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ek 24) 그 많던 선수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소위 레전드라 불리는 프랜차이즈 스타의 은퇴식. 구단 및 팬들의 관심과 배려 속에 성대하게 치러진다. 과거 그들이 헌신했던 모습, 팀에 기여한 각종 기록들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진 뒤 소감을 말하는 자리에선 제 아무리 차가운 심장을 가진 선수라 할지라도 대개는 끝내 눈시울을 붉히고야 만다. 그런 장면을 볼 때면 성적이라는 객관적 수치도 중요하지만 그보다도 함께한 시간, 하나 된 커뮤니티 안에서 희로애락을 함께 나눴던 그 시간의 흔적들이 한껏 달아오른 감정으로 분출되는 것은 아닌가 생각 든다.
반면 슈퍼스타가 아닌 다소 평범한 선수들, 나름의 자리에서 나름의 노력으로 나름의 기여를 해온 그 많은 보통의 선수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그들은 언제 어떻게 우리의 기억에서 사라졌을까.
직장인의 새해는 보통 12월에 시작된다. 11월 평가 시즌을 지나 잠시 숨을 고른 뒤 곧이어 인사 시즌이 시작되기 때문이다. 인사가 만사라는 말처럼 다른 어떤 분야 못지않게 중요한 인사, 그것은 새 시대를 알리는 신호탄이다. 그리고 그맘때가 되면 세상은 둘로 쪼개진다.
되신 분과 안 되신 분,
혹은 이름이 오른 분과 오르지 못한 분.
지금은 많이 사라진 문화지만 과거 인사가 발표되는 날이면 회사 로비는 한 겨울을 잊은 듯 초록빛으로 물들곤 했다. 승진과 영전을 축하하는 각종 난(蘭)들이 주인을 찾아 엘리베이터 앞에 줄지어 대기하는 진귀한 광경. 하지만 그보다 더욱 강렬하게 뇌리에 박힌 기억은 하루 앞서 펼쳐지니, 말 한마디로 세상을 쥐락펴락하시던 분들께서 흔적도 없는 증발하는 과정이다.
심장을 조여 오는 전화벨, 들리지 않는 통화 내역, 뒤이어 파티션 너머로 어렴풋이 들려오는 짐 싸는 소리는 한 시절이 저물었음을 상징하고, 생생했던 칼라 영상은 이내 흑백 사진으로 박제되고 만다.
크고 작은 결격 사유가 있거나, 눈에 띄는 성과를 창출하지 못했거나, 혹은 제법 해냈음에도 더 잘난 누군가에게 밀렸거나, 그도 아니면 그저 나이가 많다는 둥 시대를 잘못 만났다거나, 이유야 차고 넘치지만 결국엔 한 묶음의 집단으로 정의된다.
짐 싸실 분들.
눈이 마주쳐도 마땅히 할 말을 찾기가 어렵다.
이후 혼이 나갈 속도로 조직은 재정비되어 첫 번째 업무 보고가 마무리되고 나면 작금의 문제점과 이를 타개해 나갈 방안, 새로운 비전에 대한 치열한 고민이 시작된다. 법인이라는 껍데기 속 실제 살아 숨 쉬는 인격체들에게 아쉬움, 슬픔, 그리움 따위의 감정은 일체 허락되지 않아 불과 며칠 전까지 실재했던 시대가 아득한 과거가 되기까지는 채 일주일도 걸리지 않는다. 정말이지 며칠만 지나고 나면, 그 시절은 잘 기억나지 않는다.
휴직 후 칩거 중인 백수에게도 인사 소식은 어김없이 전해져 온다. 당분간 새로운 소식이 계속 들려올 테니, 그 혼란스러운 와중에 업무 보고에 매진할 동료들의 모습을 상상하기는 어렵지 않다. 새로 이름이 오른 분들께는 기분 좋게 축하 인사를 드릴 것이다.
반면 원래 그 자리에 계셨던 분들, 혹은 그저 가늘고 길게 버티려다 더는 안 되겠다는 듯 튕겨나간 분들께는 어떤 인사의 말을 전해드려야 하나. 얼마 후면 사라진 역사가 되어버릴 그분들의 마음은 어떻게 위로받을 수 있을까. 혹시 그 전 세대에게서 답습했듯이 죄인처럼 숨죽여 증발하고 계시지는 않을까. 영화로이 한 시절 불태웠던 전장이 아닌, 으슥한 고깃집 한 켠에서 서로를 위로하며 가까스로 소주잔을 돌리고 계시지는 않을런지.
평범한 사람에 대한 감사의 인사, 그 익숙지 않은 문화는 어딘가 어색하다. 불편하고, 껄끄럽다. 허나 속 편히 외면하고 있자니 언제고 반복될 것만 같다.
나에게도, 당신에게도.
우린 대부분 어쨌든 열심히는 살아온 평범한 사람들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