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ek 31) 좋은 소식을 기다립니다
대학, 군대, 취직, 결혼, 육아 등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는 시간을 한참 보내고 나면 뜸했던 친구들 소식이 들려온다. 전에는 동창회를 통해, 요즘은 SNS를 통해. 누구는 스타트업에 취직했고, 누구는 사업을 한다더라. 누구는 교수가, 누구는 벌써 임원이 되었다더라. 그런 날이면 누가 마흔을 불혹이라고 말했는지, 괜한 심통이 나 잠들지 못해 천장만 빤히 쳐다본다.
나는 걷고 있는지 뛰고 있는지 속도가 느껴지지 않는다. 어디로 가고 있는지 방향을 잃은 것만 같다. 스스로 나아가는 건지 등 떠밀려 가는 건지 불분명하다. 잘하고 싶은데 어떻게 하는 게 잘하는 건지, 무얼 잘해야 잘하는 건지조차 도무지 알 수 없다.
그렇게 한바탕 1인용 전쟁을 치르고 나면 어떤 친구들이 떠오른다.
어느 날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왔다. 그렇게 가깝지는 않았던 오래된 친구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지 10년을 훌쩍 넘긴 시점 갑작스레 전화하고는, 거두절미하고 묻는다. 좀 도와줄 수 없냐고.
누군가와 시비가 붙고 폭행에까지 이르렀다고 한다. 싸움깨나 하던 친구였다. 당시 우리의 나이가 이미 서른을 넘겼을 때이니 왜 여태 그러고 사냐는 말이 목에 걸려 있었지만, 끝내 나오지 않았던 건 학창 시절 기세 등등했던 그 친구가 너무나도 풀이 죽은 목소리로, 아는 변호사가 있으면 소개해줄 수 없냐 물었기 때문이었다. 가슴이 턱 막혀왔다. 단순히 돈 문제가 아니었다. 당시 내가 해줄 수 있는 일은 10여 년 전 법대에 입학했던 것으로 기억되는 친구 몇 명의 연락처를 알려주는 게 전부였다. 차라리 돈 문제였으면 조금이나마 도와줄 수 있었을 것이라 생각했다.
어느 날 또 다른 친구에게 전화가 왔다. 조금은 가까웠던 친구였다. 상투적인 근황을 묻더니 잠시 머뭇거린다. 고작 몇 초간의 정적에서 돈 문제임을 직감하였고, 그 예감은 틀리지 않았다. 사정이 좀 있으니 돈을 빌려줄 수 없냐 묻는다. 이제 문제는 액수다.
다시 정적이 흐른다. 두 번째 정적은 일종의 눈치싸움이다.
'얼마를 말할까? 터무니없이 큰돈은 아닐 테고, 적당히 마음을 움직일만한 액수겠지? 빌려줘야 하나, 말아야 하나? 돌려받을 수는 있을까? 그냥 주는 게 속 편할까?'
사실 그동안 목격해온 사연들, 돈 문제로 죽이니 살리니 하는 꼴을 적잖게 봐온지라 나름의 깨달은 바가 있었다.
1. 거절하면 돈은 지키지만 친구를 잃는다.
2. 거저 주면 돈은 잃지만 친구는 지킨다.
3. 빌려주면 돈도 잃고 친구도 잃는다.
빌려주는 것은 최악의 선택이니 결국 주거나 말거나의 선택지가 남는다. 액수에 따라 대응도 달라질 테니 오랜 우정이니 뭐니 해도 그 무게가 마냥 무겁지만은 않다는 사실이 씁쓸했다. 친구는 침묵 끝에 30만원을 부탁했고, 잘은 모르겠지만 30만원은 친구를 지키기 위한 어떤 불분명한 범위 안에 있었던 것 같다. 정확한 사정을 묻지 않은 채 당장 갚지 않아도 된다 말하고, 대신 상황이 좋아지면 꼭 연락 달라는 말을 남기고는 돈을 부쳐주었다.
한바탕 숨 막히는 심리전을 치른 뒤, 만약 그 친구가 30만원이 아닌 50만원이나 100만원, 혹은 그 이상을 부탁했으면 어떻게 말했을까 생각해보았다. 답이 떠오르지 않았다. 무슨 사정인지 캐묻지 않은 이유도 생각해보았다. 마찬가지로 쉽사리 답이 떠오르지 않았지만, 시간이 조금 더 흐른 뒤 깨달았다. 그 정도로 퉁 치고 귀 닫고 싶었나 보다.
일련의 일들을 겪고 나니 오랜 친구, 하지만 소식이 뜸했던 친구로부터 연락이 올 때면 가슴이 철렁거린다. 받을까 말까 머리를 굴리기도 한다. 건너 건너 좋지 않은 소식을 들은 친구 이름이 뜨면 실제 받지 않기도 하였다.
무소식이 희소식이라는 말과는 달리, 그럴 가능성은 생각보다 높지 않았다.
어쩌다 들려오는 좋은 소식에 배가 아플 때면 힘든 친구들이 떠오른다.
그래, 기왕이면 좋은 소식이 훨씬 낫지.
허나 진심으로 도와주지는 못할 망정 마음 추스르는 데 이용이나 해 먹으니 사람 마음이라는게 그렇게 치사할 수가 없다.
그러다가도 진심으로 잘 지내길 바라다니,
그마저도 참 치사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