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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닥터 부메랑 Aug 20. 2021

외로움에 잠식되어 가는 내담자

문제 뒤에 숨겨졌던 진짜 문제를 보다

 겨울이 한 참 진행되고 코로나로 전에 없던 상황을 일 년 여간 보냈던 2020년이 얼마 남겨지지 않았던 작년 12월의 어느 날 아침으로 기억한다.


 아침에 일어나니 왠지 평소보다 일찍 일어나서인지 창밖이 새까맣게 보였다. 빈속이었지만 왠지 차가운 겨울바람이 느껴졌고 유난히 어두운 새벽녘이 을씨년스럽게 느껴져서 부엌으로 가서 믹스커피를 한 잔 마셨다.  밤에 무슨 악몽을 꾼 것도 아닌데 몸이 으슬으슬했고 그렇게 좋지 않은 컨디션으로 하루를 시작한 것이 뭔가 아쉽게 느껴졌던 것 같다.  



이 날은 아침부터 유난히 바빴다. 서류 정리와 여기저기 보내야 할 편지와 서류를 정리하고, 줌으로 아침 미팅을 하고, 쓰레기를 정리해서 쓰레기를 수거하러 오는 분들이 쓰레기 통을 비울 수 있도록 집 앞에 쓰레기 통을 내놓고서야 출근을 할 수 있었다. 사무실로 출근하는 도중에 추적추적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뜨거운 오렌지색 태양과 야자수에 일 년 내내 익숙한 캘리포니아에서는 겨울에 비교적 비가 자주 오는데, 일단 비가 오면 무척이나 스산하다. 우산도 없어서 주차장에서 사무실까지 비를 맞으며 와야 했다.


사무실에 와서 젖은 머리와 옷을 손으로 툭툭 털어냈다. 수건을 찾다가 응접실에 보니 비서가 가져다 놓은 도넛과 방금 내린 뜨거운 드립 커피가 선반 위에서 김을 모락모락 내며 그윽한 향을 내뿜고 있었다. 자리에 앉아 설탕이 잔뜩 뿌려진 도넛을 한 입 먹고 뜨거운 블랙커피를 한 모금 마시니 분주하고 심란했던 마음이 순식간에 안정되었다.



스마트폰을 보니 누군가에게 이메일이 와 있었다.


"저 LA XXX 지역에 거주 중인 사람인데 상담을 받을 수 있을까요?"


아주 짧은 내용이었지만, 뭔가 다급함이 느껴졌다. 가급적이면 간단한 본인 소개와 연락처, 그리고 무슨 문제인지를 알려주면 좋겠다는 답장을 보냈다. 답장을 보내고 손에 들고 있던 도넛을 다 먹고 커피 잔을 들고일어나려던 순간 이메일이 새로 도착했다는 것을 알려주는 알람음이 들렸다.


"저는 53세 여성이고, 이름은 XXX라고 합니다. 제 핸드폰 번호는 XXX-XXX-XXXX에요"


오전 10시에 예약된 상담이 끝나자마자 그 여성에게 전화를 했다. 그리고 그 이후로 그 분과 상담사와 내담자로서의 관계가 시작되었다.


53세 미혼 여성인 그녀는 코로나가 시작된 이후로 급격히 불안해졌고, 공황장애 증상이 심해져서 제대로 된 생활을 하기 어렵다고 호소했다. 그렇게 상담을 시작하며 해가 바뀌어 2021년이 되었고, 그녀와 상담을 하며 이야기를 듣다 보니 어린 시절 겪은 트라우마적인 경험이 양적으로나 질적으로나 어마어마했다. 그리고 20대 때 미국에 와서 성실히 살면서 나름대로 안정적인 직업을 갔게 된 그녀가 존경스럽기도 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왠지 안쓰럽기도 했다. 바쁘고 치열하게 살다 보니 시간이 휙휙 가버렸고, 그녀는 혼기를 놓쳤다고 했다. 평소에는 혼자 지내는 것이 어렵지 않았는데, 코로나가 1년 넘게 지속되고 생활 패턴이 바뀌면서 우울증과 공황장애 증상이 심해져서 이럴 때는, 특히 밤에는, 누가 함께 있었으면 하는 마음이 강하게 든다고 자주 말했다. 그래서 같은 교회에 출석하는 친한 여성분을 가끔 집에 초대했고, 그분들이 동의하는 경우에는 집에서 자고 가도록 권면하기도 했다.


