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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r Gray Jan 10. 2020

54. 혼자하는 여행, 함께하는 여행

(Week 29) 한 여름의 크리스마스


지난 크리스마스는 아르헨티나 쪽 이과수 마을, 푸에르토 이과수에서 맞이하였다. 이과수 강을 경계로 남쪽 아르헨티나에는 푸에르토 이과수, 북쪽 브라질에는 포즈두 이과수라는 마을이 자리 잡아 세계 곳곳에서 찾아온 관광객들에게 음식과 쉴 자리를 제공한다. 북반구와는 반대인 계절 탓에 섭씨 30도를 웃도는 무더위 속 맞이한 크리스마스 시즌, 어울리지 않는다 자각 때문인지 반복되는 인플레와 페소화 폭락에 지쳐서인지 동네 분위기는 그다지 경쾌하지 않다. 다만 유명 관광지인 만큼 최소한의 축제 분위기를 느낄 수 있게끔 걸어둔 장식만이 구색을 맞출 뿐.


이과수 폭포를 둘러보고 돌아온 저녁, 식사를 위해 시내 중심가의 한 레스토랑을 찾았다. 10시를 훌쩍 넘겨야 날이 저무는 이 마을의 저녁 식사는 대개 8시나 9시쯤 시작된다. 메뉴판을 훑어보며 세 식구가 먹을 스테이크와 생선요리를 우선 고르고는 추가적으로 파스타와 샐러드 중 무얼 먹을지 고민하던 중 다른 사람들은 무얼 먹나 궁금해 둘러보니 홀로 앉아계신 내 또래의 남자분이 눈에 띈다. 옷차림이나 서로를 힐끔 보는 느낌상, 한국분 같다.


그분은 와인 한 모금에 식전 빵을 뜯어먹고는 핸드폰을 만지작댄다. 편한 자세로 손가락만 좌우로 움직이는 것이 무언가를 검색하기보다는 아마도 여행 중 찍은 사진을 감상하는 모양새다. 곧이어 테이블에 큼직한 스테이크 한 덩이가 나온다. 먹음직스럽게 시어링 된 등심 스테이크, 보나 마나 속은 육즙이 가득할 것이다. 아르헨티나 스테이크는 배신하는 법이 없다. 와인 한 모금, 스테이크 한 점, 다시 와인 한 모금, 스테이크 또 한 점. 하지만 점차 속도가 더뎌지니 그분께서 아마도 스테이크를 다 드시지는 못할 것이라 예감하였다. 꽤나 맛있어 보이는 스테이크지만 다 먹기는 버거운, 그게 어떤 맛인지 나는 알 것만 같다.


혼자 먹는 한 가지 음식의 맛


꼭 외롭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것은 마땅한 밑반찬 없이 주구장창 고기만 밀어 넣는 지루한 맛이며, 불러오는 배와 본전 생각 사이에서 야기되는 갈등의 맛이다.






몇 해 전, 가족들을 서울에 남겨두고 미국 유학생활을 하던 시절 혼자 참 많이도 돌아다녔다. 외로울 것이라는 걱정과는 달리 혼자하는 여행 또한 꽤나 매력적이었다. 다리가 후들거릴 정도로 콜로라도 로키산맥을 해집고 돌아다닐 수도 있고, 마이애미에서 키웨스트에 이르는 바다 위 고속도로를 몇 시간이고 달릴 수도 있다. 그랜드 캐니언으로 향하는 장거리 버스 안에서는 다른 세계에 온 듯한 경치를 넋 놓고 감상하다가, 정지화면 같은 그 풍경에 지루해질 즈음이면 오래 묵혀둔 책을 읽는다. 남미 배낭여행에서는 어딜 가나 설렘 가득한 새로운 친구들을 만날 수 있다. 우연히 만나 함께 걷고, 서로의 여행기를 나누고는 다시 행운을 빌며 각자의 길을 떠난다.


