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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r Gray Sep 12. 2019

25. 밥을 하면, 비로소 보이는 것들

(Week 12) 요리는 하지만 섹시하지는 않은 남자의 일기

휴직 중 미국에서 가족을 챙기는 일이 지상과제가 된 요즘, 최대 난관은 다름 아닌 밥이다. 식재료는 싼 반면 높은 인건비 탓에 외식비는 만만치 않은 이 나라에서, 가급적 삼시세끼 모두 직접 해먹으려 하기 때문이다. 몇년 전 미국에 홀로 지낼 때에는 적당히 정크푸드로 때우는 일도 잦았지만, 지금은 아이가 있으니 잘 내키지가 않는다. 고작 몇 달 주방일을 경험했을 뿐이지만 전에 모르던 것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1. 김밥천국, 그곳은 실제 천국이었다.


김밥은 흔하다. 누구라도 쉽게 만들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리고 김밥은 싸다. 프리미엄 김밥이 유행처럼 번진 적 있지만, 그래도 여전히 김밥은 싸고 만만한 음식이라는 인식이 강하다. 하지만 막상 그 만만해 보이는 음식을 만들어보니 이게 생각만큼 만만치만은 않았다.


일단 재료 준비에 공을 많이 들여야 한다. 우선 밥에 적당히 양념을 해줘야 하는데, 초보자에게 '적당히' 만큼 어려운 일은 없는 것 같다. 갖가지 속재료들도 하나하나 정성껏 준비하는데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 다 준비하고 나서는 자두 노래처럼 흥겹게 말 수 있을 줄 알았지만, 이 또한 나름의 내공과 균형 감각이 필요한 일이었다. 마지막으로, 일반 가정에서 흔히 쓰는 약간 무뎌진 칼로는 반듯한 모양이 유지되도록 각 잡고 썰기가 힘들다. 이래서 '칼을 간다'는 말에서는 비장한 기운이 감도나보다.


그 한줄 만들어 내는데 꽤 오랜 시간과 노력이 들고, 그 한줄 만들고 나면 꽤 많은 설거지 거리가 쌓인다. 이 모든 과정을 통틀어 쉬운건 딱 하나, 김밥은 먹기 쉽다. 이런 사정도 모른 채 아이는 우엉은 쏙 골라내고 먹는다.


2. 식당에서 마진 운운하던 건 오만한 행동이었다.


직장 동료들과 회사 근처 식당에서 식사를 할 때, 특히 그중에 은퇴를 앞둔 선배가 계실 때 종종 있는 일이다. 음식이 준비되는 동안 테이블과 손님 수를 휙 둘러보고는, 억지 논리로 수익과 비용을 추정한 다음 사장님의 손익계산서를 뽑아낸다. 가격, 원가, 임대료, 인건비 등 주요 팩터를 투입한 이후 나오는 결론은 대개 두가지 정도이다.


"이거 순 임대료 장사잖아? 역시 조물주 위에 건물주라니깐."

혹은,

"마진이 어마어마하겠는데? 나중에 나도 식당 아니면 커피숍이나 차려야겠어."


막상, 불과 몇 달 음식을 해보니 그 음식을 만들어 내기까지 필요했던 수많은 시행착오와 완성도 높은 수준을 유지하기 위한 노력을 무시한 건 분명 오만한 계산법이었다. 그 음식을 만들고 뒷정리를 하는데 필요한 시간을 절약해 오롯이 나를 위해 쓸 시간, 세상 무엇보다 소중한 그 '시간'을 확보할 수 있다는 사실을 배제한 것 또한 나의 무지에서 비롯된 행동이었다.


3. 도시락, 금융시장 시황 쓰기만큼 힘들다.


처음 채권쟁이로 일할 당시 증권사 및 운용사에서 보내주는 일일 시황을 받아보며 코웃음 치기 일쑤였다.

'늘 내용도 비슷하고, 결과에 억지로 끼워 맞춘 듯 전혀 논리적이지도 않아..'


하지만 직접 시황을 써보니 더이상 웃을 수가 없었다. 중요한 이슈나 큰 움직임이 없음에도 매일 정해진 시간을 정확히 맞춰 제출해야 한다는 압박감은 상당히 컸다. 특히나 주식시장과는 달리 채권시장은 변동성도 크지 않고 제한된 팩터와 시장 참여자들에 의해 움직이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인사이트 가득한 시황을 매일 써내기란 사실상 불가능했다. 대부분의 날에는 적당한 경제지표를 두리뭉실하게 언급하고, 거래량과 변동폭 같은 수치를 나열하며 그간의 경험으로 돌려막기를 하는 수밖에 없었다.


아이의 도시락을 싸다 보니 그때 그 마음이 생각난다. 매일 아침 등교 시간은 빡빡한데 몇가지 아이템으로 돌려막기가 만만치 않다. 한국에서처럼 급식을 신청하려니 왠지 아이가 빵 한조각 부실하게 먹을 것만 같아 미안하다가도, 막상 도시락을 준비하다 보면 시황에서 흔히 쓰는 표현처럼 '재료의 부재'가 눈앞에 닥친다. 종종 치트키처럼 유부초밥 카드를 꺼내 들지만, 아이의 반응에 조심스레 눈치를 본다. "또 유부초밥이야?"라 말할까 겁이 난다.


4. 반찬 가게, 진정한 소확행을 주는 공간이었다.