겉으로 보면 강해 보이지만, 속은 여린 소녀가 아직 그대로 있는 것 같은 그녀의 케이스는 쉬운 케이스가 아니었다. 이야기를 들을수록 비극적인 경험과 슬픈 사연이 계속 쏟아져 나왔고, 나로서도 그녀를 이해했다고 생각해서 세워놨던 초반의 치료 계획 (Treatment Plan)을 이후에 여러 번 다시 수정해야만 했다.


초반에는 폭포수처럼 격앙된 톤으로 내뱉어져 나오는 그녀의 이야기와 감정, 생각 등을 온전히 듣는 데에만 시간을 할애했다. 가끔은 상담사인 나에게 히스테리컬 한 반응을 보이며 본인의 상처와 마음의 얼룩을 투영하기도 했다. 그러나, 점차 그녀와 나 사이에는 내담자와 상담사로서의 신뢰관계가 아주 조금씩 생기고 있었다. 그런 관계를 바탕으로 해서 나는 그녀가 걸어가도록 했고, 나는 그 뒤에 세 발자국 뒤에서 그녀와 동행하는 관계로 상담을 이어갔다.


심리적인 부분에서의 문제만 있었다면 모르겠지만, 그녀는 등과 허리, 목 등에도 통증과 질환이 있었다. 그래서 나와의 심리상담 이외에도 다른 전문가들과의 예약 스케줄이 그녀의 수첩에는 늘 빼곡히 적혀있었다. 심리적으로 불안정하고, 히스테리컬 해지는 경우도 있고, 뭔가 투박해 보이기도 하는 그녀였지만, 그녀의 이야기를 들을수록 그녀를 도와주고 싶다는 의지는 더욱 강하게 들었다.


그녀의 케이스를 다른 동료들과 회의 때 이야기 하며 컨설팅을 받기도 했고, 디렉터와의 면담 중에도 그녀의 케이스를 이야기하며 조언을 듣기도 했다. 그리고 나름대로 전문서적을 읽으며 그녀와 비슷한 증상이나 이력을 가진 내담자가 어떻게 효과적으로 치료를 받았는지에 대해서도 자료를 모았다.


그런 노력 때문이었는지 그녀의 증상도 올 봄부터 눈에 띄게 호전되었다. 가령, 밤에 무서워서 신경안정제를 먹어도 잠을 제대로 못 잤던 증상도 점차 개선되어 도중에 잠에서 깨는 일이 없이 아침까지 잠을 잘 수 있게 되었고, 그 동안은 불안함때문에 혼자 운전을 못했는데 이제 혼자 운전도 불안함을 느끼지 않고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런 개선과 변화에 대해 나도 그녀만큼이나 보람과 기쁨을 느꼈다.


날씨가 점차 더워지며 계절이 여름으로 바뀌어 가려던 지난 5월 말이었다. 이제 그녀의 케이스는 비교적 안정권에 접어들었다고 판단했고, 그녀의 트라우마에 대한 치료로 상담의 치료계획을 집중하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 동안 생긴 긍정적인 변화와 개선 때문에, 그녀와 나도 서로를 조금씩 더 신뢰하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인가 예상치 못한 일들이 계속 생겼다. 이전에는 한 번도 그런 적이 없었는데, 그녀가 점차 상담 예약을 상담 시간 직전에 취소하는 일이 빈번해진 것이다. 처음에 한두 번이야 그럴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는데, 이런 일이 5번 이상 연속으로 발생하니 왜 그녀가 그러는 것인지 궁금하기도 했고, 걱정도 되었다. 그런데 문제는 그녀와 이제 전화로도 연락이 되지 않기 시작한 것이다. 그렇게 약 2달 정도 그녀와의 연락이 두절되었고, 당연히 상담도 2달 동안 하지 못하게 되었다.


