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ek 24) 여행사진, 시간의 기록
여행의 유산은 기억이고, 사라져 가는 기억을 환생시키는 것은 결국 글과 사진이다. 비슷한 풍경일지라도 웹에서 찾은 우유니, 마추픽추는 나의 카메라로 찍은 그것들과 결코 같을 수 없는데 이는 남의 것이 아닌 나의 사진 속에는 비록 멈춰있는 장면일지라도 그 날의 동선과 표정, 낯선 음식과 커피 향기가 애니메이션처럼 살아 움직이기 때문일 것이다. 입에 맞지 않아 채 반도 먹지 못한 음식도, 심지어 고산병에 초췌해진 몰골 조차도 끝끝내 추억이 되고 마니 사소한 하나라도 찍어 남기는 것은 훗날의 나를 위한 작은 선물이고, 왕년의 나를 증언해 줄 증거 자료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점점 나의 여행사진 속 내가 등장하는 횟수가 눈에 띄게 줄어가고 있다. 그것은 어쩌면 아름다운 것만을 보고 남기고 싶다는 본능 때문인지 모르겠다. 근거 없는 자신감에 셀피를 찍어대거나, 지나가는 사람에게 서슴없이 다가가 사진 한 장 찍어달라 부탁하던 나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아름다운 피사체를 찾아 두리번거리는 나만 남아버렸다.
절정을 지나 시들어가는 시기가 되어감을 자각하려는 마음의 눈은 점점 내가 아닌 것들을 향하게 되어, 돌아와 들춰본 사진들은 기억의 소환이라는 본연의 역할은 망각한 채 어디서 본 듯한 근사한 이미지를 복제하는 기능만을 추구하고 있으니 마음 한 켠이 아려온다. 나를 외면한다, 내가.
사실 잘나지 못한 외모야 하루 이틀이겠느냐마는, 지금의 내가 내 남은 인생에서 가장 싱그러운 시절의 나라는 사실만은 부정할 수 없다. 몇 년 전 사진을 들춰보면 그렇다. 그 맘 때의 나 역시 이십 대를 지나 서른이라는 먹먹함 속에 나이 들어 감을 받아들이기 싫어했고 추한 모습으로 기록되는 것을 원치 않았겠지만, 이제와 사진첩을 넘겨 보니 오늘의 나에게서는 좀처럼 풍기지 않는 생기를 내뿜고 있다. 꽃은 계절에 따라 피고 지며 한 겨울의 눈 역시 쌓였다 녹기를 반복하지만, 사람은 기어코 한 방향으로 가고야 마니 오늘의 나를 외면하는 것은 결국 남은 인생의 가장 아름다운 첫 번째 조각을 잃어버리는 것과 다름없지 않을까.
퀘벡 여행의 마지막 날, 그리하여 무거운 발걸음의 가족들을 이끌고 기어이 도깨비성이 보이는 언덕을 다시 찾았다. 첫째, 둘째 날의 화창함을 놓친 죄로 뚝뚝 떨어지는 빗방울을 맞으며 올라가서는 지나가는 여행객을 붙잡아 사진 한 장 찍어주기를 부탁하였다. 비 오는데 왜 또 가냐고 투덜대는 아이에게, 그리고 훗날의 나와 아내에게 십 년 뒤 이십 년 뒤 추억할 수 있는 그야말로 판에 박힌 가족사진을 한 장 선물해 주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흐린 하늘 아래 펼쳐진 올드 퀘벡의 풍경도, 추운 날씨와 반쯤 젖은 머리도, 한 손에 쥔 눈덩이와 삐쭉 튀어나온 입도 언젠가 도란도란 마주앉은 자리에서 추억으로 소환되기를 바라는 마음이었을런지. 아내가 수없이 따라 하던 그 대사 역시 그제야 또렷이 귓가에 맴돌기 시작하였다.
모든 날이 좋았다
날이 좋아서, 좋지 않아서, 적당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