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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r Gray Nov 05. 2019

40. 슬기로운 취미생활

(Week 20) 아내와 함께


동아리 선후배 관계였던 지금의 아내와 내가 연인 사이로 거듭난 날은 군 전역 후 복학을 앞둔 시점, 라이벌 대학과의 스포츠 정기전이 치러진 어느 날이었다. 먹고 마시고 목청껏 소리 지르는 게 낭만이던 시절이니 승패를 떠나 함께 한다는 사실 자체에서 묘한 동지애를 느꼈고, 잘 들어갔는지 다음날 연락하겠다는 말은 일종의 데이트 신청이 되어버렸다.


그 해 정기전의 결과는 2승 1무 2패, 무승부로 끝이 났다. 하지만 단상 위 도포를 둘러 입은 응원단장은 늘 그렇듯 힘주어 강조하였다. 끝까지 남아 한마음으로 응원한 우리의 승리라고, 결국 승리한 우리는 더 크게 포효할 자격이 있노라고. 제삼자의 눈으로는 뻔한 정신승리로 밖에 보이지 않을 유치한 광경이지만, 그 무리 속 지성인을 자처하는 수많은 학생들은 지칠 줄 모르는 에너지를 발산하며 끝내 어깨동무를 풀지 않고는 쉰 목으로 응원가를 흥얼거렸다. 그때도 어렴풋이나마 알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승패보다 중요한 것은 손잡고 함께 나아가는 것이라고.




아내의 유학이 결정되고 나의 휴직 품의 역시 마무리되자 가장 먼저 떠오른 생각은 함께할 수 있는 취미를 만드는 일이었다. 빡빡한 직장생활에서 잠시 벗어나 시간적 여유를 갖게 된 아내에게 나는 골프를 배워볼 것을 권유하였다. 저 비싸고, 지루하고, 도무지 운동효과라고는 있을 것 같지 않은 운동을 함께 하고픈 데에는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아마추어들에게 골프는 운동이라는 성격 외에도, 까마득한 그린 위 놓여있는 깃발을 향해 함께 걸어가는 동행의 의미가 있다. 같은 목표를 향해 나아가지만 그 속에서 숨 막히는 자신만의 승부를 펼치고 있고, 그러는 동안에는 동반자에 대한 배려가 필요하다. 가장 중요한 것은 본인의 루틴대로 스윙할 수 있도록 잠자코 지켜봐 주는 일인데, 보기에 다소 어색한 면이 있더라도 지나친 간섭은 자칫 화를 일으킬 수 있기에 즉시 말하기보다는 훗날 기회를 봐서 넌지시 말하는 편이 좋다. 또한 한 사람의 결과만 좋아서는 게임이 결코 마무리되지 않는다. 동반자의 차례를 기다리며 지켜봐야 하고, 방향을 함께 읽어야 하며, 경우에 따라서는 공을 함께 찾아야만 진행이 가능하다.


프로가 아닌 이상 원하는 방향, 원하는 거리로 공을 날리기란 여간 어려운 게 아니다. 열 번 휘둘러야 마음에 드는 건 고작 한두 번에 그치기에 '자꾸 왜 이렇게 안 맞지?'보다는 오히려 '이번에는 왜 잘 맞았지?'가 좀 더 솔직한 질문인지 모르겠다. 하지만 그 수많은 실수 속에서도, 한번 잘 맞아 쭉쭉 뻗어가는 공을 보면 뜻 모를 성취감에 도취되어 나름의 재미가 느껴진다. 고통을 잊게 하는 한 번의 행운, 이 이상한 운동은 묘하게도 삶과 닮은 구석이 있다.


비단 아마추어뿐 아니라 프로들의 세계에서도 동반 라운딩을 하는 선수의 멋진 샷이 나온 경우 함께 환호하고, 심지어 하이파이브를 하는 모습도 볼 수 있다. 이는 어느 운동경기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멋진 장면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지나치게 시간을 끌거나, 좋지 않은 매너로 눈살을 찌푸리게 만드는 선수는 실력을 떠나 좋은 평가를 받기 어려운 운동이 바로 골프이다.


반면 비록 실력은 빼어나지 않아도 배려심 깊은 사람은 함께하고픈 마음이 든다. 잘 풀리지 않는 게임에 답답하다가도 문득 주위 경치를 돌아보면 마음이 평온해지는 이런 운동을, 이런 가능성을 아내와 함께 하고 싶었다.




몇 달간의 짧은 연습 뒤, 마침내 우리는 첫 부부 라운딩을 나갔다. 골프가 어려운 수백 가지 이유 중 늘 수십 가지 이상 거뜬히 해당되기에 나와 아내 모두 골프라기보다는 하키에 가까운 운동을 하고는 왔지만, 궂은 날씨에 차츰 햇살이 들며 무사히 라운딩을 마칠 수 있었고, 돌아올 즈음 우리 마음의 온도 역시 다만 몇 도라도 올라가 있었을 것이다. 무심결에 흘러나오는 콧노래 소리가 이를 증명해준다. 언젠가 사이가 좋지 않아 집안 공기가 냉랭한 날이 온다면, 달력 날짜를 확인하며 넌지시 물어보고 싶다.


언제, 별 일 없으면 한번 나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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