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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r Gray Feb 03. 2020

59. 아침에는 반찬을 만드는 것이 좋다

(Week 33) 메추리알 장조림의 소확성


오늘의 반찬.

온 가족이 좋아하는 메추리알 장조림이다.


우선 두 개의 냄비에 물을 올린다. 하나는 메추리알 삶기, 다른 하나는 멸치 국물내기 용이다. 맹물에 조려내도 되지만 멸치 국물에 조릴 경우 감칠맛이 더해진다. 시간이 갈수록 점점 너덜너덜해지는 멸치를 보고 있자니 하얗게 불태우던 직장생활이 떠오른다. 오늘 이 반찬, 반드시 맛있어야 하는 이유이다.



한쪽 냄비에서 메추리알이 적당히 익고 나면 음악을 들으며 껍질을 까기 시작한다. 천천히, 느긋하게. 인생의 모든 순간이 꼭 속도전일 필요는 없다. 큼지막한 달걀과는 달리 메추리알은 알이 작고 연약해 조금만 서둘러도 상처 나기 십상이다. 조급하게 마무리하기보다는 노래 한 곡 더 듣는다는 마음으로 느긋하게, 온 신경을 손 끝에 집중해 동그란 모양을 유지해 나가는 것이 중요하다. 그럼에도 어쩔 수 없이 상처가 큰 녀석은 입에 넣으면 그만. 아직 온기가 가시지 않은 삶은 메추리알은 달걀보다 몇 배나 더 맛이 좋으니, 잘 깠던 못 깠던 꽃놀이패다. 그 맛에 취해 하나 더 먹고픈 마음이 간절하지만, 훗날을 위해 아껴두는 절제의 미덕이 필요한 시점이다.


비릿한 멸치 국물에 간장과 요리당으로 기본 간을 해준 뒤 메추리알과 통마늘, 그리고 빠질 수 없는 또 하나의 필수 재료를 투입한다. 바로 자글자글 못난 얼굴의 꽈리고추다. 조금 초라한 외모와는 달리 정상급 감초 역할을 해주니, 그저 재미없게 짭조름해지기 쉬운 장조림 국물을 마성의 소스로 변모시켜준다. 배우 이정은 씨가 없는 동백이를, 라미란 씨가 없는 응팔을 상상하기 어렵듯 꽈리고추 없는 장조림 국물은 그저 걸쭉한 간장물에 불과하다.



모든 재료를 한 데 모아 넣으면 이제 남은 건 열(熱)과 시간의 일. 느긋한 마음으로 늦은 아침식사를 하는 동안 냄비 속 경이로운 조화를 기대해본다.


아침 7시 반 물 끓이기를 시작으로 충분히 조려 내기까지 걸리는 시간은 한 시간 반 가량. 며칠을 두고 먹을 훌륭한 밑반찬 하나가 완성되었다. 게으른 누군가는 이제 막 하루를 시작할 시간에 이미 하나의 작품을 완성해 저녁상에 내놓을 생각을 하니 그저 뿌듯할 따름이다.


작지만 확실한 성취.

이제 조금은 편안해진 마음으로 두 번째 하루를 시작한다.






살다 보면 거창한 목표를 세운 뒤 기분 좋게 도전했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성과에 좌절할 때가 있다. 시작이 반이라는 격언을 믿고 덤벼 들었건만, 나머지 반을 채우는 일이 결코 녹록지만은 않다는 사실을 간과한 탓이다. 절반은 호기롭게 해냈다지만 까마득한 나머지 절반에 압도되어 지쳐버리기 일쑤다. 경쾌했던 첫걸음과 달리 나머지 아흔아홉 걸음은 그저 끝없이 펼쳐진 가시밭길을 걸어야 하는 일일지 모른다.


그런 마음이 드는 날이면 좌절하는 대신

작은 성취를 느낄 수 있도록

아침 일찍 반찬을 만드는 것이 좋다.


메추리알을 삶아도 좋고, 깻잎이나 무, 콩나물을 무쳐도 좋다. 정 재료가 마땅치 않을 경우에는 냉동실 한쪽 구석에서 누군가의 손길을 기다려온 오래된 어묵을 몇 장 꺼내 조려내도 좋다. 몇십 분이 채 걸리지 않는 작은 수고로움의 끝날 무렵엔 하나의 완성품이 나를 마주한다. 그 정도면 훌륭하다며 어깨를 토닥여준다.


작은 성취라고 해도 그 무게마저 가벼운 것은 결코 아니다. 제 아무리 잘 구운 스테이크라도 두세 점 연달아 입에 넣으면 쉽게 물리기 십상이다. 선홍빛 큼직한 연어구이가 화려한 자태를 뽐내며 식탁의 정중앙을 차지할 수 있을지는 몰라도, 마찬가지로 아무리 맛이 있다 한들 몇 점 먹으면 입 안에 느끼한 기운이 감돌아 개운한 무언가를 찾지 않을 도리가 없다. 그런 순간엔 지체 없이 아침 일찍 만들어 둔 메추리알 장조림, 엊그제 무쳐둔 깻잎이나 어묵 조림 따위로 젓가락이 향한다.


주연과 조연의 감미로운 조화.

비로소 훌륭한 식사를 이어갈 수 있으니, 시너지라는 말은 이럴 때 쓰라고 만들었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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