다른 일로 바쁘게 지내던 어느 날 그녀에게 전화가 왔고, 그녀는 당일 밤 나와 상담을 하고 싶다고 요청했다. 시간도 있었고, 무엇보다 그녀의 상황이 궁금해서 늦은 밤 퇴근도 하지 않은 채로 그녀와의 상담을 위해 사무실에서 그녀를 기다렸다. 예약된 시간보다 약 5분 늦게 나타난 그녀는 왠지 다른 사람처럼 느껴졌다. 체중도 조금 빠진 것처럼 보였고, 옷차림도 뭔가가 달랐고, 무엇보다 눈빛이 달라져 있었다.


자리에 앉은 그녀는 어색하게 웃으며 안부를 물었다. 그리고 그동안 자신에게 어떤 일이 있었는지 자세히 말했다. 예전부터 그녀의 케이스는 까면 깔수록 새로운 것이 나오는 케이스라는 것을 느끼고 있었지만, 이날 내가 들은 말은 나를 마치 망치로 한 대 맞은 듯 멍하게 만드는 그런 것이었다. 그녀는 봄부터 공황장애 증상이 호전되었다. 그리그 그 덕분에 그녀는 예전처럼 자유롭고 편하게 운전도 하고 원하는 곳을 다닐 수 있게 되었다. 그것은 좋은 일이었지만, 동시에 문제가 되었다. 내게는 한 번도 말하지 않았지만, 사실 그녀는 도박중독자였다. 코로나가 터지기 전에 그녀는 주말만 되면 인근 카지노에 가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도박을 하고 결국 돈이 다 떨어진 뒤에야 집에 오곤 했다고 한다. 도박을 끊고자 본인도 많은 노력을 했는데, 결국 끊지 못했고, 그렇게 시간과 돈을 계속 허비해 가면서 외로움과 순간의 쾌락을 맞바꾸며 지난 몇 년을 지내왔다.



코로나 상황이 시작되면서 그녀는 공황장애와 우울증이 시작되어 운전도 못하고 꼼짝없이 집에 머물게 되었다. 그래서 도박장도 지난 1년여간을 못 가게 된 것인데, 이것은 어떤 의미에서 극적인 도박 치료의 시작이 되기도 했다. 그러나, 도박을 강제로 못하게 된 결과 그녀의 몸과 마음에는 일종의 금단증상이 발생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녀의 공황장애 증상은 다른 공황장애 증상과 조금 다른 면이 있었는데, 아마도 그녀의 공황장애 증상은 공황장애 증상과 우울증, 그리고 도박중단으로 온 금단현상과 결부된 종합적인 성격의 그런 증상들이 아니었나 싶다. 예를 들어 그녀는 책을 집중해서 읽지 못하겠다고 했고, 노래를 집중해서 부르기도 어렵다고 했다. 이런 증상들은 공황장애 환우들이 흔히 말하는 그런 증상과는 거리가 멀다.


그녀는 지난봄부터 도박장에 다시 가기 시작했다. 그래서 돈이 없었다. 그렇다보니 상담비로 낼 돈이 없어서 상담을 매번 취소했던 것이다. 그녀가 허탈하고 슬픈 눈으로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것을 듣다 보니 나도 그녀처럼 허탈하고 슬픈 마음이 되어버렸다. 왠지 지난 몇 달간의 노력이 헛수고를 한 듯한 느낌이 들기도 했다.


그녀에게 앞으로 어떻게 할 것인지 물어봤다. 그녀는 자신도 모르겠다고 했다.


그녀와 상담을 마치고 집에 오는 길에 나의 마음은 무척이나 무겁고 심란해졌다. 무엇보다도 그녀가 굉장히 걱정되었다. 나는 도박중독전문가는 아니지만, 내가 알기로 도박중독은 다른 중독보다 치명적인 점이 많다. 일단, 돈이 결부되어 자칫 잘못하면 경제적으로 파탄이 날 수도 있고, 배우자를 둔 사람의 경우 배우자와의 육체적/정신적인 관계에도 굉장히 소홀해진다. 불안의 반대말이 자신감인 것처럼, 중독의 반대말은 사람들과의 좋은 관계라는 말이 있다. 그녀는 사람들과의 관계에 목말라 있었다. 그래서 우린 그런 부분에 대해서도 많은 대화를 나누었다. 관계와 자존감의 부재 속에 그녀는 외로웠고, 자신을 달래주는 도박장의 요란한 불빛과 소리를 자신의 벗으로 택했다. 그런 상황에 되새기며 나는 그녀에 대해 아쉬움을 넘어 탄식하는 내 모습도 본다.


