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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r Gray Dec 05. 2019

48. 얼굴에 대한 책임

(Week 24) 화, 쿨링하지 못해 미안해


화를 내는 사람에게 호감을 느낀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화를 낸 뒤 개운함을 느낀 적도 단 한 번도 없다. 그럼에도 또다시 불같이 화를 내뿜고 말았으니,


어리석다.




시작은 아주 사소한 실수에서 비롯되었다. 몇 달 전 예매한 항공권에 이름이 잘못 입력된 것을 발견하였는데 항공사 규정상 출발 3일 전부터 수정이 가능하다는 것이었다. 한 시간이 넘는 응답 대기 끝에 들은 답변 치고는 영 못 미더웠지만, 애초 나의 실수였기에 감래 할 일이었다.


출발을 며칠 앞두고 재차 수정을 요청했음에도 해결의 기미가 보이지 않자 자칫 가족 여행이 무산될지 모른다는 위기감이 감돌기 시작하였다. 하지만 한번 통화하기까지 한 시간 이상 대기는 기본이고, 가까스로 연결된 뒤에도 시스템 오류로 추후 다시 전화하라, 담당부서에 요청을 했으나 아직 답변이 오지 않았으니 좀 더 기다리라는 말 뿐이니 당혹스럽기 그지없었다. 그사이 최초 비행 일정에 변동이 생겨 레이오버는 3시간에서 8시간으로 늘어났고, 수차례 추가적인 통화에도 진척이 없자 마음속 화는 조금씩 쌓여가고 있었다.


아내와 상의한 끝에 최악의 경우를 대비해 조건부로 환불이 가능한 여분의 표를 구매하기로 결정했다. 사실 냉정히 따져보면, 물론 몇십만 원이 작은 돈은 아니지만, 가족 여행의 무산을 방지해 줄 보험으로 생각하자니 또 그렇게 큰돈은 아니었다. 무엇보다 쌓여가는 화를 삭이기 위한 이성적 제어 장치가 하나 정도 필요했는지 모르겠다.


그렇게 마음을 다잡은 듯했으나 몇 차례 이어진 통화에도 해결되지 않은 체 같은 답변만 되풀이되니 급기야 폭발하고 말았다. 벌써 몇 차례나 통화를 했고, 몇 시간을 기다렸고, 여행 자체가 취소되면 다른 예약 사항에까지 영향을 미쳐 손해가 커지니 빨리 해결해 달라, 슈퍼바이저에게 연결해 달라는 말을 온몸에 핏대를 세우며 필요 이상의 시뻘건 목소리로 수화기 너머 고객 센터 직원에게 쏟아내고 만 것이었다. 그리고는 이를 적절치 못한 응대에 대한 정당방위라고 합리화하였다. 반면 전혀 당황하지 않은 상대방은 차분한 목소리로 우리도 최선을 다하고 있으니 기다려 달라는 말만 기계처럼 반복하고는 통화를 마무리지었다.


떨리는 손으로 방아쇠를 당겼으나 미동조차 없는 정적. 계속되는 침묵은 누구의 잘못인지 명확히 짚어준다. 최초 발단이 무엇이었는지, 그간 지나온 경과가 어떠했는지와 상관없이


나의 완벽한 패배다.




출발 16시간 전, 그제야 사안의 시급함을 이해하겠다는 듯 고객 센터에서는 이름 수정을 전담하는 부서로 연결시켜 주었고, 이후 요청 사항이 처리되기까지는 10분도 채 걸리지 않았다. 마땅히 해결되어야 할 일이 빙빙 돌아 허무하게 해결된 뒤에는, 삐걱댐을 금세 잊은 듯 가족 여행의 시간이 시작부터 끝까지 즐겁게만 흘러갔다.


한편 원치 않은 레이오버는 반나절의 토론토 여행이라는 뜻밖의 선물을 주었고, 공교롭게도 여행 기간 중 가장 좋은 날씨는 다름 아닌 토론토에서 만끽할 수 있었으니 인생의 아이러니는 도무지 종잡을 수가 없다.



돌아와 남은 것은 여행의 추억과 갈 곳을 잃어버린 미안한 마음, 백 번을 생각해도 후자는 명백히 불필요한 것이었다.




화를 내는 행위. 속 시원한 한편 'Bless you'라는 화답이 들려오는 재채기라기보다는 그저 혐오스러운 기침에 가깝다. 상대방은 불쾌해지고, 계속되면 내 가슴 또한 만만치 않게 아파온다. 참고 억누르다가 기어코 터트리고는 후회하기를 반복. 이만큼 장점을 찾기 힘든 감정의 표출 또한 없을 것이다.


한때 '분노 조절 장애'라는 말이 유행처럼 번진 적 있다. '장애'라는 말이 나의 의지와는 상관없음을 강조하는 듯한 뉘앙스를 내뿜기에 화내는 행위를 애써 정당화하려 해도 진실은 결코 아무에게나 화를 내지는 않는다는 데에서 밝혀진다. 아무리 화가 나는 상황이라도 내가 화를 내서는 안 되는 상대라 판단되면 애써 감정을 추스르지만, 굳이 화를 낼 필요는 없는 상황이라도 적당히 쏟아내도 되겠다는 판단이 서면 과장된 논리를 내세워 기어이 화를 내고 만다. 집에서건 직장에서건 항상 그랬다. 결국 진짜 문제는 나 자신에게 있다는 진실, 감추려 해도 감춰지지 않는다.


보다 비참한 것은 이를 알면서도 이겨내지 못했다는 자괴감이다. 문제의 해결에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끝내 나에 대한 혐오만이 남겨질 것임을 알면서도 또다시 엎질러진 물이 되었으니 화를 낸다는 것은 분명 상대방뿐 아니라 스스로에게 가하는 극심한 감정 노동이다. 사과를 한다고 한들 결코 이전과 같지 못하다.




나이 마흔에 관해 널리 알려진 대표적인 말로는 그 흔한 '불혹', 그리고 '마흔이 넘으면 자기 얼굴에 책임을 져야 한다'는 말이 떠오른다. 과연 어떤 경지에 올라야 흔들리지 않을 수 있을지, 그리고 흔들리지 않는 척이라도 해야 하는 삶이 얼마나 괴로울지를 생각하면 전자에는 쉽게 동의하기 어렵지만, 후자는 점점 와 닿는 바가 크고 심지어 두려워지기까지 하다.


정치판에 들어선, 비교적 선한 얼굴을 가졌던 유명 인사들의 인상이 고작 몇 년 새 심각하게 구겨지는 것을 보고는 자기 얼굴과 표정은 어느 정도 타고난 바탕 위에 스스로 그려나가는 것이라 생각했는데 나 역시 점점 거울 보기가 두려워진다. 가만히 본 나의 무표정, 오히려 찡그림에 가까운 것은 언제부터였을까. 이렇게 태어나지는 않았을 텐데.


애써 웃음 짓고는 보기 좋은 표정만을 양산하는 사진 속 페이크 뉴스가 아닌 진짜 내 얼굴의 디폴트는 혹시 디폴트 위기에 처한 것은 아닌지. 구겨진 마음을 조금씩 펴가는 연습을 시작할 시간이라는 자각.


마흔이 주는 또 하나의 선한 압박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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