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ek 25) 칼칼한 닭볶음탕 (Feat. 청양고추)
평일 잠을 푹 자서인지 미국 식재료가 입에 맞아서인지, 아니면 학원을 안 가 기분이 좋아서인지 몇 달 새 아이는 또 부쩍 커버려 이제는 작은 어른키만하다. 의태어라곤 해도 마치 소리가 들리듯이 말 그대로 쑥쑥 크는 한편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눈가에 달고 살던 다크서클도 제법 희미해지니 한국에서보다는 확실히 더 건강한 삶을 살고 있는 것 같은 모양새다. 이제는 옆으로만 자라는 제 부모와는 달리 아이는 위로 자란다. 외투부터 파자마까지 금세 또 작아져 새 계절 한바탕 옷을 주문, 택배 상자를 뜯어 새 옷을 입어보는 재미가 쏠쏠할 즈음 쓸데없는 한마디가 뒤따랐다.
"엄마 아빠는 새 옷 필요 없으니깐, 우리 딸 많이 사줄게!"
평소 별 뜻 없는 애정 표현에는 무대응 무관용 원칙으로 일관해오던 아이지만, 이번엔 좀 다르다.
"네? 엄마 아빠, 그러지 마세요..."
사실 그런 마음이 드는 게 어제오늘 일은 아니다.
첫 번째 미국 유학생활, 홀로 지내던 그 시절 식재료를 구하기 위해 찾아간 곳은 주로 저가 대형마트의 대표 격인 Walmart 혹은 Kroger. 가성비, 가심비가 다 웬 말이랴, 싼 것만 사겠다는 심산이다. 그도 그럴 것이 겉만 그럴싸한 포장이나, 그래서 뭐가 좋다는 건지 모르겠는 Organic 마크 따위에 현혹되어 두 배 가까운 가격을 지불하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대충 싸게 살자, 나 하나쯤이야.
한겨울에도 어지간하면 난방을 돌리지 않았다. 애틀란타의 겨울이 서울의 그것만큼 혹독하지 않은 것도 이유라면 이유였겠지만, 제법 쌀쌀한 날에도 껴입으면 그만이라는 생각에 늘 두 겹 세 겹에 양말까지 신어 몸을 데우곤 하였다. 여행 중 숙소는 다인실 도미토리 혹은 별 두 개짜리 호텔, 잠깐 눈만 붙이고 갈 테니 도무지 큰돈 쓸 이유가 없다. 대충 싸게 살자, 나 하나쯤이야.
아이와 함께하는 두 번째 미국 생활, 너무 싼 식재료에는 도무지 손이 가지 않는다. 도대체 무슨 짓을 했길래 이 가격으로 나올지 불안하기도 하고, 조금 살아보고 깨달은 '작은 돈 아껴봤자 큰 부자 안되더라'는 어리석음도 한몫 거든다. 계란 코너에서는 빼곡한 닭장 안에서 기계처럼 알을 낳는 닭들이 쳐다보는 것만 같아 그 시선을 피해 Cage free 표기를 확인하고, 터무니없이 비싸지만 않다면야 '뭐라도 좋겠지'하는 생각에 Organic으로 눈길을 준다.
가을인지 겨울인지 모를 애매한 날씨지만, 아이의 작은 기침소리 한 방에 당장 난방을 돌린다. 그깟 난방비 얼마나 한다고. 여행을 갈 적에는 최소 별 세 개 이상은 되는 호텔에 묵어야지, 그 이하는 왠지 퀴퀴한 미국 곰팡이 냄새에 기분을 망칠 것만 같다. 그 냄새에 찡그릴 얼굴을 보기가 싫다.
아이를 대하는 태도와 나 자신, 그리고 아내를 대하는 태도는 분명 크게 다르다. 자식 귀하게 키우고 싶은 마음이야 당연하다 해도, 아이가 점점 커갈수록 집 안에서도 균형감을 찾아갈 필요가 있겠다는 생각은 지을 수 없다. 투자에도, 식단에도, 그리고 가족 구성원 안에서도 필요한 균형 잡힌 포트폴리오를 구축해야지, 무엇이든 지나치게 쏠리면 흔들리고 쏟아지고 결국 터지고야 말 것이라는 걱정, 일종의 직업병이다.
