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기대하는 수준은요, 이 정도가 아니에요. 잘 알고 계시죠?"
"사실 저 일곱 달 동안 참은 겁니다..나아지겠지 나아지겠지 하면서요. 그런데, 그대로더라고요?"
나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고, 최대한 내면의 감정을 억눌러 낸 눈빛으로 이 상무의 눈을 바라봤다.
아니, 사실대로 정확히 말하면
나는 아무런 대꾸도 할 수 없었고, 내면의 요동치는 감정을 숨길 자신이 없어 이 상무의 두 콧구멍만 바라 보고 있었다. 쉴 새 없이 몰아치는 질책을 묵묵하게 감내한다는 인상을 주는 한편, 흔들리는 동공을 통해 내 속을 들여다 볼 수 없길 기대하면서 말이다.
'상대가 아무런 대꾸를 하지 않아도 저렇게 끊임없이 이야기를 할 수 있다는 것은 어떤 종류의 만용일까?'
'어떤 삶을 살아 왔길래 회사에서 지치는 법이 없고, 권력에 대한 욕심도 저토록 거대한 걸까?'
'남편이 무언가 마음에 들지 않는 행동을 했을 때도 이렇게 쏟아내는 타입?'
'콧구멍이 너무 작아 보이는데, 콧구멍 축소술 같은 거라도 받은 걸까?'
......
어느 새 나는 이 상무의 입에서 튀어 나온 단어 하나조차 귀담아 듣지 않고, 혼자 이런저런 생각과 망상에 빠진 채 유유자적 노닐고 있었다.
나도 모르는 사이 고개는 점점 아래로 가라앉고 시선은 콧구멍에서 목 아래까지 내려와 버렸다.
아뿔싸! 졸음만은 견뎌내야 하는데...!
"김 매니저님?"
"......."
"김 매니저님!!"
"..에,엣...! 네네!"
"됐고, 그냥 나가세요. 다음 달에 실적 보고 다시 얘기합시다. 그 땐 정말 참지 않을 겁니다. 아셨죠?"
아까 이미 일곱 달을 참았다고 했는데, 그렇다면 오늘도 또 참았다는 이야기인가?
하긴 기억을 되짚어 보니, 늘 참고 있다고 참아 왔다고 말은 하지만 실적 점검 회의 때의 이 담당은 언제나 소리를 고래고래 지르고 있었던 것 같다.
퇴근길 발걸음이 여느 때보다 더 무겁게 느껴진다.
아무리 내 스스로 애써 무시했다손 쳐도, 직장에서 상사에게 좋지 않은 소리를 실컷 듣고 나서 기분이 좋을리도 몸이 가벼울 리도 만무하다.
터벅터벅. 저만치 보이는 버스 정류장을 바라보며 걷다가 문득 하늘을 보니 땅거미가 내려 앉고 있었다.
그래도 해가 길어져서 다행이다. 해가 짧은 겨울에는, 이런 기분으로 회사 밖으로 나와 햇빛 한 점 없는 까만 어둠이 펼쳐져 있는 걸 보는 게 싫었다.
버스 정류장에 다다른 나는, 광역 버스를 타려는 사람들의 기나긴 줄 맨 끝에 가 섰다. '다음 버스 도착 예정 시간은 19분 후', 이렇게 한참을 기다렸다가 또 한참을 타고 집으로 가야 한다. 그리고 잠깐의 시간을 그 '집'에서 보낸 뒤에 또 한참을 기다렸다가 한참을 타고 회사로 와야 한다.
'집'이란 건 대체 내게 무슨 의미일까? 휴식? 재충전?
그저 정해진 근로 시간 외 시간에 잠시 몸을 뉘일 수 있는 임시 거처 정도이려나?
"삑-"
교통 카드를 태깅하는 소리가 참으로 명료하고 경쾌하다. 흐리멍텅한 것들 투성인 내 인생에서 거의 유일하게 명확한 찰나의 순간.
이 순간을 지나 버스 좌석에 몸을 안착시키고 나니 안도감이 밀려 온다. 온종일 머릿 속을 어지럽히던 잡다한 생각들도 상자 안에 밀폐되어 내가 볼 수 없는 어딘가에 잠시 숨어 버렸다.
창문 밖으로 버스 정류장을 바라 보니, 20대로 보이는 외국인 관광객 서너명이 큰 캐리어를 저마다 하나씩 쥐고 버스를 기다리고 있다. 커다란 배낭까지 등에 짊어 지고 있지만 모두들 표정이 밝다.
"어이! K-직장인! 미안하지만 우린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하다!"고 나 보란 듯이 연기하는 것만 같았다.
