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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작가 Aug 01. 2019

뜻밖의 수작, <엑시트>

타이밍도 좋아서 500만 이상은 가지 않을까 싶은데...

*영화에 스포일러랄 게 없긴 하지만 그래도 스포일러 있음


7월의 마지막 날 CGV 홍대에서 <엑시트>를 봤다.

선택권은 <엑시트>말고도 많았다. 후보1은 믿고 보는 배우 송강호-박해일이 나오는 <나랏말싸미>. 하지만 역사왜곡 논란 때문에 극장에서 보기엔 망설여졌다. 후보2는 <라이언킹>. 이건 어제 봤다. 후보3은 <사자>, 이건 아직 안 봤지만 호러는 무섭기 때문에 안 볼 것 같다. 결론은 <엑시트>였다. 나의 선택을 보면 보통 사람들이 많이 선택할 만한 영화가 무엇인지 알 수 있는데, 한 달에 영화를 한 번 정도 보는 평균의 관객이라면 모험하는 걸 좋아하지 않는다. 반드시 봐야 할 영화를 보기 보다는 볼 마음이 없는 영화를 소거한 뒤 남는 영화를 선택한다. 흥행한 상업영화는 대부분이 그렇다. <기생충> 같은 예외 케이스는 빼고.

사실 <엑시트>는 기대작이 아니었다. 보통의 기대작이라함은 줄거리 외적인 요소로 평가된다. 유명 배우가 나오거나, 유명 감독이 연출했거나, 아니면 파격적인 캐스팅이 있거나, 오랜만에 복귀작이라거나. <엑시트>에는 아무것도 없다. 주연 배우 조정석은 <건축학개론>의 납득이 캐릭터로 크게 주목을 받으며 영화에서 중요한 역할들을 맡았지만 딱히 이렇다 할 만한 히트작은 없었다. 물론 조정석의 연기에는 문제가 없었지만 말이다. 게다가 안 그래도 코믹한 납득이 캐릭터로 각인된 이후로 진지한 캐릭터를 어떻게 소화하는지 주목했을텐데 아쉽게도 아직까지 뚜렷한 성과가 없었다. <뺑반> <마약왕>의 부진이 그 역시도 아쉬웠을 거다. 또 다른 주연 임윤아 역시 마찬가지. 2017년 <공조>에서 북한 군인을 좋아하는 처제 역할을 맡은 게 가장 최근 영화였으니 보여준 것보다는 보여줄 게 훨씬 많이 남은 위치다. 게다가 <엑시트>는 감독 이상근의 상업영화 입봉작이다.

<엑시트>의 전개는 거침이 없다. 우물쭈물하지 않으며, 관객들을 울리거나 웃기느라 질질 끄는 법이 없다. 흔히 재난영화하면 '신파' '눈물' 같은 것이 짝처럼 붙기마련인데, 그런 것도 없다. 신파의 ㅅ이 간신히 나올 때쯤, 감독은 그 감정을 끊어버린다. 훌륭하다. 처음부터 끝까지 코미디를 끌고간다.

난 왠지 재난영화하면 드웨인 존슨이 절벽 너머로 뛰어내리는 모습이 떠오르는데, 물론 <엑시트>에도 뛰어내리는 장면들이 많다. 하지만 드웨인 존슨의 출연작들과 달리 <엑시트>에서는 조정석과 임윤아를 영웅처럼 그리지 않는다. 줄거리부터 짧게 말하자면, 유독가스가 도시에 퍼지면서 서서히 옆으로도 퍼지고 고층빌딩으로도 올라간다. 조정석은 엄마의 환갑잔치 때문에 빌딩에 왔다가 갇히는데, 거기서 대학생 때 고백했다가 차였던 임윤아를 만난다. 둘은 산악부 동아리 출신의 특기를 살려 살아남으려 빌딩과 빌딩 사이를 뛰어다닌다.

절대 둘은 멋있는 척을 하지 않는다. 나보다 약한 사람, 나보다 어린 사람을 먼저 살리기 위해 양보를 하면서도 둘은 뒤돌아서면 서럽게 운다. "왜! 왜! 자꾸!ㅠㅠㅠㅠ나도 살고 싶어" 그러니까 이 두 사람은 영웅이 하는 당연한 일을 하기 보다는 차마 이기심을 부릴 수 없어서 인 것에 가깝고, 그게 차라리 현실적이다. 우리가 아는 영웅들도 사실 마음 속으로는 울고 있었을지도 모르는 거지.

두 사람이 대학교 산악 동아리였다는 점도 재미있는 부분이다. 대학교 동아리라는 건 참 쓸데없을 것만 같은데 살다 보면 의외로 써먹을 때가 있다. 대학교 산악 동아리면 전문가의 수준도 안되고 아마추어 정도에 머물고 마는데, 그렇게 애매한 정도이기 때문에 영화에서는 더 재밌게 사용될 수가 있다.

옥상에서 SOS를 보내는 장면, 네온사인 간판 등을 보면 '그래 재난 영화를 꼭 어마어마한 스케일로 찍을 필요가 없지'하는 생각이 든다. 빌딩을 옮기며 나오는 장면들이나 소품들이 '코리아'스럽고 흥미로웠다. 쓰레기 봉투나, 헬스기구, 입간판 같은 것들.

사건을 일으킨 악역은 있지만 굳이 세세히 말하지 않는다는 점도 다른 영화와의 차이라 할 수 있다. 초반에 유독가스를 터뜨리고 끝이다. 죽었으니까 당연히 못 나오는 것이기도 하지만, <엑시트>에서는 악역이 어떤 사연을 가졌는지는 굳이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악역의 생전의 삶이 진지하게 나오는 순간 영화가 사뭇 거창해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건 초반부터 엔딩까지 쭉 이어지는 일관된 분위기다. 둘이 살아남는다고 해서 세상이 구해지는 것도 아니고, 둘의 행동에 큰 의미가 있는 것도 아니다. 그냥 생존하고 싶을 뿐. 조정석은 여전히 임윤아에게 잘 보이고 싶었을 뿐이다. 어떻게 보자면 캐릭터는 단편적이다. 하지만 그래서 더 좋다. 결핍이 있던 인물이 사건을 통해 성장하는 이야기가 아니라, 사실 그 결핍이라는 게 별거 아니었다고 말한다.

<엑시트>는 꽤 흥행할 것 같다. 타이밍으로보나 영화의 성격으로 보나, 요즘 이만한 영화 보기 힘들다. 그리고 시기를 떠나서도 정말 잘 만든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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