지난 10년간 우리 부부의 온 정신이 너무 아이에게만 쏠려있는 건 아닌가 돌이켜보니 한두 가지가 아니다.
여행 가방을 쌀 때면 일단 아이의 옷을 한가득 넣은 뒤 남는 공간에 우리 부부의 옷을 겨우 욱여넣으니 사진 속 아이는 매일 다른 옷, 우리는 늘 엇비슷한 옷을 입고 등장한다. 여행 코스도 아이 위주로, 식당에서도 아이가 먹을 만한 메뉴 위주로 주문한다. 가령 아이가 잘 먹을만한 우동, 돈까스 따위를 시킨 뒤 아이가 먹는 모양새를 확인하고 나서야 남는 음식으로 우리의 수저가 향했다.
집에서 요리를 할 때도 상황이 크게 다르지는 않아 아이가 먹을만한 식재료에 아이가 먹을 수 있을 정도로만 간을 하니 나와 아내의 입에는 너무 착한 맛, 죄책감이 들지 않는 라면과 영혼을 달래주지 못하는 떡볶이가 완성되어 한 마디로, 애매하다.
"엄마 아빠, 그러지 마세요..."
아이가 보내온 신호가 사뭇 진지해 나 역시 한 번 생각해볼 일이다. 진짜 우리를 생각해서 한 말일까, 아니면 어느새 둘이서 저 하나만 바라보는 게 다소 부담스러울 나이가 되어버린 것일까. 이유야 무엇이든 간에 그 한마디, 가볍지가 않았다.
별 뜻 없이 한 말일 수도 있겠지만 며칠 전부터 이마에 오도톨하게 올라오는 뾰루지 같은 것을 보며 아이가 정말 많이 컸구나 생각이 드니, 한쪽으로 심하게 쏠렸던 신경, 이제 조금은 분산할 때가 된 것도 같다.
늦깎이 공부 중인 아내는 얼마 전부터 닭볶음탕이 먹고 싶다 하였다. 힘들었던 첫 학기의 마지막 시험을 마치고 집에 일찍 들어온 날, 까짓것 한 번 해주지 뭐. 닭볶음탕의 필수 재료인 닭, 감자, 양파를 다듬고는 양념장을 만들던 중 잠시 고민에 빠졌다. 아내가 원하는 건 무슨 맛일까.
'기본 간은 고춧가루, 간장, 설탕으로 해주면 되는데 맵기는... 너무 맵게 하면 아이가 못 먹을 테고, 그렇다고 너무 밍밍하게 하면 아내가 기대하는 그 맛이 아닐 텐데...
에라 모르겠다, 간 마늘 한 움큼에 청양고추 투입!'
음식을 준비하며 지금껏 먹어본 가장 맛있었던 닭볶음탕을 떠올렸다. 야근을 밥 먹듯이 하던 그 시절 오늘은 집에 일찍 갈 수 있을 거란 헛된 기대로 버티다 버티다 먹는 늦은 저녁. 태평로 뒷골목 허름한 주차장 한 편에 위치한 이름 모를 식당, 널찍한 전골냄비 위로 지친 영혼을 보듬어줄 알싸한 조미료 맛의 향연이 펼쳐진다. 비록 몸에는 죄를 짓는 느낌이지만, 힘들 땐 이런 걸 먹어줘야 스트레스가 풀리지. 그때 그 맛을 떠올리며 양념을 있는 대로 때려 부으니 장인의 그 맛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 흉내 낸 그때의 맛이 완성되었다.
"우리 먹을 거라, 간을 좀 세게 했어."
이럴 땐 흰쌀밥에 참기름 살짝 두르고는 살만 살살살 발라낸 닭고기에 으깬 감자, 그리고 칼칼한 국물까지 부어 슥슥 비벼먹어야 제 맛이다. 한 술 떠본 아내, 답지 않게 칭찬까지 곁들여주니 금상첨화다.
"오, 미국 와서 먹은 것 중에 제일 맛있는데?"
아이는, 미안하지만 오늘 저녁은 아침에 이어 또 한 번 김밥이다. 대신 스팸 한 조각 두툼하게 썰어 넣어주기로. 균형 잡힌 건강한 식단은 다시 또,
내일부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