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변방 Sep 12. 2024

은퇴 후 만난 자유

250여 년 전 미국의 한 독립운동가는 ‘자유가 아니면 죽음을 달라’고 외쳤다. 20대에 이 말을 들었을 때는 가슴이 웅장해졌다. 인간에게 자유란 숨을 쉬게 하는 기본 조건이지 않은가? 자유는 우리가 추구해야 할 보편적 가치이며 좋은 것이다. 그러나 살다 보니 자유가 그리 단순하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된다. 


정치적 이념에 따라 얼마든지 왜곡되고 이용당하는 개념이 자유다. 자유가 사람마다 계층마다 평평하지 않다는 것도 알게 된다. 일상생활에서도 자유라는 이름으로 많은 시행착오가 생긴다. 특히 자식을 키울 때 어디까지 허용해야 하는가에 대해 늘 헛갈리고 갈등을 겪는다. 즉 자유란 그리 만만하고 쉬운 게 아니라는 것이다.


은퇴 후 자유의 또 다른 모습과 만나게 되었다. 굳이 말하자면 에리히 프롬이 말하는 자유의 이중성이다.  


세 사회의 전통적 유대로부터 해방된 것은 자유라는 새로운 느낌을 개인에게 주었지만, 동시에 고독과 고립을 느끼게 했고, 회의와 불안으로 그를 가득 채웠다.


이 말은 <자유로부터의 도피>라는 책에 나오는 구절이다. 이 책은 '왜 독일 국민들이 나치즘에 복종했는가'를 사회심리적으로 분석한 것이다. 인간은 자유를 추구하는 만큼 공동체에 대한 소속감도 추구한다. 자유가 새로운 자아실현이 장이 되지 못하면 인간은 고독과 불안을 참지 못하고 더 큰 권위에 복종함으로써 안정을 추구한다는 것이다. 이 책에서 프롬은 자유가 무조건 좋은 것이 아니라 여러 모습을 갖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흔히 사람들은 은퇴를 하면 얽매이는 것 없이 자유롭게 살 수 있으니 좋은 것 아니냐고 말한다. 예전에 어떤 선생님은 퇴직만 하면 맘껏 여행을 다니고 싶다고 했다. 어느 인기 드라마의 대사처럼 여행을 다니다 길 위에서 죽어도 좋을 것 같다는 말도 덧붙였다. 무척 낭만적이라 가슴이 설렜던 기억이 있다.


그러나 막상 준비 없이 은퇴 후 삶에 던져지니 사정이 달라졌다. 불안이 나를 가득 채운 것도 아니지만 퇴직 후 자유가 마냥 좋은 것도 아니었다. 더 이상 출근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은 해방감과 여유를 주었다. 동시에 소속된 곳도 없고 나를 강제해 줄 스케줄도 없다는 것은 상실감도  주었다. 이제 나를 증명할 시스템으로부터 제외되었다는 상실감이었다. 알게 모르게 일을 통한 삶의 의미부여가 제법 강했던 모양이다. 거의 일중독으로 살았고 직업적 정체성 말고 다른 정체성이 없는 남자들은 이 상실감이 더 크게 다가온다. 이런 사람에게도 퇴직 후 자유는 마냥 좋은 게 아니다. 


일찍부터 빠른 은퇴를 꿈꾸는 파이어족들은 다를 것이다. 그들은 다양한 정체성을 갖고 있고 다양한 부분에서 의미를 찾을 수 있으니 그 자유를 맘껏 누릴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취미도 없고 인생을 즐길 줄 모르고 일과 가정만 알고 살아온 나 같은 사람은 자유를 마냥 즐길 수 없었다.


상실감이야 당연하지만 불안감은 어디서 오는가? 

자유가 주는 불안감은 여백에 대한 공포로 해석할 수도 있다. 사람들은 은연중에 여백에 대한 공포를 갖고 있다. 공간이 너무 휑한 경우 불안감을 느껴 무언가로 채우려는 것, 시간이 갑자기 많이 남았을 때 무엇을 할지 몰라 우왕좌왕하는 것이 공간적 시간적 여백에 대한 공포의 일종이다. 


