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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r Gray Sep 06. 2019

23. 휴직 2개월차, 회사 생각이 난다

(Week 11) 애증의 존재, 나의 지배자여

"안녕하세요, 저는 OO초등학교 O학년 O반 OOO 입니다."

대부분의 초등학생 어린이들은 자기 자신을 이런 식으로 소개한다. 어디 학교에 다니는지 묻지 않았음에도, 어디에 소속되어 있는지 말하는 것이 곧 자신의 정체성을 표현하는 방식임을 알고 있는 듯하다. 내 아이도 마찬가지이다. 마포에서 태어나 줄곧 마포에 살고 마포초등학교에 입학한 아이는 마포에 대한 애정을 표현하는데 거리낌이 없다. 그저 태어나 자란 곳일 뿐인데, 아이는 평생 마포에서 살고 싶다고 한다. 미국으로 떠나기 전날에는 뜬금없이 이런 질문을 해서 아내와 나를 당황하게 만들기도 했다.


"우리집 팔고 가는거 아니지? 나 꼭 돌아올거니깐, 절대로 팔지 마.."


열 살 인생, 동네 이사 말고는 크게 움직인 적 없으니 한편으로는 그 마음이 이해가 간다. 미국으로 건너와서는 애틀란타에 정을 주기 시작하는 중이다. 미국 지도를 볼 때면 그 유명한 뉴욕, 캘리포니아보다 조지아를 먼저 찾고, 여행 갔다 돌아오는 길 동네 랜드마크 건물이 보이면 "집이다!"를 외친다. 이런 모습을 보노라면 소속감, 혹은 어딘가에 속해 있음이 주는 안정감은 인간의 다양한 본능 중에서도 매우 강력한 욕구라는 생각이 든다.




잠시 쉬고 있는 나의 회사, 어느덧 14년차에 접어들었다. 신입 시절에는 입사 동기들과 회사 흉보는 게 유일안 안주였고, 쥬니어 시절에는 이직 시도도 참 여러번 했었지만 결국 여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아니, 마지막 순간에는 벗어나지 않았다는게 좀 더 정확한 표현일 것 같다. 그런 순간엔 밀당이라도 하듯이, 나 힘드니 좀 이해해 달라고 투정부리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누군가 진심으로 위로해준다면 고심 끝에 마음을 돌리기 일쑤였던 걸 보면 처음부터 기다리고 있었던건 어쩌면 사람이었는지 모르겠다. 법인(法人)이라는 추상적 실체 안에 존재하는, 진짜 사람.


시간이 흐를수록 나의 잔류를 합리화하기라도 하듯, 단점보다는 장점을 찾으려 애썼다. 아홉 명의 또라이는 뒤로 한채 한 명의 진정한 멘토를 찾아 나섰고, 쓸데없이 자꾸만 내려오는 수명 업무에 대해서는 고용 절벽의 시대에 오히려 감사할 일이라 위안하기도 했다. 가끔씩 주어지는 보상에 만족해했다. 근속 기간이 10년을 넘길 즈음엔, 어디가서 회사 흉을 보는게 마치 제 얼굴에 침 뱉는 것 같아 꺼려지기도 했다. 10년이면 강산도 꼰대로 변한다 했던가, 젊은 후배들이 그들 세대에선 판타지가 되어버린 퇴사를 고민할 때면 다시 한번 생각해 보라 붙잡는 역할에 익숙해졌다.


그래서인지, 주제넘게 회사 걱정 말고 내 한 몸, 내 가족만 우선 생각하자고 신청한 휴직인데 두달 정도 지나니 문득 생각이 난다. 정착 기간이 마무리되고 일상의 루틴이 형성되다 보니 정신이 좀 드는가 싶다. 연일 쏟아지는 무역분쟁 기사를 볼 때면 '지금 또 한바탕 난리가 났겠네, 대응책 마련에 고심이겠구나' 생각해 보고, 부실 금융상품과 관련된 기사가 뜨면 천천히 구조를 읽어보고는 '우리 회사는 익스포져가 없겠지' 짐작해 본다. 조금씩 선선한 바람이 불어와 '지금쯤 내년 계획 수립하느라 고생이 많겠구나'하는 미안함에, 오랜만에 금리를 찾아보면 한숨만 나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주 울려대는 단톡방에서 나를 찾지 않음에 고맙기도 하고, 서운하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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