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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r Gray Oct 22. 2019

36. 세번째 가족 여행 : 서울, 춘천

(Week 18) 집에서 집으로


# 귀국


비행기를 타면 얄궂게도 탑승 순서부터 철저하게 자본의 논리가 적용되고, 기내에 들어선 이후에도 비좁은 이코노미석을 찾아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안락한 퍼스트, 비즈니스석을 보고 지나쳐야 한다. 이 잔인함을 마주하는 나의 마음가짐은 일종의 정신승리에 해당한다. 첫째, 삶이란 무릇 굴곡이 있을 수밖에 없을 텐데, 한번 비즈니스석을 맛본 후의 이코노미석은 이전의 이코노미석보다 더욱 불편할 것이 명백하므로 그 불편함을 감수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한결같이 이코노미석을 선택함이 마땅하다. 둘째, 효용의 측면에서도 두 배 이상의 속도와 만족도 무엇도 담보하지 못하는 비즈니스석에 두 배 이상의 값어치를 지불하지 않는 것이 합리적이다. 이는 자판기 커피도 뽑아 먹고 스페셜티 커피도 주문하는 현실에 미뤄 보아 억지논리임을 부정할 수 없겠지만, 나는 여전히 이코노미석을 타고 간다.


국내 항공사의 직항 노선으로는 최장이라는 애틀란타-인천 구간의 15시간 비행 중 앞좌석에 무릎이 닿는 불편함으로 인해 수시로 자세를 비틀어댄다. 평균보다 키가 큰 덕분이라는 정신승리로 다시 한번 극복해 보려 하지만, 저려오는 다리 앞에 속수무책 무너지고 만다. 쉽게 잠들지 못해 단숨에 읽어버린 '가재가 노래하는 곳'에서 큰 감동을 받았으니, 다시 한번 깨어있음을 찬양하는 정신승리가 꿈틀거린다. 대체 언제쯤이면 진짜 승리에 도취될 수 있을까.


현재 잠시나마 미국에 살고 있기에 출국이라는 말이 더 어울릴 법도 하지만, 고국으로 돌아간다는 뉘앙스를 담아내기에는 아무래도 귀국이 더 적절해 보인다. 미국에서 생활한 지 이제 겨우 4개월 남짓 되었지만 몇 주 전부터 아이는 귀국 날짜를 손꼽아 기다리고, 무덤덤할 줄 알았던 나 역시 날짜가 다가올수록 휴가를 앞둔 군인처럼 조금씩 들뜬 기분이 든다. 가족을 만난다는 설렘, 그리고 삼시세끼로부터 잠시 벗어날 수 있다는 해방감으로 인해.




# 서울


몇 달 미국에 지내는 동안에는 대단한 애국자가 되어버린 것만 같았던 아이는 한국에 돌아오자마자 미국 얘기를 쉴 새 없이 꺼낸다. 미국의 고속도로는 한국보다 접근이 용이하다거나, 스쿨버스의 Stop 사인이 켜지면 모든 차량이 멈춰 서야 한다는 등 본인의 경험을 나눌 때 보면 아이 어른 할 것 없이 모두가 이야기꾼이다. 몇 해 전 유학 중 잠시 귀국했을 당시 팁 문화의 불편함을 설파하던 나의 모습이 생각나 당시 친구들에게 들었던 핀잔을 똑같이 주었지만, 말로는 도저히 아이를 이길 수가 없다.


"너 꼭 미국에 몇십 년 정도 살다 온 사람 같다?"

"아빠, 나 이제 열살인데 무슨 소리야... 미국 나이로는 아홉살"


가족모임을 제외하면 얼마 남지 않는 자유시간, 아이는 도서관에 가자 한다. 평일의 텅 빈 어린이 도서관은 무주공산이라 주말이면 늘 경쟁이 치열하던 만화책 코너도 한적하기만 하다.



더욱이 도서관 옆 분식집에서는 아이가 가장 좋아하는 옛날 도시락을 맛볼 수 있다. 한국에 돌아가면 가장 먹고 싶은 음식이 옛날 도시락이라니, 시도 때도 없이 떡볶이를 찾아대는 아빠의 피를 물려받아서인가 싶어 괜스레 미안해진다. 하지만 세계 3대 진미가 나온다 한들 분홍 소시지, 볶음 김치, 계란 후라이 조합 앞에 무릎을 꿇을 테니 남의 취향을 따라가기보다는 본인만의 확고한 선호도를 가진다는 측면에서는 좋게 봐주고 싶다. 넉 달이나 기다렸는데 먹는데 5분도 걸리지 않았다고 아쉬워하는 아이는 난생처음 한 그릇 더 먹어도 될까요 하는 야릇한 미소를 날린다.



