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ek 31) 뜨거운 안녕
직장인은 끊임없이 앞을 향해 나아가려는 관성으로 움직이는 사람들이라 그런지 쉼이 낯설기만 하다.
직장인은 누군가와 경쟁하기를 강요당하는 사람들이라 그런지 혼자만의 레이스가 외롭기만 하다.
직장인은 단기 평가와 그에 따른 보상을 받게끔 설계된 사람들이라 그런지 눈 앞에 보이지 않는 결과물에 답답하기만 하다.
마음의 안정을 가져다준 것도, 동요를 일으키는 것도 결국 글이었다. 타인의 글은 함께 울고 웃는 친구가 되어주다가도 어느 순간 내가 가진 것들을 초라하게 비춰주는 거울이 되어 버린다. 가진 것 이상으로 잘하고자 하는 마음은 어느 순간부터 독이 되어 나를 마비시키니 머리 먼저, 열 손가락이 뒤따라 얼음장처럼 싸늘하게 식어버려 몇 시간을 끙끙대도 한 줄 적기조차 버거워진다. 하지만 멍하니 둘러본 세상은 약 올리듯 바쁘게만 돌아간다.
15년 차 직장인의 휴직. 최초의 고민이 다시금 나를 습격한다.
'무엇을 하고 있는가'
같은 고민이 3일째 이어지던 날. 끙끙 앓아버렸다.
체온이 1도 오른다.
몸의 반응 속도가 생각에 미치지 못한다.
1도 더 오른다.
생각 없이 삼키던 침에서 쓴 맛이 난다.
기어코 1도 더 오르고 만다.
머릿속 한쪽 구석 균열이 발생한 듯 삐걱거린다.
꿈에 희미한 형체가 내게 묻는다.
무얼 하며 사느냐고.
남들 죽기 살기로 일하는데 무얼 하고 있느냐고.
뒤처지지 않을 자신 있냐고.
찍소리 낼 수 없어 끙끙대었다.
말 그대로 끙끙, 앓고 말았다.
밤새 거짓말같이 39.5도를 찍더니 다음날 거짓말같이 36.5도로 돌아왔다. 살아있는 온도, 따뜻한 체온으로. 해열제, 소고기, 오렌지 주스, 그리고 아내의 극진한 간호 덕분인지 한바탕 뜨거운 속앓이 뒤 맡아보는 바깥공기는 유난히 더 상쾌하다. 몸은 평소처럼 마음대로 움직여진다. 침은 달진 않지만 쓰지도 않다. 마치 머릿속이 텅 빈 듯, '아무 느낌 없음'도 꽤 괜찮은 기분이다.
지옥에서 돌아와 다시 들여다본 세상, 겨울 하늘이 청명하다. 새들은 여전히 노래하고, 나무는 싹을 틔워낼 기운을 모으는 중이다. 여전히 바쁘기만 한 그들의 세상이 웬일인지 셈나지 않는다.
아이의 도시락을 싸고, 학교를 보내고, 청소나 빨래 등 집안일을 한다. 아내와 아이가 돌아오면 간식과 저녁을 차려주고, 숙제를 봐주고, 보드게임을 하고, 운동을 하고, 샤워를 하고, 잠이 든다. 일상이다.
종종 새로운 음식에 도전한다. 먹어본 맛을 흉내 내 보고, 비슷하면 짜릿해한다. 김치를 담근다. 아내는 절이고, 나는 양념을 만들고, 아이는 묻힌다. 지도를 펼쳐놓고 여행 계획을 짠다. 상상 속 어느 광경에 세 식구를 밀어 넣는 상상을 더한다. 그림을 그린다. 연필, 사인펜, 색연필, 파스텔로 슥삭슥삭 그려내고는 벽에 걸어둔다. 그러다가 가끔은 잔소리를 해댄다. 화내고, 삐지고, 달래고, 다시 웃는다. 그렇게 서로에게 최고의 친구가 되어간다. 하마터면 경험하지 못했을 뻔한 특별한 일상이다.
부대끼는 삶에 하루 만에 복귀한 날,
한낮의 푸르름 속 살며시 달이 모습을 드러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