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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나누나누나

by 변명희



누나 누나 누나


변명희


새벽 기차를 타고 전주역에 내렸다. 기다렸다는 듯 곧바로 우리를 텃밭으로 데려갔다. 엷은 햇살을 안은 감나무 옆으로 블루베리가 익어가고, 서둘러 핀 과꽃들도 반가운 손짓을 했다. “누나, 이거 좀 먹어봐. 큰 놈이 맛있거든.” 방아깨비처럼 겅중거리던 동생이 엄지손톱만큼이나 굵은 블루베리 한 줌을 내밀었다. 우물우물 씹으며 하늘을 보니 뭉게구름 한 쌍이 정답게 흘러가고 있었다.

세 살 터울인 우리는 늘 손을 잡고 다녔다. 나란히 기찻길을 걸어 큰언니 집에도 가고, 라면이나 건빵을 사러 점방에도 함께 다녔다. 동생이 자라면서부터는 자전거 뒷자리에 나를 태우고 다니기도 했다. 마당에서 둘이 놀다가는, 해 질 무렵이면 남쪽으로 난 토방에 오도카니 앉아 있곤 했다. 그런 때면 어디선가 “들어와 밥 먹어라.” 부르시던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우리 오누이의 시선 저쪽 끝에 그렁그렁 매달린 엄마에 대해서는 둘이 다 말한 적이 없다. 그것은 살짝 건드리기만 해도 터져버릴 것 같은 상처임을 그때도 알았다. 병석에 누워있던 엄마는 코흘리개인 우리를 두고 세상을 떠났다. 아직 엄마 품이 그립고 외로웠을 열 살배기 동생을 이해하기에는 나도 철없는 아이였다. 엄마의 치마폭인 양 따라다니는 동생을 윽박질러 놓고는 몰래 친구 집에 가기도 했다. 어쩌다 손찌검으로 눈물을 쏟게 했던 기억은 금방 벤 생채기처럼 아팠다.

입시 준비를 하며 고등학교에 다닐 때였다. 내가 본 둥 만 둥 까칠하게 굴어도 동생은 아랑곳하지 않고 옆에 있었다. 서울로 올라와 대학을 다니면서는 내 일에 급급해 동생을 돌아보지 않았다. 그 후로도 4년여간 외국에 나가 있었다. 가을이 깊어갈 무렵 우체통에서 뜻밖의 항공우편을 발견했다. ‘누나 누나 누나’라고 반듯하게 쓰여 있는 카세트테이프였다. 한눈에 동생의 필체임을 알 수 있었다. 결혼하고 멀리 떠나온 후로 잊고 지내던 동생이 내 앞에 나타난 듯했다. 테이프를 든 손이 후들거렸다. ‘과꽃’ ‘오빠 생각’ ‘꽃밭에서’ 등의 노래가 담겨 있었다. 2절이 흐를 때는 목이 메었다.

‘과꽃 예쁜 꽃을 들여다보면 꽃 속에 누나 얼굴 떠오릅니다. 시집간 지 온 삼 년 소식이 없는 누나가 가을이면 더 생각나요.’

마디마디 귀를 후비는 노랫말은 함께 노닥거리던 마당에서 동생이 훌쩍거리는 소리 같았다. 자주색 과꽃 뒤로 너울대던 나팔꽃도, 정답게 서 있던 해바라기도 아른거렸다. 엄마도 없는 어린 동생을 두고 떠나와 버렸다는 죄책감이 밀려왔다. 밥은 제대로 먹고 다녔을까, 사춘기는 어떻게 보냈을까, 혹시 등록금이 필요한 건 아닐까···. ‘누나 누나 누나’라는 글자가 우렁우렁 메아리로 울렸다. 그리움이나 애틋함 같은 상투적인 단어만으론 내 마음을 표현할 수 없었다. 그날 뜰에는 밤새 스산한 바람이 감잎을 뒤척이고 내 마음은 출렁출렁 바다 건너로 흘렀다.

그때부터 일까. 나는 ‘누나’라는 호칭을 별나게 좋아하게 되었다. 그 보드랍고 다정한 호칭에 못 미치는 나는 아픈 추억이 돋을까 봐 테이프의 음악을 자주 듣지 못한다. 마치 동생이라도 되는 듯 무연히 바라보거나 어루만지고는, 다시 서랍 안 위쪽에 가만히 올려놓는다.

동생 내외는 직장생활을 하면서도 제법 넓은 텃밭을 가꾼다. 우리 몫까지 거두려니 점점 규모가 커진다. 모처럼 쉬는 날인데도 올케가 밥상을 푸짐하게 차려 놓았다. 금방 버무린 겉절이는 황석어젓의 감칠맛이 입에 감기고, 싱그러운 완두콩밥은 풋콩처럼 애애하던 유년의 시간을 불러들였다. 옛얘기를 나누며 고봉밥을 두 그릇이나 먹고는, 사르르 잠이 들었나 보다. 얼굴을 스치는 실바람에 눈을 뜨니 창밖으로 감나무 이파리들이 살랑대고 있었다. 오래전 감나무 아래서 감꽃 목걸이를 만들던 시절이 꿈처럼 스쳐갔다. 동생은 집을 지을 때부터 감나무가 내다보이는 2층에 내가 묵을 방을 마련해 두었다. 방에는 엄마가 쓰던 낡은 재봉틀과, 내가 고등학교 때 수놓아 만든 두 폭짜리 병풍이 세워져 있다. 그곳에 있으면 우리가 서로 차지하려고 비비대던 엄마의 치마폭 냄새가 나는 것 같다. 동생에게 엄마 대접을 받는 것 같아 미안하고 고마운 마음은 차마 드러낼 수가 없다.

우리 오누이를 잘 아는 사람들은 진중하고 속 깊은 동생이 오히려 오빠 같다고 입을 모은다. 탄탄하게 잘 지은 집처럼 모도리가 된 동생을 알아주는 듯해서 내심 흐뭇하다.

“모처럼 왔으니 세 끼는 먹고 가야지.”

동생의 마음을 알기에, 하루 일정에도 꼭 지켜지는 세 끼 식사를 마치고 서울로 가는 기차 안이다. 흑백사진 속 우리들처럼 보따리 몇 개가 기대고 있다. 텃밭에서 뽑아 담근 열무김치와 상추, 신선한 청계 알도 한 판 들었다. 달걀은 올케가 깨지지 않게 보자기로 야무지게 갈무리했다. 친정집에 다녀오는 아낙의 보퉁이 같아 마음도 볼록해진다. 올케가 챙겨주는 것은 뭐든 마다하지 않는다. 동생의 마음을 대신하려니 싶어서다. 출발하기 전에 동생이 허겁지겁 꺾어다 준 과꽃들도 푼푼한 미소를 짓는 것 같다.


기차는 어느덧 만경강을 지나고 있다. 잔잔한 수면 위로 동생의 얼굴이 흔들린다. 다홍으로 젖어 드는 강물 속으로 희끗희끗 드러나는 동생의 흰머리가 떠오른다. 핸드폰에 문자가 온다.

“누나, 집이 텅 빈 거 같네. 하지쯤에 또 와.”

무릎에 있던 과꽃 다발을 가슴에 안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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