작년에 도쿄로 출장을 갔을 때, 여자친구가 꼭 갖고 싶다던 피규어를 구하고선 기분이 좋아져서 활짝 웃으며 고개를 돌렸었는데, 그 때 뭔가 세상 우울한 표정을 짓고 있던 중년의 비즈니스맨과 눈이 마주쳤었다.
'실의', '실패', '실망', '실연', '실소' 이 단어들을 꾹꾹 눌러 담고 있던 그 눈은, 두고 두고 내 뇌리를 스쳐 지나갔다. 지금의 내 모습이, 저들 눈에는 그와 비슷할까?
'아니야, 그 정도까진 아닐거야..'
'내가 오늘 좀 힘들긴 한데, 그 정도까지 밑바닥으로 내려 오진 않았어.'
'그런데, 내가 직장 생활을 몇 년이나 했더라..9년, 아니 10년이네?'
'거짓말..벌써 10년이나 지났을 리가 없잖아?'
......
"거짓말이 세상에서 제일 나쁜 거야. 알았니? 엄마는 다른 잘못들은 용서해도 거짓말 하는 건 용납 못 해."
"네.."
내가 누군가의 말을 듣고 제대로 이해하기 시작했을 무렵부터, 엄마는 "거짓말 하면 안 된다.", "남을 속여서는 안 된다"는 말을 귀에 못이 박히도록 말씀하셨다.
나는 '거짓말은 세상에서 가장 큰 죄악'이라고 생각하게 되었기에, 거짓말을 한다는 행위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왜 거짓말이 그토록 악랄한 것이었을까? 수백 번, 수천 번을 강조하여 들었지만, '거짓말이 왜 나쁜지', '거짓말을 하면 왜 안 되는지'에 대해서는 들은 적도 되물은 적도 없었다.
그저 절대적인 금기, 그 자체였다.
"응, 나 괜찮아요. 나 사실은 이런 일이 해보고 싶었거든."
"정말이지? 괜히 엄마 안심시킨다고 거짓말 하는 거 아니고?"
"엄마. 내가 언제 거짓말 하는 거 봤어요? 진짜라니깐."
내 인생의 첫 번째 거짓말 상대는, 다름 아닌 우리 엄마였다.
'영화 감독이 되고 싶다'는 꿈, 누구나 쉽게 내뱉을 수 있을지는 몰라도 냉정한 현실은 안다면 그 말의 무게를 알아야 했다. 내가 그랬다, 막연하게 꿈꿨고 쉽게 내뱉었었다. 그리고 아주 긴 시간 동안 냉정 아니 냉혹한 현실에 내던져져야 했다.
하지만, 쉽게 내뱉었을지언정 그 꿈에는 나의 진심이 있었다. 동기들이 모두 졸업하고 어엿한 대기업에 취업하여 내게 뽐내듯 명함을 건넬 때에도, 적은 벌이로 생활이 어려워져 서른이 넘은 나이에 편의점 야간 아르바이트를 시작했을 때에도, 꿈을 향한 내 마음은 꺾여 나가지 않았다.
엄마가 무릎이 좋지 않아 식당일도 그만 두고 병원비로 전전긍긍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그 때 비로소 그 마음은 푸석푸석하게 시들은 갈대처럼 아무 힘 없이 꺾여 버렸다.
졸업 후 몇 년간 영화판만 전전하다가 취업을 하겠다고 이력서를 내니 받아주는 곳이 없었다. 그래도 나름 서울에서 이름 있는 대학교를 나왔기에 어떻게든 취업이 될 거라고 생각했던 자신이 너무 순진하게 느껴졌다.
결국, 눈높이를 낮춰 작은 회사의 영업부로 입사하게 되었다. 취업 전선에 뛰어든 지 딱 1년만이었다.
'엄마는 내가 한 말이 거짓말이란 걸 알았을까?'
'아니야, 알았다면 가만 있지 않았을걸? 엄마는 거짓말 하는 것 만큼은 절대로 용납할 수 없다고 했으니까!'
"빼애액-"
누군가 누른 버스 정차 벨소리에 짐짓 잠에서 깨었다.
아, 꿈이었구나.
창 밖을 보니 다음 정류장에서 내려야 한다. 버스에 오른지 한 시간도 더 지났다니, 정말 세상 모르고 정신없이 잠들었던 모양이다.
덜커덩, 치이익-
"천천히 내리세요~"
삑, 삑, 삑, 삑, 삑-
차례로 줄지어 버스에서 내리는 사람들, 그리고 그에 속한 나. 갑자기 어릴 때 했던 게임 <레밍즈>가 떠올랐다. 아, 안돼. 오늘은 이런 생각 더 이상 하지 말자.
