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전에 덴마크의 행복한 교육을 소개하는 연수를 들은 적이 있다. 그때 강사가 주장한 핵심은 이런 것이다. “오늘 행복한 게 중요하다. 아이들도 내일을 위해 오늘의 행복을 유보해서는 안 된다.” 이 강사 뿐만이 아니라 진보적이라고 생각하는 많은 사람들이 이런 주장을 한다. 나도 진보 교육을 추구하는 사람이지만 이 지점에서 껄끄러움을 느꼈다.
그 껄끄러움은 두 가지 지점에서 시작되었다.
우선 행복이라는 말이다. 사람들이 행복을 이야기할 때 많은 경우 현재의 만족감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지금 즐거운 것이 행복이라는 말이다. 나는 이런 행복 개념에 반감을 가지고 있었다. 철학적으로 양적 쾌락주의와 일맥상통한다고 여겨졌기 때문이다. 힘들게 등반하고 난 뒤의 성취감, 어렵게 봉사활동을 하고 났을 때의 뿌듯함, 고통스럽게 훈련을 하고 난 뒤 실력이 늘었을 때 느끼는 고통의 역설을 설명하지 못한다.
행복에 대한 여러가지 해석이 가능하겠지만 나는 아리스토텔레스의 행복이란 개념을 좋아했다.
한 마리의 제비가 봄을 만드는 것도 아니며 좋은 날 하루가 봄을 만드는 것도 아니다….행복은 인간의 생애 전체를 통해서 좋은 삶을 실현하려는 지속적인 활동이다.
좀 더 품격 있는 해석이지 않은가? 행복은 지금 당장의 근시안적 목적이 아니다. 희노애락이 뒤섞인 인생을 살아간 뒤 자신의 인생을 되돌아보면서 생각할 수 있는 것이다.
다음은 오늘을 살자라는 내용이다.
대학 입시를 위해서 청소년기를 거의 반납해야 하는 우리의 현실에서 나름 이해는 가는 말이다. 그렇다고 미래에 대한 준비없이 오늘 즐겁게 살면 되는가? 지나치게 대학 입시에 몰빵하는 것은 나도 반대다. 그렇지만 현재 행복하게 사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주장하는 것도 위험하다고 생각했다. 공부를 재미로만 접근할 수는 없다. 재미없고 힘들어도 해야 하는 게 공부다. 아이들 각자의 다양성을 무시하고 일괄적으로 공부만 강요하는 것은 문제지만 미래를 위해 현재의 힘든 공부를 감당 하는 것도 필요하다. 그래서 오늘을 살자는 말을 싫어했다.
은퇴 후 상황이 바뀌니까 생각이 바뀌었다. 지금이야 말로 오늘을 살아야 하는 시절이라고.
나심 탈레브의 블랙스완이라는 책에 칠면조의 교훈이라는 내용이 나온다. 경험주의의 한계를 지적하는 내용이지만 나는 우리의 인생과 닮았다는 생각을 했다.
칠면조 한 마리가 있다. 주인이 매일 먹이를 가져다준다. 먹이를 줄 때마다 ‘친구’인 인간이라는 종이 순전히 ‘나를 위해서’ 먹이를 가져다주는 것이 인생의 보편적 규칙이라는 칠면조의 믿음은 확고해진다. 그런데 1000일이 지난 바로 다음날, 추수감사절을 앞둔 어느 수요일 오후, 예기치 않은 일이 칠면조에게 닥친다. 돌발사건이 일어난 것이다.
1000일 동안 평화로웠던 칠면조에게 죽음이 닥친 것은 단 하루면 충분하다. 극단적인 사례이지만 우리에게도 마찬가지 아닐까? 죽음이라는 것은 우리가 예견하고 있다고 해도 각자에게는 돌발사건이다. 지금은 인생의 700일 정도를 살았다고 확률적으로 생각하지만 나의 돌발사건이 언제 일어날지는 누구도 모른다. 가끔 퇴직한 지 얼마되지 않은 사람들이 갑작스레 돌아가셨다는 얘기를 듣는다. 안타깝지만 수긍이 간다. 예전 같으면 평균수명을 한참 지난 나이다. 죽음 앞에 언제든지 열려 있는 시기가 되었다.
신체 기능도 점점 나빠지고 있다. 놀려고 해도 체력이 받쳐주지 않는다. 그 유명한 노래도 있지 않은가? ‘노세 노세 젊어서 노세’ 이 가사가 가슴에 와 닿는 시절이 되었다. 결정적으로 이제는 준비해야 할 미래가 없다. 젊어서는 인생의 가변성이 있다. 내가 준비하는 것에 따라 이후의 삶이 달라질 수 있다. 이제는 가변성이 없는 시절이 되었다. 지금 무엇을 한다고 인생이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
그래서 생각했다. 지금이야말로, 은퇴 이후의 삶이야말로 오늘을 살아야 한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