신규시절 교사들은 수업 중에 학생들에게 질문을 했을 때 곧바로 반응이 없으면 많이 당황한다. 그래서 혼자 묻고 혼자 대답하는 경우가 종종 생긴다. 사람들과 대화를 할 때도 여백을 못 참는 사람들이 있다. 대화가 끊기거나 조용해지면 불안해하거나 불편해져서 뭔가라도 얘기하려고 하는 것도 여백에 대한 공포일 수 있다. 


사소한 여백에도 불안해하거나 불편해하는 사람들이 퇴직 후 이 기다란 시간의 여백을 만났을 때 불안해하는 것은 당연하지 않은가? 물론 적응력이 강하고 다양한 정체성을 갖고 있어서 어떤 경우에도 건강하고 씩씩하게 지내는 사람들도 있다. 나도 다른 사람에 비해 여백에 대한 공포가 적은 편이라 생각했다. 어느 상황에서나 적응도 잘한다고 여겼다. 오만이었다. 


퇴직을 하니 할 일은 없는데 살아갈 날은 많이 남았다. 불안의 핵심은 이 긴 시간 무엇을 하고 살아야 할지 모르기 때문이다. '은퇴 후 삶, 어디서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있을까?' 좀 더 깊이 생각해 보면 이것이 불안의 핵심 원인이었다. 


나와 같은 불안은 일종의 사치이고 배부른 투정이라고 보는 사람도 있다. 내 나이 또래의 많은 사람들은 노후가 준비되지 않아 먹고사는 게 시급한 경우가 더 많다. 나와 동갑의 미싱을 하는 친구는 앞으로 70이 될 때까지 일을 할 수 있으면 좋겠다고 한다. 60대에도 재취업을 위해 고군분투하는 사람들도 많다. 그분들에게는 정말 죄스럽고 미안할 따름이다. 


경제적으로 먹고살만한 나는 남은 노년의 삶의 의미를 무엇으로 채울지 고민하고 있다. 모든 사람은 각자의 사정과 형편에 따라 어려움이 있다. 교사를 하면서 깨달은 점이다. 보통 어른들은 아이들이 힘들다고 하면 어린데 힘들 게 뭐가 있냐고 말한다. 그러나 학생들과 상담해 보면 우리가 보기에 별거 아닌 것도 그 아이에게는 정말 심각한 문제인 경우가 많다. 따돌림은 아이가 학교를 포기하게 만들거나 성격마저 바뀌게 할 만큼 중요한 문제가 된다. 요즘 아이들이 물질적으로 힘들지 않다 해도 심리적으로는 더 힘들 수 있다. 내 경우도 객관적으로 배부른 투정일 수 있지만 주관적으로는 절실한 고민이다.


에리히 프롬은 자유의 이중성을 극복하기 위한 대안으로 적극적 자유 또는 자발성을 제시한다. 


정상적인 보통사람은 이런 개인적 고독감과 무력감을 전혀 의식하지 못한다. 그 느낌은 그들이 의식하기에는 너무 무섭다. 그는 일상적인 활동, 관계에서 얻는 자신감과 칭찬, 성공, 기분전환, 즐기기, 교제하기, 여기저기 돌아다니기 등으로 그 고독감과 무력감을 완전히 가려버린다. 하지만 어둠 속에서 휘파람을 불어도 빛은 비쳐오지 않는다. … 무엇으로부터의 자유라는 무거운 짐을 계속 짊어질 수는 없다. 소극적 자유에서 적극적 자유로 나아가지 못하면 아예 자유로부터 도피하려고 애쓸 수밖에 없다. 자유에 내재하는 기본적인 양분성, 즉 개성의 탄생과 고독의 고통은 인간의 자발적인 행동으로 더 높은 차원에서 해소된다. 


프롬의 제안은 고리타분하고 뻔한 느낌도 나지만 결국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삶에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일을 하라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의미 있는 일을 할 때 더 이상 자유는 불안이 아니라 자기를 실현해 주는 토대가 될 것이다. 이제부터 무엇으로 남은 인생을 채울 것인지, 무엇을 하고 싶은지 고민을 시작해야겠다.


은퇴 후에도 삶은 계속된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