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ek 33) 혐오 바이러스
지난여름 미국 생활의 시작과 함께 중고 캠리를 구매하였다. 반일감정 고조로 'No Japan' 운동이 한창이었던 터라 많이 망설여졌지만, 2년 뒤 차를 되팔 생각이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감가가 적은 일본차는 버리기 힘든 선택지였다. 더욱이 미국이라는 새로운 커뮤니티에 새로 진입한 이방인의 입장에서 잔고장이 없기로 유명한 일본차에 대한 선호도가 높은 것 또한 사실이었다. 자동차 없이는 생활이 불가능한 이 낯선 땅에서 차 문제로 골머리를 앓고 싶지는 않았기 때문이었다.
하루는 아이의 하굣길에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던 중 차에 대한 얘기가 나왔다. 현대, 기아가 아닌 토요다의 앰블런이 생소해 보였는지 아이는 이 차가 어느 나라 차인지 물었다. 당황한 나는 토요다가 일본차라는 사실과 함께, 부득이하게 일본차를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변명처럼 늘어놓고는 끝에 한마디 덧붙였다. 우리 가족 역시 앞으로는 'No Japan' 운동에 동참하여 일본 제품은 사지 말자고. 그러자 아이는 당황한 표정으로 두리번거리며 말했다. 주위에 일본인 친구가 있을지도 모르는데, 영어 단어인 'No Japan'을 크게 말하면 듣고 기분이 나쁠 수 있으니 조심하라는 말이었다.
아차 싶었다.
아이가 배정받은 학급에는 나타로라는 일본인 친구가 있었는데, 아마도 그 친구를 생각한 것 같다. 몇 권의 역사 서적을 읽어 일제의 만행부터 지속되는 독도 분쟁까지 어느 정도 알고 있는 아이지만, 그렇다고 새로 사귄 친구 면전에 '나는 너희 나라가 싫어!'라고 말하는 일은 없어야 한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일본이라는 나라, 그리고 일본인이라는 커다란 테두리 안에서 'No Japan'을 야기한 정치인들과 새로 사귄 나타로라는 친구 사이에는 일본인이라는 공통점 외에는 어떤 상관도 없을지 모른다는 생각. 그렇기에 조심스러운 언행이 필요하다는 점을 열 살 어린아이는 이해했지만, 나는 그것을 놓치고 말았다.
중국 우한에서 시작되어 전 세계로 퍼져 나가는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에 우려가 커지고 있다. 중국과는 지리적으로도, 경제 사회 문화 역사적으로도 가까운 우리나라 역시 그 영향에서 자유롭지 못해 확진자의 수가 꾸준히 증가하는 한편 우한시에서 수송해올 교민 수용 여부에 대한 잡음 역시 커지고 있다. 동포애로 똘똘 뭉쳐 환영한다는 입장도 있는 반면, 절대 수용할 수 없다며 도로를 점거하는 등 결사항전을 벌여야 한다는 목소리도 들린다. 급기야 교민을 수송해 온다는 기사에 '거기서 죽어, 그게 애국이다'라는 댓글이 등장하기에 이르니 신종 바이러스는 우리 사회의 민낯 또한 적나라하게 드러내려는 모양새다. 공동체가 신음하는 소리가 들려온다.
공동체(共同體). 개인적으로는 어릴 적 배운 '더불어 사는 세상'이라는 의미가 가장 그럴듯해 보이지만, 조금 딱딱한 사전적 의미로 '생활이나 행동 또는 목적 따위를 같이하는 집단'이라고 한다. 영어로는 'Community'로 옮길 수 있으며 이는 라틴계열의 단어로 그 어원은 '함께 공유한다(shared in common)'는 뜻의 'Communis'라고 한다. 이 아름다운 단어의 전면에 '같음'이 있기에, 그 뒤편엔 필연적으로 '다름'이 자리 잡고 있다.
