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작가 Jun 06. 2020

운동화에 들어간 모래처럼, <벌새>

삶을 뒤흔든 사람을 만날 때가 있다. 그 사람은 알게모르게 마음 속을 휘젓는데, 그땐 모른다. 그가 일으킨 바람이 나를 어떻게 만들어버리게 될지.


1.

<벌새>를 보며 들었던 키워드는 소멸과 소생이었다. 2시반 18분 동안 수많은 감정이 나타났다가 사라지기를 반복한다. 둘도 없는 친구인 줄 알았던 지숙(박서윤)은 '나'(박지후)를 결정적인 순간에 버리고, 오빠(정확히는 오빠새끼라고 부르는 게 맞다)는 말대꾸했다고 '나'를 때리고, 남자친구는 좋다고 따라 다니다가 멀어지고, 아무것도 아니었던 학원 선생님은 보고 싶은 사람이 되고, 누군지도 모르던 후배가 '내'가 좋다며 졸졸 따르고, 엄마의 동생이 죽고, 엄마와 아빠는 이혼할 것처럼 싸우다가 다음 날에는 같은 TV를 보고 웃고 있다. 다리는 무너지고, 선생님도 사라진다. 은희를 둘러싼 모든 것들이 계속 변화한다. 이런 장면들을 보며 나도 어렸을 때 저랬던가, 하고 생각하다가 벌써 15년 전이라 기억이 가물가물해서 이내 포기하고 말았다. 근데 가만, 15년씩이나 멀리 거슬러 올라갈 필요가 있나? 지금도 나는 감정이 생겼다가 사라지기를, 사람이 생겼다가 사라지는걸 계속 겪고 있지 않나. 그러니까 <벌새>는 호빗이 반지를 버리러 가는 여정이나 이마에 흉터가 있는 아이가 볼드모트와 싸우는 이야기와는 달리 '선택되지 않은 한 아이'의 한 순간을 보여주는 영화다. "영화란 인생의 지루한 순간을 잘라낸 부분"이라고 말했던 것과는 정반대라는 생각마저 들었다. 특별해 보이지만 평범하고, 평범하기 때문에 특별한 순간들이다.


2.

인상적이었던 대사와 장면을 몇개를 꼽아 보니 대부분 영지 선생님(김새벽)이 나오는 부분이었다. "그래도 불쌍하다고 생각하지마. 함부로 동정할 수 없어. 알 수 없잖아.", "나는 내가 싫어지면 그냥 그 마음을 들여다보려고 해.", "너 이제 맞지마. 누구라도 널 때리면 어떻게든 맞서싸워. 절대로 가만히 있지마." 극 중에서 영지 선생은 무엇이든 쉽게 판단하지 않는 사람이다. 심지어는 자신의 마음까지도. 철학자 같은 태도를 가진 사람이랄까. 대학교 3학년 때 철학과 수업을 처음 들었는데 그때 교수님이 "데카르트가 무슨 철학을 했든, 헤겔이 무슨 철학을 했든 그거 안 외워도 돼요. 우리는 철학을 배우는 과지 철학사를 배우는 과는 아니잖아요? 학생들은 철학이 아니라 '철학함'만 배우면 됩니다." 대학교에 7년을 다니면서 그 말 하나 남았다. 그 교수님이 말하는 철학함이란 보이는대로 보지 않고 들리는대로 듣지 않고 생각하는대로 생각하지 태도였다. 주체적으로 생각하고 말하고 해석하는 뜻이었다. 영지 선생님의 말에서 그 교수님이 떠올랐다.


3.

오프닝이 흥미로웠다. 다른 집인 줄 모르고 현관문을 쿵쿵 두드리다가 실수한 걸 알고 원래 집으로 잘 찾아가는 게 오프닝 시퀀스다. 보통 오프닝에서는 영화 전체를 함축하는 내용을 은유적으로 담거나 극적인 장면을 보여주면서 관객을 한번에 몰입시키는 경우가 있는데, 감독의 인터뷰를 찾아보니 두 가지 의도를 다 담고 있었다. 오프닝을 보면서 뭔가 심상치 않은 일이 생길거라는 분위기를 조성하다가 아무렇지 않게 마무리 되는데, 전체적인 분위기와 비슷하다. 영화 내용을 보면 수술도 하고 사랑도 하고 시련도 겪고, 김일성이 죽고, 성수대교가 무너지고 사람이 죽고 정말 많은 일이 있는데, 마지막 장면은 수학여행을 떠나는 장면에서 끝난다. 은희의 삶은 크게 달라지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4.

