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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r Gray Nov 08. 2019

41. 더 이상 썩은 사과는 먹지 않겠어

(Week 20) 나를 닮은 아이에게


갓 태어난 아이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새 생명의 기운, 그 경외감이 조금씩 사그라질 즈음이면 머리 꼭대기부터 발끝까지 구석구석 훑어본다. 마치 자식을 갖고 싶다는 본능 이후에는 그 아이가 나를 닮았으면 하는 욕구가 반드시 뒤따르기라도 하듯 눈코입은 물론이며 눈썹, 귓불, 발가락까지 유심히 들여다본다. 어딘가 나와 비슷한 모양새를 보고 있자니 신기한 한편 뿌듯하기까지 하다. 비록 그것이 그다지 볼품없을지라도.


아이가 조금 자라 본격적으로 사람의 모습을 갖춘 뒤 어린이집, 유치원 등지에서의 생활이 시작되자 또래들 속에서 제법 키가 큰 아이 모습이 눈에 띈다. 외형적으로는 대체로 나를 닮은 아이, 다행스럽게도 큰 키 또한 나를 닮아주어 처가 식구들은 종종 고맙다는 말씀을 하신다. 그 말씀을 들을 때면 아이가 태어난 이후 지금까지 정성껏 키워주신 장모님께 감사하고 죄송한 마음이 교차하면서, 한 일이라고는 그저 아빠라는 이름의 유전자를 물려준 것 밖에 없는 사위에게 고맙다 말씀하시니 조금은 머쓱해진다.


점점 자신의 생각을 표현할 나이가 되어가니 이제는 아이의 성격을 관찰하는 일이 재미있다. 자신의 욕심을 채우기에 급급하지 않고 친구를 배려하고 모습에는 나 역시 어렸을 땐 저랬는데, 그 마음이 신기루처럼 사라져 버린 나와는 달리 아이는 어른이 되어서도 변치 않았으면 하고 바란다. 쉽게 거절하지 못하고, 진짜 마음을 표현하는데 서투르며, 안 좋은 기억을 가슴에 켜켜이 쟁여두는 성격을 볼 때면 이런 면은 좀 달랐으면 하는 생각도 들지만, 어쨌든 신기하다. 이런 것 까지 닮다니, 생명의 신비란.




휴일 저녁, 아내는 김치찌개를 끓이려다 인심 쓴 듯 부대찌개로 전환하였다. 김치찌개에는 아이의 젓가락이 갈 곳라곤 김치와 약간의 돼지고기뿐이지만, 부대찌개는 말 그대로 종합 선물세트 아니겠는가. 태생은 김치찌개와 비슷하나 거기에 더해지는 각종 햄이며, 기분 내킬 땐 라면 사리도 하나 들어간다. 특히나 얼마 전 장을 볼 적에 핫도그용 소시지며 샌드위치용 슬라이스 햄까지 구비했으니 단조로운 스팸의 향연에서 벗어나 제법 화려한 부대찌개가 완성되었다.



잠시 머무른 미국이니만큼 장유유서의 틀을 벗어던지고 아이 먼저 풍족하게 한 그릇 떠주는데, 그것을 즐기는 모습이 예사롭지 않다. 본인만의 철학을 담아 우선 김치를 먹고, 햄을 먹은 뒤 마지막으로 라면을 먹는다. 쉽게 불어버리는 라면 먼저 건저 먹으라 해도 말을 듣지 않는데, 그 이유는 내가 가장 잘 알기에 당혹스럽다. 아이는 가장 맛있는 반찬을 끝까지 아껴뒀다가 마지막에 먹는 버릇이 있다.


하다 하다 이제는 이러한 사소한 식습관까지 닮아버리다니, 일식집에서 초밥을 먹을 때의 내 모습이 투영되어 나는 헛웃음이 나오고 말았다. 모둠초밥을 즐겨먹는 나는 보통 계란말이나 찐 새우, 연어를 먼저 집어 들곤 하는데 먹는 순서는 언제나 좋아하는 순서의 역순이다. 관자, 간장새우, 참치 뱃살, 혹은 광어 등은 아껴뒀다 가장 마지막에 먹는다. 그것들을 입에 넣을 때면 내 배는 이미 어느 정도 불러있으므로 나는 가장 좋아하는 음식의 풍미를 제대로 느끼지 못하게 만드는 불필요한 절제의 습관을 가진 셈이다.





부대찌개와 초밥, 이를 통해 여실히 드러난 우리 부녀의 성격을 나무랄 수는 없지만 문득 언젠가 들어본 '썩은 사과 이야기'가 생각났다.


사과를 한 상자 주문하면 그 안에 싱그럽게 잘 익은 사과도 있지만 구석 한 켠에는 꼭 한두개쯤 썩은 사과도 있기 마련이다. 사람들은 대개 썩은 사과를 먼저 집어 들고 그 부위를 도려낸 다음 멀쩡한 부분을 먹곤 한다. 다음날 상자를 들춰보면 어김없이 또 부분적으로 썩은 사과가 있고, 역시 그 사과를 선택한다. 썩은 사과는 전염성이 있기에 다음날도, 그다음날도 마찬가지이다. 그렇게 한 상자를 다 먹을 때까지 사람들은 온통 썩은 사과만을 골라 먹는다.


그렇지 않고 썩은 사과들을 과감하게 골라낸 뒤 첫날부터 가장 좋은 때깔을 지닌, 싱그럽게 잘 익은 사과를 먼저 먹는 건 어떻겠냐는 질문으로 이야기는 마무리되었다.


정확히 나를 콕 집어서 해주시는 것 같은 이 이야기를 듣고는 큰 울림을 느꼈지만, 여전히 나는 가장 맛있는 초밥을 마지막에 먹곤 한다. 종종 생각을 고쳐먹고 좋아하는 초밥을 먼저 집어 들려는 노력을 하긴 해도, 살아온 세월의 무게는 어쩐지 늘 하던 대로의 나를 더 좋아하는 모양이다. 그 관성을 거스르는 일이 얼마나 힘든지 알기에 나는 아이에게 다시 한번 잔소리를 하고 말았다. 그것은 어쩌면 아이의 모습에 투영된 나에 대한 독백일지도 모르겠지만.


나는 아이가 불기 전에 라면 먼저 건저 먹기를, 썩은 사과 대신 싱그러운 사과를 먹기를, 정말로 하고 싶은 일이 있다면 주저하지 않는 삶을 살기를 바란다. 나는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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