하나의 큰 테두리를 그린 뒤 그 안에서 들어온 사람들 간에는 안락함을 느끼지만, 그 바깥에 존재하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배타적일뿐더러 때로는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적대감을 드러내니 공동체라는 말은 포용과 배척의 성질을 동시에 지니고 있다. 만약 과거 어느 날 우한을 여행하던 중 우연히 만났다면 믿고 의지했을지 모를 우리의 한인 동포지만, 잠재적인 바이러스 보균자라는 새로운 구분자가 생겨나자 기존 공동체 안에 또 다른 선이 하나 그어지고, 그 결과 공동체의 균열이 시작된다.
불안정한 사회적 분위기 속에 기본적인 의식주에 대한 위기감이 고조될수록 공동체 안의 생존 본능은 더 많은 새로운 선을 그어댈 것이고, 그럴수록 기존 공동체는 더욱 세분화되어 다름에서 비롯된 혐오의 씨앗이 자라날 토양이 될 것이다. 하루가 멀다 하고 등장하는 혐오의 말들은 마치 그 시작을 경고하는 알림 소리처럼 음산하기만 하다.
소수에 불과했으면 하는 바람이지만, 일부 식당에서 '중국인 출입 금지'라 써붙였다고 하니 이는 어렵지 않게 '유대인과 개는 출입금지'라는 안내문이 등장한 로베르토 베니니 감독의 영화 '인생은 아름다워'를 떠올리게 한다. 당시 사회 분위기를 적나라하게 묘사한 이 영화에서 왜 유대인과 개는 출입이 안되냐는 아들 조슈아의 질문에 대한 아빠 귀도의 재치 있는 답변이 인상적이다.
"왜 저 가게는 유태인과 개를 못 들어가게 해요?"
"저 사람은 개와 유태인이 들어오는걸 별로 좋아하지 않아. 모든 사람들은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하는 거야. 저기 있는 철물점을 보렴, 저 사람들은 스페인인과 말을 싫어해. 저기 약국이 있지? 어제 캥거루를 가지고 있는 친구와 저곳에 들어가려고 하니 안된다고 하는 거야. 중국사람하고 캥거루는 못 들어온다고 말이야. 사람들이 어떤 것을 좋아하지 않는 것에 대해 내가 뭐라고 말을 해야겠니?"
"우리는 아무나 우리 가게에 들어오게 하잖아요."
"아냐, 이제부터 우리도 써붙일 거야. 싫어하는 게 있니?"
"거미요, 아빠는요?"
"난 고트인이 싫어. 그럼 내일부터 그렇게 써서 붙이자, 거미와 고트인은 출입 금지. 난 고트인이 정말 싫어."
혐오와 광기의 시대.
귀도는 자신들이 혐오의 대상이라는 가혹한 현실을 아들에게 차마 전달할 수 없었나 보다.
안타깝게도, 역사는 반복된다는 격언처럼 혐오와 광기의 역사 또한 끊임없이 고개를 기웃거린다. 영국 프리미어 리그에서 정상급 활약을 펼치고 있는 손흥민 선수조차 기침 몇 번 했다는 이유로 혐오의 눈길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마당에, 이(Lee 혹은 Li)씨 성을 가졌다는 이유만으로 식당 예약을 거부당하는 일이 생기지 말라는 법이 있을까? 상상조차 하고 싶지 않지만, 만약 학교에서 돌아온 아이가 다른 학생으로부터 이 나라를 떠나라는 말을 들었다며 그 이유를 묻는다면, 우리는 과연 귀도처럼 답할 수 있을까? 재치를 떠나, 과연 답할 자격은 있는 것일까?
이미 한국 사회에는 혐오의 말들이 넘쳐난다. 김치녀, 한남, 급식충, 틀딱, 애자, 수꼴, 좌빨 등 잠깐만 생각해 봐도 일일이 열거하기 어려울 지경이다. 그 대상은 남녀노소를 비롯해 전 인류로 뻗어나가고 있으니, 거미줄처럼 촘촘해야 할 공동체의 안전망 대신 그 누구도 자유로울 수 없는 혐오의 말들이 그물처럼 얽혀가고 있다. 타인을 대하는 그 방식대로 나 또한 대접받을 것이라는 인간관계의 기본. 그 기본이 무너질 때 어떤 결과가 초래되었는지 어디선가 본 듯 하기에, 그게 너무 무섭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