그래서 오프닝과 엔딩을 비교해서 떠올려 보면 기분이 묘하다. 아..이건 뭔가, 허무하다 싶다. 무기력해지는 것 같기도, 위로가 되는 것 같기도 하고, 희망인가 절망인가 미묘하고 복잡하다. 엔딩의 은희의 표정을 보니 더 그렇다. 감정을 읽을 수가 없다. 감독은 <벌새>라고 지은 이유가 희망, 포기하지 않는, 생명력 같은 좋은 의미가 있어서라고 했지만 어쩐지 마냥 기쁘지 않다. 벌새처럼 1초에 80번 날갯짓을 하다가 갑자기 다리가 무너지는 삶도 있지 않나. 은희 같은 아이에게 선한 영향력을 줬다면, 이른 죽음에 덜 슬퍼해도 괜찮은걸까.(지금 생각해보니 방방 뛰는 장면마저 슬퍼 보인다)


5.

<벌새>는 문(door)에 대한 이야기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오프닝부터 시작해서 문이 정말 많이 나오고, 중요한 순간에 중요하게 사용되는데, 예를 들어 외삼촌이 술마시고 오밤중에 찾아왔다 갔을 때 센서등이 꺼질 때까지 카메라는 현관문을 비춘다. 앵글에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데. 오빠는 은희에게 자신의 방문을 닫으라고 시켰다가 말을 듣지 않자 은희의 방문을 열고 때린다. 또 은희의 언니는 장롱문을 닫고 숨어있다가 아빠가 현관문을 열고 나가니 그때서야 나온다. 은희가 "절대로 가만히 있지 말라"는 영지의 말을 떠올리며 원장 선생님의 문을 열고 맞서기 시작한다. 문이라는 건 닫았을 때는 벽인데, 열었을 때는 한 공간으로 만들어준다. 인물들에게는 각자의 방이 있고 그게 열렸다가 닫혔다가를 반복한다. 정확히는 감정의 문이 열렸다가 닫혔다가를 반복하는데, 1번에서 말했던 소멸과 소생을 은유하는 것처럼 보여서 재미있었다.


