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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r Gray Nov 01. 2019

39. 살림하는 남자의 첫번째 캐비지 샐러드

(Week 19) 어서와, 김치는 처음이지


"원래 할 줄 모른다"는 말을 좋아하지 않는다. 세상에 '원래' 할 줄 아는 일이 몇이나 되겠는가. 이 말은 어찌 보면 그저 평범한 부정의 말로 들릴지 모르지만, 곱씹어보면 어떤 새로운 일에 대한 관심도, 배우고자 하는 의지도 결여된 매우 무기력한 말이다. 과감한 도전을 기피해온 나 같은 사람을 표현하기에 부족함이 없기에 나는 이 말을 이겨내고 싶었다. 더군다나 휴직이라는 황금 같은 시간을 얻어낸 내게 이 말은 절대 되뇌고 싶지 않은 말 중 하나이다. 할 수 있다, 할 수 있다.





기(起).


몇 달간 불패신화를 이어가던 나의 요리 경력에 정점을 찍겠다는 과욕이었일까, 아니면 미국 마트 김치가 맛이 없다는 아이의 말에 흔들린 과도한 부성애 때문일까. 그도 아니면 무척 쉽다고, 어려울 것 하나 없다는 미끼를 덥석 물어버린 나의 경솔함 탓이었을까.


첫 경험에 대한 뜻 모를 자신감에 심취된 채 한인 마트에 들러 숨죽여 배추를 고르던 나의 모습, 돌아보니 풋내가 난다. 럭비공만한 작은 사이즈의 배추를 움켜쥔 그때 나는 무슨 상상을 하고 있었던가. 푹 삶아진 수육을 감싸 안아주며 라면, 카레와는 영혼의 단짝이 되어줄 김치. 한층 연륜이 쌓인 말년에는 볶음밥, 찌개, 부침개 할 것 없이 만능 키가 되어줄 나의 첫 김치, 김치!




승(承).


배운 사람답게 배운 대로,


1. 배추를 절인다. 굵은소금을 짜지 않을 만큼만 줄기 위주로 살포시 버무려준 뒤 한두시간마다 뒤집어가며 힘없이 늘어질 때까지 대략 반나절 절여준다.


2. 찹쌀로 풀을 쑨다. 물에 섞어 약불로 걸쭉해질 때까지 잘 저어준다.


3. 양념을 만든다. 고춧가루, 액젓, 마늘, 생강을 기본으로 집에 있을 경우 새우젓이나 사과, 자두 등을 갈아 넣어주면 더 좋다. 미리 쑤어둔 찹쌀 풀과 파, 양파, 당근, 무 등 각종 야채를 썰어 넣어 버무린 뒤 그간 먹어온 안 익은 김치 맛과 비슷할 때까지 간을 봐준다.


4. 절인 배추를 양념에 버무린다. 배춧잎 사이로 골고루 스며들도록 딸아이 머리 빗기듯 정성스레 양념에 묻힌다.


5. 김치통에 꾹 눌러 보관하고, 적당히 익을 때까지 기다린다.




전(轉).


첫사랑은 절대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누가 말했던가. 4개월차 초보 부엌데기인 나는 한국의 주부라면 으레 해내리라 기대되는 '원래 할 줄 몰랐던' 김장에 과감히 출사표를 던졌고, 처절한 실패를 맛보았다. 문자 그대로 '실패의 맛'을 보았다. 수육은 삶아뒀지만 아이는 그냥 마트 김치를 내어달라 한다. 종가집은 인정할 수밖에 없는 맛집이었다.


분명 모든 과정을 명확히 이해했고 잘 해내리라는 자신감이 충만했지만, 결과는 화장을 글로 배웠다는 시트콤의 한 장면처럼 처참하기만 했다. 돌아보니 배추를 절인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 양념 비율은 어떻게 해야 하는지 전혀 감이 없는 상태에서 그저 어설프게 흉내만 낼뿐이었다. 한 껏 절여져 축 늘어져야 할 배추는 여전히 꼿꼿이 고개를 쳐들고 있었고, 때깔만 그럴싸한 양념은 간 조절, 양 조절 모두 실패한 듯 보인다. 둘 간의 프렌치 키스를 기대했건만 뽀뽀는커녕 수줍은 볼터치에 그치고 말았으니 그 어떤 화학적 결합도 일어나지 못한 것이었다.


눈 앞에 놓인 저 양념 묻은 한 포기의 배추 덩어리를 쳐다보며 망연자실했다. 하지만 언제까지나 고개를 숙이고 있을수는 없는 노릇. 아내와 나는 차분히 그 상태를 진단한 뒤, 그간의 경험을 십분 발휘하여 현란한 손놀림으로 김치소생술을 시작했다. 더 익도록 내버려 두어 봤자 냉장고 한켠에서 김치통 하나만 차지하고 있을 뿐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존재가 될 것이 불 보듯 뻔했기에, 겉절이 상태에 살짝 양념을 가미하여 먹어 치우는 것이 더 좋으리라 우리는 판단하였다.



결(結).


인정하고 싶지는 않지만 나보다 한 뼘 정도 실력이 좋은 아내의 손길을 거친 뒤, 나의 김치라 불리고자 했던 양념 묻은 한 포기의 배추 덩어리는 마침내 새로운 음식으로 부활하였다. 여전히 김치라 부르기엔 많이 어색하지만 그럭저럭 먹을만한 정체불명의 음식. 흔히 장황하게 늘어놓는 양식 메뉴판의 설명 방식을 차용하자면,


깊고 진한 풍미의
앤쵸비 소스 및 세서미 오일 베이스에
레드 페퍼, 갈릭, 진저로 버무린
코리안 스타일의 올개닉 캐비지 샐러드


그런데 먹어보니 그 맛이, 정체불명의 아리송한 그 맛이 생각보다는 나쁘지가 않다. 썩 훌륭하다고 할 수는 없어도 라면이나 칼국수 한 그릇 끓여 곁들여 먹기에는 그럭저럭 괜찮은 수준이었다. 그래, 우리는 김장을 담근 것이 아니었다. 미국 땅에서 K-Pop에 이어 K-Food 바람을 일으킬 새로운 샐러드를 창조하고자 한 것이었다.


성공은 실패의 어머니가 되었고, 실패는 다시 성공의 어머니가 되는 순환 참조 과정을 거쳐 나는 재기를 꿈꾸고 있다. 저 캐비지 샐러드를 다 먹어치운 뒤 '원래 할 줄 몰랐던' 김장에 다시 도전할 것이다. 포기를 모르는 나는 결국 한 포기의 승리를 맛볼 것이다. 그리하여 수육을, 라면을, 카레를 다시 만들고는 그 위에 잘 익은 나의 두번째 첫 김치를 올려 당당히 씹어먹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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