다음 날 나는 이 케이스의 현 상황을 디렉터에게 보고했다. 상황을 들은 디렉터도 난감한지 한참 동안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다. 그리고 무겁게 입을 열고 내게 말했다.


"우리 상담소는 도박 중독 전문 상담소가 아닙니다. 물론 내담자를 계속 케어 하고 싶어 하시겠지만, 윤리적인 차원에서 볼 때 우리의 전문성 범주를 벗어나는 케이스니까 빨리 도박중독전문가에게 그녀를 Refer 하세요. 이런 상황에서 도박중독 전문가가 아닌 우리들이 그녀를 붙잡고 우리가 알고 있는 지식과 경험으로만 그녀에게 뭔가를 할 수 있다고, 변화를 할 수 있다고 하는 것에도 제한점이 있어요"


내가 예상하던 대로 디렉터는 답했다.


나 역시 마음이 무거웠지만 그녀에게 전화를 해서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어쩔 수 없이 현재 최선은 당신을 도박중독전문가에게 맡기는 것이라고 담담하게 말했다. 그녀는 처음에 그런 말을 듣고서 무서워하기도 하고 자신을 버리는 것이냐며 흥분하기도 했는데, 그 이유를 천천히 여러 번 설명하는 나의 말을 듣고서, 본인도 자신의 상황을 조금 객관적으로 이해한 것인지 알겠다고 하고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 그다음 날 그녀에게 문자가 왔다.

"도박중독전문가를 찾았어요. 그동안 고마웠어요"


이번 케이스는 매우 특이하고 복잡한 케이스였다. 나는 사실 도박에 대한 부분을 제외하고 내가 그녀를 도울 수 있는 부분이 분명히 있다고 생각한다. 트라우마 치료, 공황장애 치료, 우울증 치료 등 그런 부분에 대한 것들 말이다. 그리고 이렇게 그녀와 내담자와 상담사로서의 관계를 정리하는 것이 뭔가 차갑게 느껴지기도 해서 마음이 심란하고 허탈하다. 하지만, 이럴 때 조금 더 냉정해야 한다. 그녀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이고 가장 중요한 변화가 무엇인지를 생각해 본다면 이런 처사는 어떻게 보면 필요한 처사였고 적절한 선택이었다.


집으로 오는 길에 고속도로 옆에 평소에 눈에 안 띄던 커다란 카지노 광고판들이 눈에 들어왔다. 그녀가 잘 회복될 수 있을지 걱정도 되고 왠지 미안한 마음도 들었다. 어릴 적부터 주변 사람과 사회로부터 어찌 보면 좋지 않은 대우를 받고 따뜻한 사랑과 관심을 충분히 받지 못하고 자란 그녀에게 카지노도 그녀를 그렇게 대우한 느낌이 들었다.


보이지 않는 착취와 억압, 세뇌로 사람을 유혹하고 힘들게 하는 세상이다. 이런 세상에서 나는 외로운 바다를 힘들게 항해하는 사람들에게 작은 위로의 빛이 되는 등대지기가 되고자 상담사가 되었다. 오늘은 왠지 퇴근길 하늘 위에 떠 있는 별을 보며 내가 상담사로서 내 역할을 제대로 하고 있는지 의문이 들었다. 그리고 사람들에게 더 큰 도움을 주는 상담사가 되려면 어떤 상담사, 더 나아가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하는지도 자뭇 궁금해졌다.


마음이 무겁게 느껴지는 밤이다.

그녀의 건강과 행복을 기원한다.

우리 언젠가 꼭 다시 만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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