잠시 들린 키즈카페, 아이는 키가 크다는 이유로 하마터면 출입을 거부당할 뻔했다. 150cm 이상 출입 금지. 혹시나 하는 마음에 키를 재본 결과 다행히도 아직 넘지는 않았지만, 불과 몇 달 만에 3cm 이상 훌쩍 커버린 아이가 눈에 들어온다. 내가 해준 밥을 먹고 쑥쑥 자란 모습을 보니 지난 4개월간 뭐했나 싶은 마음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그저 잘했다고 스스로를 토닥여주고 싶은 심정이다.


서울은 여전히 시끄럽고 역동적이다. 첫번째 미국 생활 후 귀국했을 당시에는 하루빨리 가족의 품으로 돌아오고 싶다는 생각뿐이었지만 남부의 늘어지는 햇살에 조금 더 적응해서인지 혹은 두번째는 가족과 함께여서인지, 쭉 미국에 사는 것도 나쁘지 않겠구나 처음 생각해본다. 물론 미국 생각도 먼저 들어봐야겠지만.




# 춘천


춘천을 방문하는 첫번째 이유는 처가 식구들, 두번째 이유는 막국수이다. 어디를 가나 고만고만한 짜장면처럼 맛이 평준화되어 있는 닭갈비와는 달리, 막국수는 집집마다 그 맛이 천차만별이다. 나의 단골집은 춘천 토박이인 동서 형님께서 소개해주신 남촌 막국수라는 곳이다. 메밀면과 각종 고명, 양념간장의 조합은 얼핏 평범해 보이지만 면수에 살짝 적신 후 비벼먹으면 다른 곳에서는 맛볼 수 없는 진한 감칠맛이 느껴진다. 현지인만 아는 숨은 맛집이었으나 몇 해 전 스카이워크 개장과 함께 관광객이 북적이니 괜스레 씁쓸한 마음이 든다.



춘천은 어딜 가나 대체로 한산하지만, 몇 달 건너올 적마다 고층 아파트들이 하나 둘 올라오니 신기할 따름이다. 한편으로는 도로와 철도가 정비되는 등 꾸준한 인프라 투자로 접근성이 용이해지고 곳곳에 아름다운 경관과 카페, 맛집이 즐비해짐에도 여전히 어딜 가나 대체로 한산하다는 점에서 춘천 분들이 느끼는 아쉬움은 제법 클 것 같기도 하다.



춘천의 많은 명소중에서도 내가 가장 사랑하는 곳은 의암호 둘레길이다. 인공적인 데크 위를 걷는 느낌이 식상할 만도 하지만, 해 질 녘의 선선한 공기를 마시며 감상하는 풍경은 여느 유명 관광지도 비할바 못된다. 서울의 안산 자락만 가도 그 볼거리에 비해 넘쳐나는, 마치 무빙워크를 연상시키는 인파의 행렬을 생각해보면 이곳은 현지인만 아는 숨은 둘레길로 남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 출국


미국에 있는 집으로 순간이동해 짐을 내던지고는 발 뻗고 침대에 눕는 달콤한 상상을 하니 문득 집이란 무엇인가를 생각하게 된다. 내 집이 있는 마포, 엄마 집이 있는 송파와 처갓집이 있는 춘천을 모두 거쳐왔음에도 고작 1년여 머무를 미국 집이 더 편안하게 느껴지는 이유는 무엇일까. 거처를 옮길 때마다 캐리어에 짐을 욱여넣다 보니, 집이 주는 편안함은 짐을 싸고 떠날 준비를 하지 않아도 된다는 안정감에서 비롯되나 하는 생각이 든다.


몇 달 뒤면 다시 만날 것을 알면서도 아이는 익숙지 않은 헤어짐에 또다시 울고 말았다. 열살 인생 아이를 돌봐주신 친할머니, 외할머니 모두 무척 애틋하기만 하다. 머쓱한 나는 "울지 마, 왜 울어"라고 말하면서도, 그 말이 잘못되었음을 곧 깨달았다. "왜"라는 물음에서는 그 이유에 대한 논리적인 설명을 기대하겠지만, 아이의 눈물은 그저 아쉽고 그리울 것이라는 순수한 감정만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우리는 또다시 가족을 두고 먼 길을 떠났다. 그 큰 그리움을 등지고 떠났다는 것을 생각하면 우리 가족이 반드시 행복하게 잘 살아야 한다는 의무감마저 든다. 하지만 착잡한 마음은 또다시 시작된 비행의 피로감에 희석되고 마니 장거리 여행, 특히나 경유까지 포함된 이틀간의 여정도 어느 정도는 쓸모가 있다.


돌아오면 늘 그렇듯 일상은 다시,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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