화려한 비주얼을 자랑하는 메인 요리가 아닌, 그저 조연급인 반찬을 사먹는 것은 왠지 돈을 허투루 쓰는 것만 같았다. 재료도 별 볼일 없어 보일뿐더러, 평범하기만 한 그 맛을 내기도 왠지 어렵지 않아 보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막상 한두가지라도 반찬 만들기에 도전해 보면, 소위 말하는 '아웃소싱'의 목적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우선, 내가 잘하지 못하는 건 남에게 맡기는 편이 낫다. 음식은 손맛이라는데 내 손에서는 아무 맛도 나지 않았고, 한번 실패하면 다시 도전할 마음은 좀처럼 생기지 않는다. 또한 좀 비싸 보여도 사먹는 편이 가성비가 좋다. 집에서 직접 반찬을 만들다 보면 재료가 너무 많아 남은 재료를 보관 후 버리거나, 혹은 많이 만든 후 다 먹지 않아 버리게 되는 경우가 많았다. 사먹을 경우 시간이 절약됨은 말할 것도 없다.


정말 좋아하는 반찬은 한두가지 익히는 건 나쁘지 않지만, 그 외에는 가끔씩 그 계절에 어울리는 반찬을 사먹는 것이 훨씬 현명한 선택이라는 생각이 든다.


5. 육개장, 처음부터 그렇게 많이 할 생각은 아니었다.


원체 많이 먹지도 않지만, 특히나 아침에 먹은 음식을 저녁에, 어제 먹은 음식을 오늘 또 먹는 것을 정말 싫어했었다. 누군가 한솥 가득 음식을 만들면 음식 만드는 수고를 줄이려는 게으름으로 생각하고, 같은 음식을 질리도록 먹게 될 것을 우려했다.


막상 국과 찌개를 몇번 끓여보니 적당한 양을 만들어 내기가 무척 어렵다. 육수를 우려내고, 재료를 가다듬고, 적당히 끓고 나면 간을 보고, 물을 추가하고, 다시 간을 보기를 반복.


오랜 노하우로 표준 레시피를 몸이 기억하지 않는 한, 한번에 정량을 맞추기가 어렵다보니 늘 다 하고 나면 처음 생각한 것보다는 많은 음식이 만들어져 있다. 2인분을 생각했으면 3~4인분, 4인분을 생각했으면 5~6인분이 냄비 안에 대기 중. 한 솥 가득 끓여진 육개장을 보고 그간의 과오를 뉘우치며 "냉동실에 좀 넣어둘까?" 물어보는 나에게 "맛있는데? 내일도 먹으면 좋겠네."라고 말해주는 아내가 고맙기만 하다.


6. 먹는거 보기만 해도 배부르다는 말은 과장이 아니었다.


"많이 먹어, 엄마는 너 먹는거 보기만 해도 배불러."

정말로 진부한 이 표현은 화목한 가정의 대표적 클리셰 중 하나이다. 어떻게 보기만 했는데 배가 부르지? Sci-fi에서나 가능한 일 아닌가?


그런데 주방에 있는 시간이 많아지자, 그 말이 결코 과장된 표현만은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 있다. 특히나 실력은 변변치 않지만 무언가를 계속 만들어내야 하는 요즘, 한참을 주방에서 꼼지락댄 뒤 식탁에 앉으면 도무지 입맛이 돋질 않는다. 맛있게 완성되었든 그렇지 않든 간에, 입에 잘 들어가지 않는다. 일단 한번에 간을 맞추지 못하다 보니 여러번 간을 보게 되고, 그러다 보면 어느새 조금씩 배가 불러온다. 그리고 음식 맛을 느끼는 건 결국 후각이라더니, 한참 냄새를 맡은 뒤에는 마치 양껏 먹은 것 같은 느낌도 든다.


반면, 오래 기다린 아이는 대체로 잘 먹는다. 이미 입맛이 떨어진 나에 비해 한계 효용이 높은 편이다. 아침, 점심을 부실하게 먹었는지 저녁은 곧잘 맛있게 먹어주니 그 모습, 보기만 해도 배부르다.


7. 과유불급, 적당함이 미덕이다.


까나리, 멸치, 참치 등 액젓은 우리 주방에 필수품처럼 늘 자리하지만 막상 그 쓰임새는 잘 모르고 살았다. 김장을 담그는 날 외에는 늘 부엌 구석에 시커멓게 쭈그려 있기에 그저 TV에 나오는 벌칙 아이템이라는 이미지가 강했었다.


색깔, 냄새, 그리고 이름마저 불쾌하기만 한 이 식재료는, 사실 알고 보니 요물이었다. 웬만한 국과 찌개 등 국물 요리에, 심지어 라면에 넣어도 맛있어진다. 하지만 한번 그 쓸모를 알고 나니 어느새 과용하게 되었다. 습관적으로 국물이 있는 곳엔 액젓을 한 숟갈, 두 숟갈 넣곤 하는데 조금만 그 양이 지나칠 경우 전체 맛을 버리는 쓰라린 경험을 하게 된다.


반대로 참기름은 태생부터 만능 아이템이었다. 색깔은 액젓과 비슷하지만 좋은 냄새를 풍기기에 처음부터 호감형이었다. 이름마저 진실된 이 참기름은 거의 모든 무침과 볶음 요리와 잘 어울린다. 하지만 액젓과 마찬가지로, 지나칠 경우 음식을 버리기 십상이다. 고소함에 고소함을 더하면 더 고소함이겠지 생각하고 조금 많이 넣은 날엔 어김없이 음식을 남기게 된다. 그런 날엔 환청처럼 철 지난 유행어가 들려온다.


"적당히 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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