"후아아암~"
횡단보도에 서서 늘어지게 하품을 한 뒤, 목을 좌우로 한 번씩 가볍게 돌렸다.
좁은 버스 좌석에서 구겨진 채 자느라 뻣뻣해진 몸을 조금이라도 풀어 볼 요량이었다.
그 때, 갑자기 초등학교 3,4학년 정도 되어 보이는 남자 아이 둘이 내 옆으로 뛰어와 섰다.
한 아이는 살짝 마른 체형에 스포츠 머리, 메시 유니폼을 입고 있었고
다른 아이는 통통한 체형에 황갈색 브릿지 염색을 한 머리, 시카고 불스 농구팀 유니폼을 입고 있었다.
'훗..축구 대 농구인가?'
둘 다 새까맣게 그을린 팔뚝에, 땀에 절어 꼬질꼬질해 보이는 목 뒷덜미가 눈에 띄었다. 누가 봐도 하루 온종일 밖에서 뛰어 논 모습이다.
"야, 어디야? 이쪽이야?"
"어, 나만 따라와. 여기 건너서 저 쪽으로 가면 서인역임!"
뭔가 흥분과 에너지를 주체하지 못하고 방방 뛰는 듯한 두 소년의 모습이 날 미소 짓게 만들었다. 내 어린 시절이 언뜻 비쳐 보이는 것도 같았다.
이런 소소한 장면에 마음이 풀어지다니, 한편으로는 내 심신이 많이 유약해진 걸지도 몰랐다.
이윽고, 횡단보도의 신호가 초록색으로 바뀌었다.
두 아이는 참느라 혼났다는 듯 횡단보도를 빠르게 가로 질렀다. 그 모습도 귀엽다는 생각에 왠지 눈을 뗄 수가 없었다.
툭, 툭, 툭,
'어? 뭐지?'
겅중거리며 뛰어 가는 아이의 반쯤 열린 크로스백에서 작은 종이 뭉치 같은 게 계속 떨어졌다.
둘은 아무 것도 모르는지 그저 계속 뛰어갈 뿐이었다.
나는 조금 속도를 높여 아이들이 떨어 뜨린 종이 뭉치들을 주웠다. 이게 뭐지?
자세히 들여다 보니, 돈이었다.
대부분 천원 짜리에 오천원 짜리도 일부 섞여 있었다.
나는 큰 목소리로 황급하게 아이들을 불렀다.
"저, 저기!!!"
들었을까? 자기들을 부르는 소리인지 알았을까?
"엇!"
다행히도 아이들은 뒤를 돌아 봤고, "이거 흘렸어요!"라는 내 외침을 듣고는 가던 길을 되돌아 다시 달려 왔다.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아이들은 민망할 정도로 연거푸 허리를 굽혀 인사했다.
노랗게 염색한 모습 때문에 '살짝 불량한 아이들인가?'하는 생각도 잠시 했었는데, 감사를 표하는 모습을 보니 그저 영락 없이 순수한 아이들이었다.
"아니에요, 하하..조심하고, 잘 가요!"
좋은 일을 했다는 생각에 가슴 속에 조금 벅차 올랐다. 요새 같이 삭막한 사회에선 이런 사소한 선행도 훌륭한 미담이 된다. 이제 이 좋은 감정을 안고 어서 집으로 가자.
"저기요.."
"어...?"
뒤를 돌아 보니 아까 그 아이들이 머뭇거리는 표정으로 내게 손을 내밀고 있었다.
처음에는 자세히 보지 않고 "잘 가요~"라고 다시 인사하고 발걸음을 총총 옮겼다. 그런데,
"저기요.."
또 다시 나를 부르는 아이들의 목소리가 들려 뒤를 돌아 보니, 역시나 같은 모습으로 손을 내민 채였다.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어 아이의 손을 자세히 들여다 보았더니 꼬깃 꼬깃 공처럼 접혀 있는 천원 짜리였다.
고마움의 표현으로 나에게 이걸 주고 싶었던 모양이다.
순간 나도 모르게 풉 웃음이 터져 나왔다.
"아니에요~ 괜찮아요! 이제 어서 가요~"
"고맙습니다!"
아이들은 다시 한 번 허리를 잔뜩 굽히고 큰 목소리로 인사를 하더니 쌩 하고 어디론가 달려가 버렸다.
'애들은 역시 애들이네, 귀엽네.'
그저 소소한 일상, 작은 웃음과 작은 행복감. 이 날의 감상은 그렇게 마음 속에 간직되었다.
소소한 것은 말 그대로 '소소'한 것이고, 작은 웃음과 작은 행복감은 말 그대로 '작은' 것이었다.
