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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r Gray Jan 30. 2020

57. 엄마도 리더였습니다

(Week 32) 존경받는 리더의 덕목


어떤 리더에 대한 기억입니다.


십여 년 전 처음 뵌 그분은 당시 상무님이었습니다. 팀장으로 부임하신 첫 주말 두툼한 전공서적 한 권 분량에 해당하는 과거 수년간의 보고서를 출력해 주말 내내 꼼꼼히 읽으시고는, 중요한 수치와 로직을 하나하나를 차분히 머릿속에 입력하기 시작하셨습니다. 이후 조그만 변동이라도 발생하면 마치 과거 수치는 휴지통에 넣고 새 수치로 새로고침을 하신 것 마냥 깔끔하게 재정리를 하실 수 있는, 흔히 말해 숫자에 대한 감이 무척 좋은 분이었습니다. 처음 며칠간은 골치 아픈 현안 보고서들을 차분히 읽으며 주요 쟁점에 대해 실무자로부터 직접 보고를 받으셨고, 채 얼마 지나지 않아 굵직한 의사결정을 거침없이 해나가셨습니다.


이후 보여주신 업무 스타일은 소위 지독한 워커홀릭 그 자체였습니다. 중요한 보고나 회의를 앞두고는 식사를 거르며 일에 몰두하기 일쑤였으며 어떤 환경에서든, 가령 사무실뿐 아니라 식당이나 심지어 노래방에서도 뇌의 절반 정도는 일에 대해 생각하고 계신 듯 보였습니다. 잡담을 나누다가도 갑자기 메모지를 꺼내 무언가를 적으시고는 조만간 이 문제에 대해 시간 내어 상의해 보자는 말씀을 종종 꺼내셨기 때문입니다. 대개는 일을 복잡하게 만들기보다는 주요 현안에 대한 방향을 제시해 주시는 경우가 많았기에 그런 모습이 꼭 나쁘게 보이지만은 않았습니다. 탁월한 재능에 안주하지 않고 노력까지 더하는 천재가 얼마나 무서운지 처음 목격한 시기였습니다. 그렇게 늘 치열하게 일하셨고, 조직 내 주요 요직을 거치며 승승장구하셨습니다.




그로부터 몇 년이 지나 다시 그분과 일할 기회가 찾아왔습니다. 두 번째 만남, 탄탄대로를 걸어 부사장으로 승진하신 뒤였습니다. 과거 경험상 당분간 집에 일찍 들어가기 힘들 것이라 걱정했지만 이는 기우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불필요한 업무는 과감히 축소시키려는 노력으로 잔업과 특근을 지양하는 시대의 흐름에 순응하는 한편, 본인에게 주어진 역할에 대해서는 본인의 스타일을 고수하는 자세를 보여주셨습니다. 실제로 당시 많은 관행적인 보고 문화가 사라지기도 했습니다. 기억 속 워커홀릭 임원을 뛰어넘어 리더로서 솔선수범 하시는 모습은 후배들의 존경심을 자아내기에 충분해 보였습니다.


나이가 들수록 사고가 얼마나 경직되어 가는지, 자신의 성공 경험에 도취되는 오류에 빠지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지를 점차 깨닫게 될수록 그와는 반대로 한층 더 유연해진 사고를 바탕으로 신중하게 업무에 임하시는 모습이 경이롭기까지 했습니다. 말하기보다는 듣기 위해 애쓰고, 특히나 고위급 임원의 말 한마디가 불러일으킬 나비효과를 누구보다 잘 알고 계시는 듯 조그마한 업무 지시라도 늘 신중을 기하셨습니다.


그중에도 특히나 큰 노력을 기울이신 분야는 바로 신속한 의사결정이었습니다. 책임을 회피하고자 중요한 결정을 차일피일 미루는 여타 고위 임원분들과는 달리 회의에 참석하거나 보고를 받는 날이면 그날의 안건은 반드시 그날 마무리지어주셨습니다. "그러게 내가 뭐라고 했어!"라는 말 대신 "내가 뭘 도와주면 되지?"라는 말을 자주 하셨고, 마무리할 순간이 다가오면 주어진 정보를 최대한 활용하여 거침없는 결정을 내려 주셨습니다.


명확한 판단에서 비롯된 빠른 '결정' 그리고 결과에 대한 '책임'이라는 교과서적인 리더의 덕목. 말로는 흔하지만 실제로는 뵙기 힘든 리더라는 무거운 타이틀에 걸맞은 분이었기에 더 높은 곳으로 오르신 뒤 한번 더 뵙기를 기대하고 있습니다. 물론 그때는 직접 뵙기가 무척 힘들지도 모르겠지만요.






십여 년 전, 아내와 결혼한 이듬해 엄마는 저를 부르시고는 깜짝 발언을 하셨습니다. 앞으로 명절에는 가족들이 모여 함께 미사에 참석한 후 외식을 하는 것으로 제사를 대신하자는 말씀이었습니다. 처음 그 말씀을 듣고는 마음이 불편했습니다. 사실 아무리 간소화한다 해도 제사 음식 준비와 뒷정리에 투입되는 시간과 노력이 기쁨보다는 부담의 영역에 가깝기에 현실적으로는 솔깃한 제안이었음이 분명했지만, 유교 문화의 가장 강력한 덕목 중 하나인 '조상님 뵐 면목'이 없어질까 두려웠던 것도 사실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런 제 고민을 충분히 예상했다는 듯 엄마의 말씀은 명확했습니다.


"앞으로 제사를 생략했으면 하는 생각이다. 그렇게 하도록 하자."


이렇듯 '협의'가 아닌 결정 사항에 대한 '통보'라 방점을 찍어주셨고, 결국 뜻하신 대로 이듬해부터 제사를 지내지 않았습니다.


처음 몇 년 간은 마음 한 편 불편함이 남아있었지만 시간이 조금 지나자 새로운 상황에 금세 적응되었습니다. 엄마의 바람대로 긴 명절 기간 온 가족의 몸과 마음이 모두 편해진 것 같아 감사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조금 더 지나자, 저와 아내처럼 과연 엄마의 몸과 마음 역시 편해지신 것일지 의문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사실 며느리를 보신 뒤라 제사상 차리는 수고는 홀가분히 넘기실 수 있었을 테고, 그랬으면 '조상님 뵐 면목'도 유지할 수 있으니 마음 역시 편안하셨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스스로 총대를 메시고는 어려운 결정을 내리신 것은 돌이켜 생각해보니 전적으로 저희 부부, 특히 아내를 위한 배려의 마음에서 비롯되었던 것 같습니다. 명절이 돌아올 때마다 한 번도 뵙지 못한 시댁 어른들에 위한 제사 음식을 차리는 수고 대신, 오늘의 화목함에 충실하라는 뜻에서 그런 결정을 내려주신 게 아닌가 생각이 듭니다.


명절은 고통이 아닌 즐거운 휴식, 재충전의 시간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 엄마는 그것을 실제로 가능하게 해 주셨습니다. 더욱이 본인의 결정임을 강조하시며 조상님에 대한 송구스러운 마음까지 몸소 떠안으셨습니다. 제가 인지하지 못하는 사이, 그렇게 엄마는 우리 가족의 리더 역할을 훌륭히 수행하고 계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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