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주맨이 없는 이유

도시의 품격이 아니라 조직의 구조가 문제다

by 변사또


나는 공공기관에서 홍보팀장을 맡아 일하며 지방자치단체와 공공기관의 홍보가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가까이에서 지켜볼 기회가 많았다. 회의실에서 시작된 아이디어가 결재판을 거치며 어떤 모습으로 세상에 나오게 되는지, 또 어떤 콘텐츠는 세상 밖으로 나오지도 못한 채 사라지는 지도 수없이 봐왔다.


그 과정에서 분명히 느낀 것이 있다. 공기관 홍보의 문법은 이미 크게 달라졌다는 사실이다. 특히 충주맨 이후, 지방 홍보의 패러다임은 완전히 바뀌었다. 이제 시민들은 근엄한 홍보영상이나 정제된 보도자료보다 인간적인 콘텐츠, 때로는 스스로를 비틀 줄 아는 솔직함을 더 좋아한다.


그런데 전주는 여전히 과거의 도시 이미지와 품격이라는 프레임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솔직히 말하자. 전주에 인재가 없는 것이 아니다. 전주라는 도시가 가진 특유의 엄숙주의와 관료적 폐쇄성이 ‘전주맨’이 될 가능성을 애초에 짓눌러 버리고 있는 것이 아닐까?


1. 슬로건은 바뀌었지만 사고방식은 그대로

전주는 오랫동안 ‘가장 한국적인 도시’라는 이미지로 자신을 설명해 왔다. 이 표현은 공식 슬로건이라기보다 전주를 상징하는 문장처럼 널리 사용돼 왔다.


이후 전주시는 도시 브랜드를 바꾸며 ‘한바탕 전주, 세계를 비빈다’ 같은 슬로건을 내놓기도 했다. 전통과 현대가 어우러진 역동적인 문화도시라는 메시지를 담으려는 시도였다. 최근에도 문화도시, 미식도시 등 다양한 브랜드 메시지를 통해 전주의 이미지를 새롭게 만들려는 노력이 이어지고 있어 보인다.


하지만 슬로건이 몇 번 바뀌었느냐보다 더 중요한 질문이 있다. 정말로 도시의 인식과 홍보 방식이 함께 바뀌었느냐는 것이다.


사실 전주가 전국적으로 알려지게 된 과정만 봐도 흥미로운 지점이 있다. 전주가 유명해진 것은 행정이 만든 홍보 캠페인 때문이라기보다, 전주 한옥마을을 방문한 외부 관광객들의 경험과 입소문이 훨씬 큰 역할을 했다. 여행객들이 찍어 올린 사진, 블로그와 SNS 후기, 방송과 유튜브 콘텐츠가 쌓이면서 전주는 자연스럽게 ‘가보고 싶은 도시’가 되었다.


다시 말해 전주의 브랜드는 상당 부분 외부 방문객들이 만들어 준 도시 이미지에 가깝다.


그런데도 정작 행정의 홍보는 여전히 ‘품격 있는 도시’, ‘전통의 중심’이라는 정제된 이미지를 반복하는 데 머무는 경우가 많다. 새로운 시도를 하려 하면 어김없이 이런 질문이 나온다.


“이게 우리 전주의 격에 맞느냐.”


겉으로는 품격을 지키자는 말처럼 들리지만, 실제로는 도전을 가로막는 장벽이 되기도 한다. 인문학적으로 보자면 이것은 일종의 문화적 박제화다. 살아 움직여야 할 전통이 박물관 유리창 안에 갇혀 버린 상태다.


충주가 스스로를 희화화하며 웃음을 만들어 낼 때, 전주는 여전히 갓끈을 고쳐 매느라 골든타임을 놓치고 있는 셈이다.


2. 스타를 용납하지 못하는 ‘게(Crab) 신드롬’


서구 사회학에서는 바구니 속 게들이 서로를 끌어내려 아무도 밖으로 나오지 못하게 만드는 현상을 게 시드롬(Crab Syndrome)이라고 부른다.


누군가 창의적인 방식으로 주목을 받으면 곧 이런 말이 따라온다.

“공무원이 왜 저러냐.”

“본업은 안 하고 쇼하는 거 아니냐.”


충주맨이 화제가 되었을 때도 비슷한 시선이 있었다. 만약 이런 문화가 조직 내부에서 반복된다면, 누가 굳이 자신의 시간과 에너지를 들여 새로운 시도를 하려 하겠는가. 조직의 안정이라는 이름 아래 모두를 평균 속에 묶어 두면 결국 남는 것은 무난함뿐이다.


3. 결재판에서 사라지는 창의성


전주맨이 나오지 않는 현실적인 이유 중 하나는 공공조직 특유의 결재 구조다.


홍보 영상 하나를 만들기 위해서도 실무자에서 시작해 여러 단계를 거쳐야 한다. 그 과정에서 처음의 아이디어는 조금씩 수정되고 다듬어진다. 결국 남는 것은 누구에게도 불편하지 않지만 누구에게도 특별히 재미있지 않은 평범한 홍보물이다.


하지만 시민들이 좋아하는 콘텐츠는 대개 그 반대다. 약간은 엉뚱하고, 조금은 과감하며, 때로는 실수의 가능성도 있는 콘텐츠다. 창의성은 지나치게 정돈된 구조 속에서는 살아남기 어렵다.


정말로 전주맨을 원한다면, 조직의 리더십부터 다른 태도를 보여야 한다는 이야기가 흔히 나온다. 실제로 요즘은 “망쳐도 괜찮다. 재미있으면 올려라” 같은 말이 조직 안에서 들리지 않는 것도 아니다.


문제는 말이 아니라 구조다.


한 번의 결재, 한 번의 회의, 한 번의 ‘이건 조금 아닌 것 같다’는 의견이 쌓이면 콘텐츠는 결국 가장 무난한 형태로 돌아온다. 누구도 책임지지 않아도 되는 안전한 결과물 말이다. 그렇게 만들어진 홍보물은 실패할 일도 없지만, 기억될 일도 없다.


그래서 전주맨이 나오지 않는 이유는 단순히 리더의 의지 부족 때문만은 아니다. 조직 전체가 자연스럽게 ‘평균으로 회귀하도록 설계된 구조’ 자체가 더 큰 문제일지도 모른다..


결론: 박제된 도시에서 벗어나야 한다


전주맨이 없는 것이 아니라, 전주라는 조직과 문화가 그들을 숨 막히게 만들고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볼 필요가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전주는 이미 시민들과 방문객들이 만들어 준 도시 브랜드 덕분에 전국적인 인지도를 얻었다. 그렇다면 이제 행정이 할 일은 도시를 더 근엄하게 포장하는 것이 아니라, 그 생생한 에너지와 인간적인 매력을 솔직하게 보여주는 것일지도 모른다.


전주가 조금 천박해져도 괜찮다.

어쩌면 그것이 지금 사람들이 보고 싶어 하는 진짜 전주일지도 모른다

작가의 이전글세계를 맛보게 하는 K-푸드 성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