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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r Gray Aug 20. 2019

18. 마이너리티로 산다는 것

(Week 9) 잘 사냐건 웃지요

호주에서 잠시 지내던 시절의 일이다. 기숙사 생활을 하던 초기, 뜨거운 한낮을 피해 밤에 주로 조깅을 하였는데, 하루는 어린 호주 학생 한 무리가 탄 차가 천천히 나와 내 친구의 곁으로 다가와서는 뭐라 욕을 해댄 것 같았다. 알아듣기가 힘들었고 상대하기는 더 힘들었던 우리는 그저 무시하며 달리기를 계속하였다. 반응이 없자 그들은 우리에게 물병을 던지고는 가버렸다. 굳이 상대했으면 더 큰일이 발생했을 것이라고 서로를 애써 위로하였다.


이십대의 나는 무섭고, 분했다. 애당초 내게 호주는 한국이 본받아야 할 나라였다. 그저 천혜의 자원을 운 좋게 얻은데 그치지 않고, 그것을 보존하려는 철학과 그럴 능력을 지닌 의식이 있는 사람들의 나라였다. 그 날 이후 내게 호주라는 나라는 쫓겨난 죄인들이 원주민을 강제로 몰아내며 만들어낸 나라, 그런 주제에 백호주의라는 오만한 철학으로 무장한 나라가 되었다. 혐오는 혐오를 낳는다.




두번째 해외 생활은 대체로 괜찮았다. 미국 조지아주의 애틀란타는 역사적으로 많은 흑인들이 핍박받고, 뜨겁게 싸우고, 가장 아름답게 승리한 지역 중 하나이다. 광활한 목화밭에서 힘겹게 일하던 흑인 노예가 살던 땅, 짐 크로우법 아래 흑백분리주의가 떳떳이 활개치던 땅, 마틴 루터 킹 목사가 태어나고 흑인 인권운동을 펼치던 땅 위에 Diversity는 최고의 가치로 인정받았다. 이 도시의 시장이 흑인이고, 내가 공부한 에모리 대학의 경영대학장도 흑인이었다는 사실에서 피부색이 크게 문제되지 않을 것이라는 안도감이 들었다.


어눌한 한국 남자에게 늘 상냥할 것만 같았던 이 도시의 이면은 뜻밖의 장소에서 발견되었다. 하루는 한 햄버거 가게에서 주문을 하는데, 뭔가 묻는 눈치였다. 토핑과 소스에 대한 선택을 묻는 느낌이었으나 정확치 않아 다시 한번 말해주기를 청하였는데, 이에 흑인 종업원은 더 알아듣기 힘든 말투로 속사포처럼 쏘아대는 것이었다. 당황하여 더 묻기를 포기하고 그저 No를 남발한 나는 빵과 한장의 패티만으로 이루어진 햄버거를 받아 들었다. 따져보았으나 돌아온 것은 그게 내가 주문한 햄버거라는 대답뿐이었다.


삼십대의 나는 분하고, 안타까웠다. 과거 몇천년의 눈물겨운 역사를 뒤로한 채, 최근 몇십년 경제적 우위를 경험했던 일부 한국인들이 중국인을 가리켜 '미개한 짱개'같은 표현을 서슴없이 쓰는 것을 보며, 그 불행한 역사의 상흔이 적잖이 깊을 이 사람들의 사고는 과연 어떠할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보다 약자가 존재한다는 사실에 그간의 설움을 되갚아줄 상대로 지목된 것만 같았다. 한편으로는 내가 '저런' 사람에게 무시당해 분했다는 생각, 즉 유독 흑인에게 무시당할 때 더 기분 나빠하는 자신을 돌아보며 더 우월한 내가 열등한 그들에게 부당한 대우를 받는다는 느낌을 더욱 못 견뎌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반성이 뒤따랐다. 과연 화가 날 자격이나 있는가. 조금씩 나이가 들어가며 나름의 성찰이라는 것을 하다 보니 세상에 그렇게 못 견디게 화날 일은 줄어들었다. 다만 평생을 마이너리티로 살아가는 것은 나에게는 맞지 않겠다는 것을 깨달았다. 특히나 한국에서 가진 것이 조금은 생기다보니 더욱 그러하였다.




세번째 해외 생활은 한결 수월하다. 그간의 경험으로 말미암아 답답할 일도, 크게 문제될 일도 그다지 많지 않다. 햄버거 가게에서는 여전히 빠른 말로 나를 당혹스럽게 만들 때가 있지만, 웃으며 몇번이고 되묻는다. 차근차근, 그리고 정중하게 묻는 말에는 그에 상응하는 답이 오기 마련이다. 뜻하지 않은 기회에 여러 해를 해외에서 지내다 보니 나름의 방법을 터득해가나 싶기도 하다.


조금의 여유가 생기니 꼭 필요한 말 외에도 몇마디 의견을 덧붙일 수 있는 정도의 상황이 된 것 같다. ESL 수업에서의 일이다. School Daze라는 중의적 제목을 가진 리딩 지문에 등장한 베트남 출신의 전학생은 미국 교실의 풍경에 압도당한다. 교복을 입지 않은 자유로운 분위기 속에서 선생님과 학생들은 격의 없이 총기 규제에 대해 토론한다. 선생님의 말씀은 곧 진리이고 그것을 암기하는 데에만 급급했던 베트남 학교와는 달리, 이곳에서는 선생님의 말씀에 반하는 목소리를 내는 데에도 한치의 망설임도 없다. 수업을 마친 후 베트남 학생은 생각한다. 이런 교육 환경에서 본인도 본인의 생각을 말하는 연습을 하겠노라고.


이렇게 유치한 지문을 만든 목적은 물론 미국의 교육 시스템에 대한 외국 학생의 이해도를 높여주는 데 있을 것이다. 하지만 불편함을 참을 수 없다. 글이라는 것이 정제된 생각을 기록한 것이므로, 특정 국가를 콕 집어내어 비교하는 듯한 글을 쓴 사람과 이런 글을 실어준 집단의 사고방식에는 문화적 우월함이 잠재할 것으로 생각한다. 리딩 이후 진행된 토론 시간 나의 파트너는 너무나도 운좋게도 그 교실의 유일한 베트남 출신, 수앙이라는 분이었다. 앵무새처럼 좋은 말만 열거하던 이전과는 달리, 우리는 현재 한국과 베트남 교육의 지향점 또한 크게 다르지 않다는 데에 인식을 같이 하고, 오히려 이러한 지문이 만들어주는 편견과 고정관념에 대해 논하였다. 급기야 표면적으로 내세우는 다양성에 대한 존중에도 불구, 아직까지도 문명개화라는 정당화 아래 팽창하던 제국주의적 근성에서 벗어나지 못한게 아닌가 하는 생각까지 미치게 되었다. 이내 생각이 너무 멀리간게 아닌가 깨닫고 제자리로 돌아왔지만, 다시 읽어도 여전히 불편하기만 하다.


타국에서 마이너리티로 살아간다는 것은 몸에 맞지 않는 옷이 마치 피부처럼 벗을 수 없는 상태가 되어 움직일수록 그 불편함을 이루 말할 수 없으나, 해결할 길은 그저 자신을 가다듬고 깊은 호흡으로 평온을 되찾는 것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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