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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r Gray Sep 10. 2019

24. 괭이부리말 아이들

(Week 12) 그 아이들은 지금쯤 잘 살고 있을까

몇 주 전 글쓰기 연습의 일환으로 아이를 위한 동화를 써보리라 마음먹었다. 대략적인 스토리라인을 잡고는 손가락 가는 대로, 정신없이 40쪽 분량의 초고를 완성하였다. 차분히 읽어본 소감을 헤밍웨이의 어록으로 대신하자면,


'모든 초고는 걸레다.'


초고를 가다듬기 전 동화의 전개 방식이나 문체 등을 참고하려는 목적으로 아이의 책장을 뒤지던 중 김중미 작가님의 그 유명한 '괭이부리말 아이들'을 발견하였다. 과연 2000년대 초반 수많은 찬사를 이끌어낸 책답게 몰입감 있게 술술 읽혔다. 새벽까지 읽다가 잠이 들었고, 4시쯤 잠에서 깨 남은 분량을 마저 읽어버렸다.


이 책은 가난한 동네에 사는 가장 가난한 아이들의 이야기이다. 부모님이 가출하여 졸지에 고아가 되어버린 동수는 학교를 자퇴하고는 말더듬이 왕따 친구 명환이와 함께 본드 흡입을 일삼는다. 그의 동생 동준이도 앞날이 막막하기만 하다. 이웃집 쌍둥이 자매 숙자, 숙희의 아버지는 알코올 중독을 이겨내고 마침내 정신을 차려 집안을 다시 일으키려 노력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사고로 목숨을 잃는다. 누가 더 절망적인지 가늠조차 하기 힘든 아이들을 거두어 주는 건 가족도 친척도 아닌 동네 아저씨 영호와 학교 선생님 명희다. 홀어머니를 여읜 영호는 아이들을 돌봄으로써 외로움을 극복함과 동시에 삶의 의지를 되찾고, 괭이부리말 출신이나 늘 그곳을 벗어나길 꿈꾸었던 명희는 결국 아이들을 보살피기 위해 그곳으로 되돌아온다.


한 편의 인간극장 같은 이 소소한 이야기는 소설적인 과장 없이 그저 사실적으로 전개되는데, 그렇기에 매우 감동적인 한편 안타까움도 감출 수 없다. 이 아름다운 이야기는 자칫 해피엔딩으로 보이기 쉽다. 본드를 하던 동수는 낮에는 공장, 밤에는 학교에 다니며 새로운 시작을 꿈꾸게 되었고, 명환이도 본인의 재능을 살려 요리를 배우기로 결심한다. 동준이와 숙자, 숙희 자매는 영호와 명희의 도움으로 정상적인 학교 생활을 이어나갈 뿐 아니라 버려진 아이 호용이라는 새로운 가족까지 맞이하게 된다. 사회적 약자들은 연대를 통해 공동체를 재건하고 작은 희망의 씨앗을 낳는다. 하지만 이 모든 희망의 기반은 다름 아닌 약자들의 연대이기에 매우 취약할뿐더러 그 크기도 미약하기만 하다.


미국에 건너와 잠시 지내는 동안에도 조국 소식을 끊임없이 접하고 있다. 보수, 진보, 강남좌파, 강북우파 등 정치적 성향은 차치하더라도, 본업인 채권쟁이의 시각에서 이 나라의 잠재적인 성장 가능성은 그다지 크지 않다. 지속 가능한 성장이 담보되지 않는 나라에서 부와 권력, 가능성의 되물림은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개천에서 태어나 용은 못되더라도 최소한 한강까지는 갈 가능성이라도 어느 정도 있어야 하지 않을까.


책을 덮으며 이런 상상을 해본다. 라면 먹을 때 김치 한 조각 나눠먹을 친구가 있다는 행복도 물론 소중하다. 하지만, 동수가 공장에 취직하는 대신 정부지원 프로그램을 통해 코딩을 배우고 스타트업을 창업하여 유니콘 기업을 탄생시킬 수도 있지 않을까? 동준이, 숙자, 숙희가 학교에서 장학금을 받고 생계 걱정 없이 학업에 정진해 사법고시에 합격한 후 차세대 법무부 장관 후보로 성장할 수도 있지 않을까? 명환이가 유명 셰프의 제자로 새 삶을 시작해 지금쯤 자신의 이름을 내건 레스토랑을 운영할 수도 있지 않을까?


하필 요즘 같은 때 이 책을 읽은 관계로, 이런 상상을 해본다. 만약 속편이 나온다면, 성인이 된 괭이부리말 아이들은 잘 살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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