혼자하는 여행. 가고 싶을 땐 가고 멈추고 싶을 땐 멈춘다. 종일 미친 듯이 걷다가도 어떤 날은 아무것도 안 하고 책만 본다. 자고 싶으면 자고 먹고 싶으면 먹는다. 한낱 미물에 불과할지라도 이 순간만큼은 모든 것이 내 마음대로니, 그야말로 내 세상이다.


하지만 제 아무리 내 세상이라 해도 난처한 상황은 찾아오니 바로 레스토랑에서 메뉴를 고를 때이다. 혼밥의 적적함 따위야 극복한 지 오래지만 문제는 혼자서는 엄선된 하나의 음식만을 선택해야 한다는 점이다. 돈도 돈이지만 음식을 남길 수는 없기에 무리할 수 없다. 리마에서는 신선한 해산물 샐러드인 세비체를, 라파즈에서는 쿠바식 스테이크 요리를 주문했지만 결국 다 먹지 못했다. 산티아고의 해산물 플래터도 결국 반쯤 남기고 말았고, 그러다 보니 쿠스코의 유명한 기니피그 바베큐는 시도조차 못했다.


여행의 큰 기쁨 중 하나인 이국적인 음식들, 크게 가리는 게 없기에 하나같이 먹음직스럽지만 끝내 다 먹기란 여간 버거운 일이 아니었다. 우리의 식당들처럼 다양한 밑반찬이 제공되지 않아 같은 맛의 음식을 연달아 한 점, 두 점 밀어 넣다 보면 어느새 더 먹어봐야 뭐하겠나 생각이 든다. 몇 가지 가니쉬가 제공되긴 해도 그것 만으로는 힘이 부친다. 본전 생각에 몇 점 더 들어보지만, 결국 다 먹어봤자 살만 찔 테니 이쯤에서 마무리하자 적당히 합의 본다.


좋은 레스토랑에 가서도 다양한 음식을 나눌 수 없다는 안타까움이 밀려올 무렵이면 어김없이 가족 생각이 난다.






이과수 마을의 한 레스토랑, 옆 테이블에서 식사 중이신 한국인으로 추정되는 그분은 식전 빵을 조금 더 뜯고, 와인을 몇 모금 홀짝거리고, 스테이크를 몇 점 더 욱여넣고는 잠시 뒤 계산서를 달라하신다. 접시 위에는 아직 삼분의 일 가량의, 아직 채 온기가 가시지 않은 스테이크가 남아있으니 경험에서 비롯된 예감은 좀처럼 틀리는 법이 없다.


그날 우리 세 식구는 고민 끝에 등심 스테이크와 수루비라는 이름의 민물생선요리, 그리고 시저 샐러드를 주문하였다. 관광지 물가라 상대적으로 비싸다고는 해도 한국이나 미국에 비하면 절반 가량의 비용으로 성찬을 즐길 수 있는 셈이다. 힘들다 배고프다 투덜대던 아이도 몇 숟갈 입에 넣고는 금세 표정이 밝아졌다.


사실 가족여행이라고 늘 설레고 즐거운 것만은 아니다. 구석구석 걸어볼까 하면 택시를 타자 하고, 조금 더 둘러보고 싶지만 힘들다고 이제 그만 가자 한다. 아직 배가 안고픈데 밥 먹자 보채기도 하고, 숙소로 돌아와 좀 쉴까 하면 놀자 한다.


몇 해 전 홀로 떠난 여행들이 그리워질 법도 하지만, 테이블을 가득 채운 음식과 그것을 맛있게 먹는 모습을 보니 슬그머니 기분이 풀린다. 샐러드로 시작해 스테이크 생선 번갈아 한 점씩, 며칠 굶고 온 사람들마냥 세 접시를 금세 비워낸다.


쩝쩝대며 먹는 모습이 좋고, 배부르다 웃음 짓는 모습도 좋다. 사진을 찍어주니 고맙고, 가끔 사진에 함께 등장하니 더 고맙다. 카드놀이 하자며 조잘조잘 떠드니 심심할 새 없고, 금세 곯아떨어져 새근새근 숨소리를 내뿜으니 그 소리가 포근하기만 하다.


미우나 고우나 우리 식구(食口).

인생은 여행이라더니, 그 여행 함께여서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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