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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r Gray Dec 13. 2019

50. 식탁 위 분산 투자

(Week 25) 칼칼한 닭볶음탕 (Feat. 청양고추)


평일 잠을 푹 자서인지 미국 식재료가 입에 맞아서인지, 아니면 학원을 안 가 기분이 좋아서인지 몇 달 새 아이는 또 부쩍 커버려 이제는 작은 어른키만하다. 의태어라곤 해도 마치 소리가 들리듯이 말 그대로 쑥쑥 크는 한편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눈가에 달고 살던 다크서클도 제법 희미해지니 한국에서보다는 확실히 더 건강한 삶을 살고 있는 것 같은 모양새다. 이제는 옆으로만 자라는 제 부모와는 달리 아이는 위로 자란다. 외투부터 파자마까지 금세 또 작아져 새 계절 한바탕 옷을 주문, 택배 상자를 뜯어 새 옷을 입어보는 재미가 쏠쏠할 즈음 쓸데없는 한마디가 뒤따랐다.


"엄마 아빠는   필요 없으니깐, 우리  많이 사줄게!"


평소 별 뜻 없는 애정 표현에는 무대응 무관용 원칙으로 일관해오던 아이지만, 이번엔 좀 다르다.


"네? 엄마 아빠, 그러지 마세요..."






사실 그런 마음이 드는 게 어제오늘 일은 아니다.


첫 번째 미국 유학생활, 홀로 지내던 그 시절 식재료를 구하기 위해 찾아간 곳은 주로 저가 대형마트의 대표 격인 Walmart 혹은 Kroger. 가성비, 가심비가 다 웬 말이랴, 싼 것만 사겠다는 심산이다. 그도 그럴 것이 겉만 그럴싸한 포장이나, 그래서 뭐가 좋다는 건지 모르겠는 Organic 마크 따위에 현혹되어 두 배 가까운 가격을 지불하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대충 싸게 살자, 나 하나쯤이야.


한겨울에도 어지간하면 난방을 돌리지 않았다. 애틀란타의 겨울이 서울의 그것만큼 혹독하지 않은 것도 이유라면 이유였겠지만, 제법 쌀쌀한 날에도 껴입으면 그만이라는 생각에 늘 두 겹 세 겹에 양말까지 신어 몸을 데우곤 하였다. 여행 중 숙소는 다인실 도미토리 혹은 별 두 개짜리 호텔, 잠깐 눈만 붙이고 갈 테니 도무지 큰돈 쓸 이유가 없다. 대충 싸게 살자, 나 하나쯤이야.




아이와 함께하는 두 번째 미국 생활, 너무 싼 식재료에는 도무지 손이 가지 않는다. 도대체 무슨 짓을 했길래 이 가격으로 나올지 불안하기도 하고, 조금 살아보고 깨달은 '작은 돈 아껴봤자 큰 부자 안되더라'는 어리석음도 한몫 거든다. 계란 코너에서는 빼곡한 닭장 안에서 기계처럼 알을 낳는 닭들이 쳐다보는 것만 같아 그 시선을 피해 Cage free 표기를 확인하고, 터무니없이 비싸지만 않다면야 '뭐라도 좋겠지'하는 생각에 Organic으로 눈길을 준다.


가을인지 겨울인지 모를 애매한 날씨지만, 아이의 작은 기침소리 한 방에 당장 난방을 돌린다. 그깟 난방비 얼마나 한다고. 여행을 갈 적에는 최소 별 세 개 이상은 되는 호텔에 묵어야지, 그 이하는 왠지 퀴퀴한 미국 곰팡이 냄새에 기분을 망칠 것만 같다. 그 냄새에 찡그릴 얼굴을 보기가 싫다.






아이를 대하는 태도와 나 자신, 그리고 아내를 대하는 태도는 분명 크게 다르다. 자식 귀하게 키우고 싶은 마음이야 당연하다 해도, 아이가 점점 커갈수록 집 안에서도 균형감을 찾아갈 필요가 있겠다는 생각은 지을 수 없다. 투자에도, 식단에도, 그리고 가족 구성원 안에서도 필요한 균형 잡힌 포트폴리오를 구축해야지, 무엇이든 지나치게 쏠리면 흔들리고 쏟아지고 결국 터지고야 말 것이라는 걱정, 일종의 직업병이다.


