미여인의 키스> <존경하는 엘레나 선생님>과는 다른 감정이다. “멜로 연기를 전부터 해보고 싶었어요. 한 살이라도 어렸을 때 해야지 나이가 들면 못할 것 같았거든요(웃음).” 하지만 그는 로맨스 연기가 처음에는 정말 힘들었다고 조심스레 털어놓았다. “제가 낯가림이 원체 심한데, 저의 민낯을 보여주는 것 같았거든요. 신다은 배우의 남편분도 연기를 보고 그런 말을 하더라고요. 나만 알았던 부분을 무대에서 보니까 기분이 묘하다고. 연인끼리만 하는 행동들이 있는데, 그게 무대에서 나올 수밖에 없는 거죠. 진짜 사랑을 해야지 사랑하는 척하면 관객들에게 보여줄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고 생각해요.”
박정복은 매년 창작연극에 출연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돌아서서 떠나라> 전에 공연했던 연극 <날 보러와요> <유도소년> 역시 그런 이유에서였다. 그는 레퍼런스 작품도 좋지만, 창작연극은 우리만의 이야기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예전에 뮤지컬 <서편제>를 보고 충격 받았어요. 이자람 선배가 나와서 판소리를 하는 그 순간, 말로 할 수 없는 감동이 느껴졌어요. 그건 정말 우리밖에 할 수 없는 공연이니까요.”
인터뷰를 한 지 두 시간이 흘러 피곤할 법도 하지만, 연기에 대해 말하는 그는 즐거워보였다. 무대 위에서 언제 가장 행복하냐고 묻자 그의 대답에는 망설임이 없다. “박수를 받는 순간이 가장 행복해요. 사실 커튼콜 때 사진 찍는 걸 별로 안 좋아했던 이유도 어느 날부터 박수 소리 대신 셔터 소리가 들릴 때가 있더라고요. 예전에 <레드> 무대가 끝나고, 박수 소리를 들었는데, 그때 소리는 굉장히 묵직했어요. 같이 공연했던 강신일 선생님도 ‘오늘은 박수가 묵직하다’라고 말씀하시더라고요. 그 소리를 듣고 저는 최소한 관객의 시간과 돈을 아깝지 않게 해드렸구나 싶어서, 연기를 할 수 있어서 축복받았다고 느껴요.” 하지만 박정복은 배우로서의 삶이 이토록 행복해서 위태롭다고 말한다. “뭘 깊게 생각해 그냥 해, 대충 연기해, 이렇게 변하는 순간이 올까 봐 걱정이 돼요. 만약 그런 태도가 된다면 연기를 그만해야겠죠.”
출처: http://theartpark.co.kr/201809_%EB%B0%B0%EC%9A%B0%EB%B0%95%EC%A0%95%EB%B3%B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