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ek 26) 문제는 실행이야, 알잖아?
영어는 여전히 넘기 힘든 장벽이다. 평소 별 일 없이 지내다가도 가끔씩 부딪치는 상황에 크게 좌절감을 느끼기도 한다. 어딘가에 예약 확인이나 취소 전화를 할 때면 내 성 하나 제대로 발음하지 못해 'LEE, L as a Lemon'을 습관처럼 덧붙인다. 그렇지 않으면 상대방이 'AEE'로 적을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어느날 마트 계산대에서 검(gum)이 어디 있냐 물어보니 점원께서 적잖이 당황하였다. 손으로 입을 가리키며 '츄잉 검(chewing gum)'이라고 말하자 그제야 'Oh, you're looking for a GUM!'이라 화답해주니 답답하기만 하다. 어려서부터 영어를 공부한 게 몇 년이고, 미국에서의 생활도 2년 반 째인데 아직도 검(gum) 하나 제대로 발음 못하는 게 현실이었다.
답답한 마음에 다시금 영어 학원으로 향했다. 애틀란타에는 정식 어학원은 아니지만 이민자들의 정착을 도와주는 무료 교육기관이 꽤 많은 편이다. 대부분 정부 혹은 교육기관의 장학기금으로 운영되며 일반 직원과 자원 봉사자가 함께 일한다. 내게 상담을 해주신 제임스씨는 델타항공에서 30년 이상 근무하고 은퇴한 뒤에는 애틀란타의 한 가톨릭 복지기구에서 영어를 가르치고 계시는 분이었다. 미국에서 대학원을 다닌 사람이 또다시 영어 교육기관을 찾았다는 사실에 흠칫 놀란 기색이었지만, 내 사연을 듣더니 웃으며 말씀하셨다.
"제 생각에는 그 점원께서 Mr. Lee가 건(gun)을 찾고 있다고 이해했을 것 같네요."
"네? 저는 검(gum) 하고 분명히 발음했는데요."
"발음을 똑바로 했다고 생각했겠지만, 제가 보기에도 입의 움직임이 너무 작아요. 입을 크게 움직여 발음하지 않으면 미국 사람이 듣고 이해하기가 쉽지 않을 겁니다."
듣고 보니 맞는 말이다. 힘주어 말한다고는 해도 소리를 더 크게 내려는 노력이지 발음을 크고 정확하게, 조금은 과장되게 입술을 움직이는 미국인들의 영어 발음과는 분명히 다른 점이 많아 보였다. 모국어를 할 때도 다소 웅얼웅얼거리며 말하는 버릇이 있는데, 그게 영어를 할 때라고 개선되지는 않은 모양이다. 그리고 제임스씨께서 덧붙여 말씀하셨다.
"제가 여기서 몇 년째 영어를 가르치고 있는데, 한국 사람들은 분명 영어를 잘합니다. 작문을 해보면 그 어떤 나라 사람들보다 훌륭합니다. 그런데 스피킹에 관해서는 이상할 정도로 실력이 늘지 않아요. 어떤 분은 1년 넘게 가르쳐도 끝내 알아듣기 힘든 영어를 구사합니다. 저는 분명히 효과적인 방법을 가르쳐 줬는데도 그대로 실행하지 않더라구요. 혹시 Mr. Lee는 유튜브에서 미국인들의 영어 발음에 대한 영상을 보며 따라 해 본 적 있나요?"
생각해보면 그렇게 연습을 해보라는 말은 처음 미국에 왔을 때도, 두 번째 미국에 왔을 때도 들었다. 하지만 실제 그렇게 따라 해 본 적은 한 번도 없다. 평소 영어 공부는 둘 중 하나, 영어책을 보거나 미드를 보거나. 익숙한 길로만 가려는 관성으로 인해 익숙하지 않은 상황을 회피하는 성향 때문에 편하긴 해도 발전이 없다. 적당히는 해도 잘하지는 못한다.
"아이들과 달리 성인들은 이미 혀가 굳어서 미국인처럼 발음하는 게 쉽지는 않습니다. 다들 그렇게 알고 있죠. 하지만 그렇다고 개선이 전혀 불가능하지는 않아요. 하루에 한 시간씩 연습해 보세요. 미국인의 입 모양을 보고, 과장해서 따라 해 보세요. 유튜브에 'pronunciation' 이라고 검색하면 좋은 강의가 많이 나옵니다. 앞으로 몇 달만 꾸준히 연습하면 최소한 검(gum)을 찾는데 건(gun)을 주는 일은 없을 겁니다. 저는 누구에게나 이런 방법을 알려줄 수는 있는데, 실제 연습을 할지 말지는 결국 본인에게 달려있습니다."
사실 영어만의 문제는 아니었다. 따지고 보면 답을 몰라서 헤매는 경우보다는 답을 알면서도 실행하지 않는 경우가 더 비일비재하다. 답을 모를 땐 답을 찾기 위해 머리를 싸매고 고민하는데, 막상 답을 들은 뒤에는 알면서도 모른 체한다. 건강을 유지하려면 꾸준히 운동을 하고 술담배를 멀리하고 채식 위주의 식단을 짜면 된다. 일을 잘하려면 부지런히 좋은 자료를 챙겨보고 한번 더 고민하고 일정을 잘 맞추려 노력하면 된다. 원만한 대인관계를 위해서는 말하기보다는 듣기에 힘쓰고 초등학생도 다 아는 사자성어, 역지사지의 마음으로 타인을 대하면 된다. 몇 가지 중요한 원칙만 지켜나가면 비록 완벽하진 못하더라도 조금씩 개선될 여지는 충분하다.
다 아는 얘기, 하지만 문제는 실행이다.
그리고 실행이 중요하다는 평범한 말조차 알면서도 실행하지 않으니 그것은 모르는 것과 다름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