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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r Gray Oct 31. 2019

38. 사람이 지나간 자리

(Week 19) 돌고 돌고 돌고


사랑의 기운이 유행처럼 번지던 10대 시절, 내 친구 역시 그 불길에 데어 아파했고 나는 그 마음을 위로해 주고 싶었다. 나의 위로가 그저 상투적인 말로 들릴 것이 걱정된 나머지 동네 인근에서는 가장 번화했던 잠실역 지하상가로 향했고, 조그만 악세사리 가게에 들러서는 얇은 지갑을 털어 3천원짜리 싸구려 팔지 2개를 샀다. 우리는 같은 모양의 팔찌를 손목에 걸고는 영원히 변치 않을 우정을 다짐하며 서로를 위로해 주었다.


하지만 싸구려 우정 팔지는 싸구려라는 이름답게 고작 몇 달 지나지 않아 녹슬기 시작했고, 계절이 바뀔 즈음에는 내 손목에서 책상 서랍 속으로, 다시 쓰레기 봉지로 차츰 자리를 옮겨갔다. 지금 그 친구의 이름이 무언지 생각해 내려면 몇 초나 걸리는 것을 보면 영원히 변치 않을 우정에 대한 염원은 영원히 살고자 하는 그릇된 욕망만큼이나 덧없어 보이기만 하다. 하지만 그를 위로하고 싶은 마음만큼은 진심이었고, 시간이 흐름에 따라 소원해지긴 했어도 최소한 서로에게 상처를 주는 일은 없었기에 그 시절 그 감정을 욕보이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다.


우정은 그렇게 시간의 흐름처럼 조용히 다가왔다가는 조용히 사라지는 성격의 감정이라고, 때로는 운 좋게 아주 오랜 기간 유지될 수 있을지 모르지만 그것이 꼭 그런 것은 아니라고 생각하니 친구를 사귀는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일주일에 일곱번씩 만나던 친구들 무리를 몇 년 동안 만나지 않다가도, 어느 날 문득 누군가의 경조사로 만나게 되면 마치 어제 만났던 것처럼 낯설지가 않으니 나는 그런 우정 역시 결코 가볍지 않다고 생각했다.


친구는 떠난다. 하지만 슬퍼하지 마라, 다시 만날 것이다. 그게 내 결론이었다.




그리하여 내가 돌고 도는 우정보다는 사랑, 그리고 그 사랑의 정수인 가족과 그중에서도 나의 피붙이인 아이에게 집중하게 된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결과일지도 모르겠다. 조금은 과하다 싶을 정도의 눈빛으로 아이를 바라보는 것은 어쩌면 그렇지 않으면 내게 남아있는 변치 않는 가치라는 것이 모조리 소멸될지도 모른다는 불안함의 표현일지도 모르겠다.




길었던 여름이 지나간 자리는 어김없이 가을의 차지이다. 그리고 곧 겨울의 몫이 될 것이다. 요즘 날씨가 그렇다. 애틀란타의 청명한 하늘 아래 노랗고 붉게 물든 나뭇잎을 온전히 즐기려는 찰나, 아차 하고 쳐다보니 어느새 빗줄기가 굵어지고 내일이면 기온이 한자릿수로 떨어진다고 한다. 기상 정보는 대개 좋지 않은 경우에 잘 맞아떨어지곤 한다. 급변하는 날씨만큼이나 낮 시간도 급격히 짧아져 아이가 학교에 가는 시간은 한밤처럼 칠흑 같다. 준비를 마치고 몇 분 가량의 여유가 있음에도 아이는 발걸음을 재촉한다. 학교 입구에 도착하여 하차한 이후에도 예전처럼 뒤돌아 보지 않고 한걸음에 달려가니 나는 그 뒷모습을 바라본다. 하필 또 날씨가 이러하니 더할 나위 없이 센치해져 나는 다음, 그다음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언젠가 엄마는 주말에 어디론가 가족여행을 가자 하셨고, 내가 그냥 동네에서 친구랑 놀고 싶다 하니 그게 참 안심도 되었지만 한편 서운했다고 하셨다. 아마 열 살 즈음이었던 것 같다. 그때 엄마의 마음을 지금 내가 아이에게서 느끼는 듯하다. 미국 학교에 잘 적응한 모습이, 빨리 친구를 만나고 싶은 그 마음이 차츰 어떻게 성장할지 경험했기에 좋기도 하고 아쉽기도 하다. 아이의 마음은 차츰 친구로, 그리고 언젠가는 부모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으로 채워질 것이다.


하지만 허전해질 수밖에 없는 내 마음 역시 언젠가 다시 누군가로 채워질 것이다. 오늘 나를 필요로 하는 아이에게 독점당한 내 마음의 지분은 잠시 잊고 있었으나 늘 2대 주주였던 아내, 그리고 숨죽이며 기회를 엿보던 수많은 소액주주들에 의해 메꿔질 것이다. 우리는 반갑다고 웃으며 만나 했던 얘기를 지겹도록 하고 또 해도 여전히 유쾌할 것이다.


가족도 친구도 언젠가는 떠난다. 하지만 슬퍼하지 마라, 다시 만날 것이다. 그게 여전히 내 결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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