회사에서의 생활, 이 진짜 현실은 내 인생의 대부분을 뒤덮고 있는 '거대한' 녀석이었다.
'영화 같은 삶'이란 말에 난 동의하지 않는다. 이미 영화보다 더 극적이고 영화보다 더 믿기지 않는 사건들이 연속해서 일어나는 것이 삶인데, 어떻게 '영화 같은 삶'이란 어구가 참이 될 수 있을까? 당장 회사 밖으로 뛰쳐 나가 길을 지나는 행인 아무나 붙잡고 그의 인생 이야기를 들어도 이 엉터리 비유의 진위는 판가름 날 것이다.
난 왜 이렇게 또 다시 화가 났고, 생각이 많아졌을까?
간단하다. 난 오늘도 출근했고, 오늘도 또 이 빌어먹을 실적에 시달리고 있으니까.
"삑-" (교통카드 태깅하는 소리)
"드르렁..푸우..." (정신없이 자는 소리)
"빼애액-" (정차벨 소리)
덜커덩, 치이익- (버스 문 열리는 소리)
"천천히 내리세요~" (기사 아저씨의 목소리)
삑, 삑, 삑, 삑, 삑- (차례로 하차하는 레밍즈들이 교통카드 태깅하는 소리)
힘들다, 힘들다.
어쨌든 또 이렇게 하루가 갔구나 싶다.
어제처럼 횡단보도에 서서 늘어지게 하품을 하고는 고개를 까딱거리면서 몸을 풀었다. 이제는 나의 루틴이나 다름 없다. 하루 하루가 모두 똑같은, 데칼코마니 같은 인생이란!
"야, 어디야? 이쪽이야?"
"어, 나만 따라와. 여기 건너서 저 쪽으로 가면 서인역임!"
어..? 낯익은 목소리, 낯익은 대사, 낯익은 광경.
어제와 똑같다.
한 아이는 살짝 마른 체형에 스포츠 머리, 메시 유니폼을 입고 있었고
다른 아이는 통통한 체형에 황갈색 브릿지 염색을 한 머리, 시카고 불스 농구팀 유니폼을 입고 있었다.
어제 본 그 아이들이다.
우연이라고 치부해버리기엔, 둘이 나누는 대화도 옷차림도 분위기도 어제와 너무 똑같았다.
기시감? 데자뷰? 어제 내가 겪은 일은 꿈이었었나?
아리송한 물음표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그 때, 횡단보도의 신호가 초록불로 바뀌었다.
어제와 똑같은 모습으로, 쏜살같이 횡단보도를 가로 지르는 아이들.
'설마, 또 흘리는 거냐?'
툭, 툭, 툭,
내 예상대로였다. 뛰어 가는 아이의 가방에서 꼬깃꼬깃 구겨진 돈들이 툭 툭 바닥에 떨어졌다.
헨젤과 그레텔이 빵 부스러기를 흘리듯이 말이다.
어제와 똑같은 상황에 묘한 위화감이 들었지만, 그렇다고 모른 체 할 수는 없는 터였다.
나는 어제와 똑같이 돈을 주웠고 아이들을 불러 세웠고, 돈을 돌려 주었다.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인사하는 모습도 어제와 완전 똑같잖아. 내 기억이 틀리지 않다면..'
'이제 또 날 따라오겠구나.'
"저기요.."
'역시나!'
이 기묘한 상황에 왠지 모르게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지금 벌어지고 있는 게 현실인가? 아니면, 내가 어제 미래를 앞서 체험하기라도 한 걸까?
천천히 고개를 뒤로 돌리자, 역시나 나를 향해 손을 내밀고 있다.
"아니에요~ 괜찮아요! 이제 어서 가요~"
어제 나를 두 번째 불러 세웠을 때 했던 대사였다.
나는 저게 무엇인지 알고 있기 때문에 어제와 같이 행동할 이유는 없었다.
"저기요..이거. 빨리요."
어제와 다른 대사인데? 어쨌든 상황은 같으니까, 하려던 대로 하고 집으로 가야겠다.
"괜찮아요~ 아저씨 돈 많아! 어쨌든 마음은 고마워요!"
"저기요..빨리 받아요."
아이의 표정이 사뭇 결연해 보였다. 장난기 가득, 귀여워 보이던 구석은 온데간데 사라져 있었다.
뭐지, 조금 성가신데.
대체 왜 이렇게까지 이러는 걸까? 그냥 받고 얼른 집에 갈까?
"저, 그..."
잠깐, 아이의 손바닥 위에 올려져 있는 물체를 다시금 들여다 보았다.
자세히 보니, 그것은 돈이 아니었다.
-'하(下)'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