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몸에 각인된 산업화 시대의 시간관념
은퇴를 하자 주체할 수 없는 시간이 몰려왔다. 어영부영 하루가 지나갔다. 어떤 사람들은 얽매이는 것 없이 지낼 수 있어 퇴직 후 삶이 좋다고 한다. 그러나 나는 좀 당황스러웠다. 내가 성취지향적이거나 엄청 열심히 사는 사람은 아니지만 그냥 되는 대로도 못 사는 성향인 것 같았다.
교사로 근무할 때, 방학을 하면 좋았지만 방학이 끝나도 좋았다. 개학 전날에는 심난해서 잠도 안 온다는 선생님도 계셨다. 나는 방학 중에 풀어질 대로 풀어진 긴장감을 다시 가질 수 있어서 좋았다. 그러니 이 남아도는 시간이 은근히 버거웠다.
아직까지 내 몸에는 산업화 사회의 시간이 각인되어 있었다.
산업화 이전 농사짓던 시절에는 사람들이 지금과 같이 시간대로 움직이지 않았다고 한다. 9시까지 출근하고 12시에 밥 먹고, 6시에 퇴근하는 그런 시간표가 없었다는 말이다. 해 뜨면 밭에 나가 일하고 일이 끝나면 아무 때나 그만두는 것이 농경시대인의 시간관념이다.
산업혁명 초창기에 농노에서 해방된 사람들이 도시로 몰려왔다. 대부분 노동자가 되었다. 그러나 정해진 시간대로 사는 게 어려워 부랑아로 떠도는 사람도 많았다. 내 맘대로 혹은 자연의 순환에 따른 시간 개념에서 살다가 정해진 시간표대로 산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농사짓던 사람을 공장 노동에 적응시키는 것이 당대의 자본가의 과제였던 것 같다. 부랑자들을 정신병원에 입원을 시키는 일까지 벌어졌다. 지금 보면 어이없는 일이지만 당시에는 최고의 지성이라는 사람도 이를 당연시했다. 제레미 벤담의 판옵티콘도 이런 부랑아를 관리하고 규율하는 감옥체계로 제안되었던 것이다.
일제강점기에 일본이 우리나라에 많이 설치한 것이 시계탑이라는 말도 있다. 우리를 산업시대 시간규율로 관리하기 위한 의도였다고 한다.
찰리 채플린의 모던타임스란 영화는 산업화 시대의 시간관념을 잘 보여주는 영화다. 영화는 시계가 돌아가는 인상적인 장면으로 시작한다. 공장에서는 시간이 곧 돈이다. 출근할 때 기계에 시간을 체크하고 화장실에 갈 때도 시간을 체크한다. 시간을 아끼기 위해 일을 하면서 점심을 먹여주는 자동기계도 도입하려고 한다. 결국 산업화 시대의 시간표를 견디지 못한 주인공은 공장에서 벗어나 뜨내기의 삶을 선택한다.
산업화가 무르익은 시대에 태어나서 경제개발 시대에 학교를 다니고, 직장도 학교였던 나에게는 산업사회 시간표가 몸에 배어 있었다. 은퇴 초에는 출근할 직장도 없는 데 7시면 눈이 떠졌다. 낮이면 은연중에 어딘가로 나가야 할 것 같은 압박감도 생겼다. 더구나 ott 영화나 드라마를 주말에만 몰아서 보는 것은 뭐란 말인가? 인간을 농경사회 시간리듬에서 산업시대 시간리듬으로 바꾸는 과정이 고통스러웠던 것처럼 그 역도 저절로 되는 것은 아니었다. 객관적으로는 얽매이는 시간표가 없어졌지만 내 몸은 여전히 출근의 기억에 머물러 있었다.
별일 없이 산다(?)
1 년쯤 지나자 상황이 달라졌다. 방학이 길어지면 느슨해질 대로 느슨해지던 버릇이 어디 가지 않았다. 이제는 늦잠도 자고 늦은 밤까지 깨어 있기도 한다. 영화도 보고 싶을 때 본다. 하루 종일 집에 있어도 나름 괜찮다는 느낌도 든다. 오랜 시간 각인되었다고 생각한 산업화의 습성이 그다지 위력적이지도 않았다. 시간과 공간은 분리된 것이 아니라더니 공간이 바뀌니 시간도 달라졌다. 하루 종일 집에 있어도 괜찮았다. 집에만 있어도 시간이 잘 갔다.
퇴직 후로는 대부분 집에서 식사를 해결하다 보니 밥 해 먹고 일상생활을 유지하는 데 시간이 많이 든다. 이전에는 사 먹던 김치도 담가먹게 된다. 직장에 다닐 때는 누군가 농사지은 것을 주면 다듬을 시간이 없어 버린 적도 많았다. 이제 남는 것은 시간뿐이라고, 안 하던 고구마 줄기도 다듬고, 밤껍데기도 1시간 넘게 까고, 김치도 직접 담그고 있었다.
먼저 퇴직 한 사람들이 퇴직을 하면 집이 깨끗해지고 집에 있는 식물도 잘 자란다고 했다. 예전에는 한 번 할 청소를 두 번 한다. 전에는 식물을 1년 넘기지 못하고 다 죽였다. 오죽하면 딸한테 죄 좀 그만 지으라는 핀잔도 받았다. 이제는 1년을 넘어 잘 자라는 화분도 생겼다. 특별히 하는 일 없이 어영부영하다 보면 하루가 다 간다. 치매를 예방한다는 핑계로 시작한 스도쿠 게임에 시간 가는 줄 모르는 경우도 있었다. 정말 별일 없이 하루하루가 지나고 있었다.