추가 하는 글--------------------

아침부터 <침입자>를 보러 가려고 샤워를 하는데 어제 봤던 <벌새>가 계속 생각났다. 더 하고 싶은 말이 남아서(아직도?) 더 쓰고 싶어서 예매를 취소하고 다시 의자에 앉았다.(블루투스 키보드로 치는 중)
.
6.왜 한자 선생님일까?
감독 인터뷰를 찾아보면 그 이유가 나와있겠지만, 그건 내 생각부터 정리하고 나중에 할 일. 중학생이 다닐 만한 학원을 생각했을 때, 딱히 한자 학원이 딱이네 싶은 생각은 들지 않았다. 94년의 상황을 모르기 때문에 한자가 광풍이었는지 어쨌는지는 모르겠다. 극중 영지의 역할(삶을 이끄는 스승 같은 역할, 가짜 어른 중 진짜 진짜)을 생각했을 때는 한자라는 과목이 적절해 보인다. 하지만 내가 각본가라면 '상식만천하 지심능기인'이라는 말을 쓰고 싶어서 우선 한자 선생님으로 설정했을 것 같다. '서오 얼굴을 아는 사람은 세상에 가득하지만, 마음까지 아는 사람은 얼마나 있을까'라는 뜻인데, 한번 중요하게 빡 나오고 휘발되는 문장이 아니라 엔딩까지 곱씹을 수 있는 문장이다. 영지 선생님이 "은희 학생은 얼굴을 아는 사람이나 몇명이나 되지?"라고 물었을 떄 처음엔 50명이라고 하다가 200명으로 고치는데, 얼굴을 아는 사람은 이처럼 고무줄처럼 늘어나는 수치다. 숫자가 중요하지 않다. 하지만 마음을 아는 사람이 몇명이냐고 물었을 때는 대답하는 장면을 보여주지 않는다. 몇명이라고 답했을까? 친구 지숙, 남자친구, 가족 정도일까? 답은 하지 않아도 마음 속으로 생각을 했을텐데 영화가 진행되면서 은희가 얼굴로 아는 사람들이 알 수 없는 행동을 한다. 엄마 아빠는 피를 흘리며 싸웠다가도 다음 날 코미디 프로그램 보면서 같이 웃고, 언니는 맨날 남자친구랑 새벽에 들어오고, 자기를 좋아한다는 후배는 "그냥 좋아요 언니가. 그러면 안돼요?"라고 하다가 마음이 차게 식고.  그 후배의 이름이 유리인데, 명대사가 많이 나온다. <봄날은 간다>의 "어떻게 사랑이 변하니" 이후에 가장 사랑을 통찰한 대사가 아닌가 싶다. "언니 그건 지난 학기잖아요." <봄날은 간다>에서 어떻이 사랑이 변하냐라는 대사는 '사랑은 원래 변한다'라는 걸 보여주는 대사이고 좋아하는 마음은 한 학기 보다 짧을 수 있음을 말한다. 변영주 감독이 "섹시한 건 한 학기 정도 밖에 안 가"라며 농담식으로 말했는데 그런 사랑이 있고 이런 사랑이 있지 생각이 들었다.
.
7. <벌새>는 장면들을 뜯어보게 되는 재미가 있는 영화라 계속 언급하고 싶은데, 엄마가 은희에게 전을 부쳐주는 장면을 보면서 '밥 대신 전을?'하고 생각했다. 이건 감독의 개인적인 경험 때문에 전을 메뉴로 정한 것일까, 전에 담긴 함의가 있는 것인가 깊은 고민을 하게 되는 장면이다. 보통 엄마가 배고픈 자식에게 밤늦게 전을 부쳐주지는 않으니까. 게다가 손도 많이 가는 요리인데? 그걸 먹는 은희의 먹방도 궁금한데, 처음에 한 입 불고(두 입도 아니라 한 입만 분다) 한 조각을 먹고 곧이어 한 조각을 더 먹는데 그땐 불지 않고 먹는다. 그떄 둘 사이에 대화는 없다. 이때뿐만이 아니라 밥 먹는 장면에서 가족들 사이에 대화는 없다. 아빠는 썅년 같은 험한 말을 섞어가며 가족 앞에서 언어폭력을 시전한다. 그걸 보는 가족들은 아무런 말이 없다. 동등한 위치여야 할 엄마는 "아유 콩나물이 쉬었나?"하며 브레이크 같지 않은 브레이크를 걸 뿐이다(엄마의 브레이크는 물리적인 폭력으로 맞서싸웠을 때 비로소 제대로 작동한다). 반면에 영지는 울고 있는 은희에게 따뜻한 차를 대접한다. 호호 불어 먹어야 하는 차다. 둘 사이엔 대화가 오간다. 은희가 대화를 하는 사람은 몇 명 없다. 지숙 아니면 영지. 남자친구와는 손잡고 얼굴 쳐다보는 것말고는 하는 게 없고, 후배 유리와 있을 때도 마찬가지다. 어색하다.
.
8."날라리가 되지 말고 여대생이 되어라"라는 말이 94년임을 알게 한다. 날라리라는 말, 여대생이라는 말. 학교 선생님에 따르면 날라리는 노래방에 가거나, 연애를 하는 애들인데, 한국 대중가요를 이끄는 사람들이 노래방에서 수련을 하며 성장한 것을 생각하면 노래방은 날라리 양성소가 아니라 문화자본이었던 게 아닌가 싶다.
.
9. 대사가 굉장한 영화다. 별거 아니지만 병문안을 온 엄마 아빠가 엘리베이터를 타고 돌아갈 때 은희는 "다녀오세요"라고 인사를 하는데 이 말은 외국인이 봤을 때는 되게 이상한 말이다. 병원이 집도 아닌데 무슨 다녀오세요? 그 이유를 생각해보면 은희는 부모님께 '다녀오세요'라는 인사 밖에 해본 적이 없는 거다. 학생에서 직장인이 되면 처음 겪는 상황들이 무척 많은데 그 상황에서 어떻게 인사해야 하는지가 헷갈릴 때가 있다. 은희가 병문안을 왔다가 가는 부모님에게 "다녀오세요"라고 하는 대사는 그렇게 만들어진 것이 아닐까. 애가 "들어가세요" "또 봐요" 같은 말을 하는 건 이상하잖아.
.
10. 오프닝에서 카메라는 은희네 집 현관을 비추다가 점점 멀어지면서 복도식 아파트의 풀샷을 잡는데, 이게 포스터에도 적힌 '가장 보편적인 은희'라는 말에 부합하는 장면인 것 같다. 생각하면 할수록 놀라운 설정과 디테일이다. "우리는 은희라는 아이의 한 순간을 보여줄 거예요. 특별해보이지만 모두가 겪은 보편적인 이야기예요."라고 말하는 듯 한 오프닝이다.
.
11. 왜 은희에게는 혹이 생겼을까, 혹 제거 수술을 하고나서 혹이 어디로 갔는지 왜 궁금해할까, 언니가 살아돌아왔을 때의 오빠의 마음은 무엇일까를 생각하다가, 이건 너무 끝도 없겠다 싶어서 나중에 더 정리하고 일단은 <침입자>를 보러가야겠다. 다음 넷플연가에서 <벌새>를 다루어야겠다.

매거진의 이전글 주말의 영화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