지난 10년간 우리 부부의 온 정신이 너무 아이에게만 쏠려있는 건 아닌가 돌이켜보니 한두 가지가 아니다.


여행 가방을 쌀 때면 일단 아이의 옷을 한가득 넣은 뒤 남는 공간에 우리 부부의 옷을 겨우 욱여넣으니 사진 속 아이는 매일 다른 옷, 우리는 늘 엇비슷한 옷을 입고 등장한다. 여행 코스도 아이 위주로, 식당에서도 아이가 먹을 만한 메뉴 위주로 주문한다. 가령 아이가 잘 먹을만한 우동, 돈까스 따위를 시킨 뒤 아이가 먹는 모양새를 확인하고 나서야 남는 음식으로 우리의 수저가 향했다.


집에서 요리를 할 때도 상황이 크게 다르지는 않아 아이가 먹을만한 식재료에 아이가 먹을 수 있을 정도로만 간을 하니 나와 아내의 입에는 너무 착한 맛, 죄책감이 들지 않는 라면과 영혼을 달래주지 못하는 떡볶이가 완성되어 한 마디로, 애매하다.




"엄마 아빠, 그러지 마세요..."


아이가 보내온 신호가 사뭇 진지해 나 역시 한 번 생각해볼 일이다. 진짜 우리를 생각해서 한 말일까, 아니면 어느새 둘이서 저 하나만 바라보는 게 다소 부담스러울 나이가 되어버린 것일까. 이유야 무엇이든 간에 그 한마디, 가볍지가 않았다.


별 뜻 없이 한 말일 수도 있겠지만 며칠 전부터 이마에 오도톨하게 올라오는 뾰루지 같은 것을 보며 아이가 정말 많이 컸구나 생각이 드니, 한쪽으로 심하게 쏠렸던 신경, 이제 조금은 분산할 때가 된 것도 같다.




늦깎이 공부 중인 아내는 얼마 전부터 닭볶음탕이 먹고 싶다 하였다. 힘들었던 첫 학기의 마지막 시험을 마치고 집에 일찍 들어온 날, 까짓것 한 번 해주지 뭐. 닭볶음탕의 필수 재료인 닭, 감자, 양파를 다듬고는 양념장을 만들던 중 잠시 고민에 빠졌다. 아내가 원하는 건 무슨 맛일까.


'기본 간은 고춧가루, 간장, 설탕으로 해주면 되는데 맵기는... 너무 맵게 하면 아이가  먹을 테고, 그렇다고 너무 밍밍하게 하면 아내가 기대하는  맛이 아닐 텐데...


에라 모르겠다,  마늘  움큼에 청양고추 투입!'


음식을 준비하며 지금껏 먹어본 가장 맛있었던 닭볶음탕을 떠올렸다. 야근을 밥 먹듯이 하던 그 시절 오늘은 집에 일찍 갈 수 있을 거란 헛된 기대로 버티다 버티다 먹는 늦은 저녁. 태평로 뒷골목 허름한 주차장 한 편에 위치한 이름 모를 식당, 널찍한 전골냄비 위로 지친 영혼을 보듬어줄 알싸한 조미료 맛의 향연이 펼쳐진다. 비록 몸에는 죄를 짓는 느낌이지만, 힘들 땐 이런 걸 먹어줘야 스트레스가 풀리지. 그때 그 맛을 떠올리며 양념을 있는 대로 때려 부으니 장인의 그 맛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 흉내 낸 그때의 맛이 완성되었다.


"우리 먹을 거라, 간을  세게 했어."


이럴 땐 흰쌀밥에 참기름 살짝 두르고는 살만 살살살 발라낸 닭고기에 으깬 감자, 그리고 칼칼한 국물까지 부어 슥슥 비벼먹어야 제 맛이다. 한 술 떠본 아내, 답지 않게 칭찬까지 곁들여주니 금상첨화다.


"오, 미국 와서 먹은 것 중에 제일 맛있는데?"


아이는, 미안하지만 오늘 저녁은 아침에 이어 또 한 번 김밥이다. 대신 스팸 한 조각 두툼하게 썰어 넣어주기로. 균형 잡힌 건강한 식단은 다시 또,


내일부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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