이런 생활도 나쁘지 않았다. 대부분 퇴직자들이 이렇게 지내고 있지 않을까? 이제 일상으로 돌아와 일상의 정체성을 만들어 가는 것도 좋지 않아? 그렇게 생각했다. 열심히 일한 당신, 맘껏 쉬어도 된다고 위로했다. 이제는 시간표에 얽매이지 않는 생활을 할 수 있다니 얼마나 좋은가 합리화도 했다.
그러나 마음 한편에서 이대로 가도 되는지 불편함이 있었다. ‘어 이러다 그냥 늙겠는데.’ 이런 경각심이 마음 한 구석에서 올라오기도 했다. 일종의 길티 플레저 같은 희미한 죄책감이 느껴졌다.
에리히 프롬의 자유로부터의 도피에는 이런 구절이 나온다.
자본주의의 발달과 함께 ‘심리적 분위기’에도 중대한 변화가 나타났다. 중세가 끝날 무렵 근면 정신이 생활 전반에 퍼지기 시작했다. 근대적 의미의 시간 개념이 발달하기 시작했다. 1분 1초가 귀중해졌다. 사람들이 이처럼 시간을 새롭게 의식하게 된 징후는 16세기부터 뉘른베르크에서 시계가 15분마다 시각을 알려주었다는 사실이다. 휴일이 너무 많은 것은 불행한 일로 생각되었다. 시간이 너무 귀중해서 쓸데없는 일에 시간을 쓰면 안 될 것처럼 느껴졌다.
내 몸은 산업화 시대의 시간을 잊어 가고 있었지만 나의 의식은 여전히 기억하고 있었다. 몸에 밴 습관이 무섭다고들 하지만 마음에 든 습관이 더 무서울 수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은퇴를 했음에도 맘껏 편하게 놀지도 못하고 있었다. 별일 없이 지내는 것에 분노까지는 아니더라도 일종의 불편함 내지 죄의식을 느끼고 있으니 말이다.
시간 보내기도 연습이 필요하다
이제 퇴직 전처럼 시간에 맞춰 살 필요도 없고 그러고 싶지도 않았다. 그러나 그냥 두면 하는 것 없이 자괴감만 생길 것 같았다. ‘나 알고 보니 자기 주도성이 정말 없는 사람이었네 ’
먼저 퇴직한 사람들에게 시간을 어떻게 보내느냐고 물었다.
아주 소수의 경우, 출근할 때처럼 9시부터 나름의 계획을 세워 지낸다는 사람도 있었다. 대부분의 경우 직장을 다닐 때처럼 정해진 시간표대로 살지는 않는다고 한다. 더욱이 시간이 지나면 대부분 좀 더 느슨해지는 것 같았다. 오전 중에 중요한 일을 하고 나머지 시간은 산책을 하던지 집안일을 하던지 편안하게 시간을 보낸다는 사람도 있었다. 하루 2-3시간 운동하는 시간만 확보되면 나머지 시간은 자유롭게 보낸다는 분도 있었다. 몇 년을 하루도 빠짐없이 만보 걷기를 실천해서 우리를 감탄하게 했던 친구가 있다. 퇴직 후 어느 순간부터는 매일 만보에 집착하지 않고 한 달 평균 만보 걷기로 탄력성을 주었다고 했다.
대부분의 대답의 공통점이 있었다. 본인이 중요하고 의미 있다고 생각하는 일들을 시간표의 중심에 두고 나머지 시간은 자유롭고 느슨하게 보낸다는 것이다. 그래서 생각했다. 흐르는 시간에 나름의 의미 있는 또는 알찬 점을 찍자. 나름 알차고 의미 있는 활동을 중심으로 유연하고 느긋한 시간표를 만들자.
앞으로 시간이 지나고 상황이 바뀌면 또 다른 시간표가 필요할지도 모르겠다. 사실 절대적인 시간이란 없다지 않는가? 공간에 따라 시간이 달라지듯 우리의 시간도 상황에 따라 달라질 수밖에 없을 것 같다.
몰입의 즐거움이란 책에 이런 내용이 있다.
문명으로서 성공하느냐의 여부는 시민이 자유 시간을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달려 있다……. 여가를 즐기는 데는 특별한 재주가 필요 없고 아무나 즐길 수 있다는 믿음이 널리 퍼졌다. 그러나 현실은 정반대다. 여가는 일보다 즐기기가 더 어렵다. 마음대로 쓸 수 있는 시간이 주어져 있다 하더라도 그것을 효과적으로 쓰는 요령을 모르면 삶의 질은 올라가지 않는다. 그것은 절대로 사람이 저절로 터득할 수 있는 게 아니다.
몰입의 즐거움이라는 책에서 주제보다 더 공감한 내용이다.
시간을 보내는 것도 연습이 필요하다. 퇴직 후 주체할 수 없는 시간 앞에서 어떤 시간표를 갖느냐는 은퇴자들이라면 누구나 겪어야 할 문제이다. 정답은 없다고 생각한다. 각자 자신의 스타일로 시간표를 만들어가면 된다. 늘 그렇듯이 상황이 바뀌면 시간표도 바꾸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