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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닥터 부메랑 Oct 17. 2023

내담자의 내면 충족: 빗나가는 화살처럼

내담자에게 더욱 절실하게 필요한 것들을 찾아서

2023년 봄이 시작되고 야구시즌을 준비하며 선수들이 한참 시범경기를 연일 진행하던 어느 날이었다. 아직 캘리포니아는 3월 말이었는데도 날씨가 추웠고 무척 흐렸으며 비가 자주 왔다. 그래서 시범경기에서 타석에 들어선 타자들과 마운드에 서있는 투수들의 모습이 매우 어색하고 낯설게 느껴졌다. 계절적으로는 아직 때가 되지 않았는데 야구를 너무 하고 싶어서 선수들이 야구장에 나와서 플레이를 하는 느낌마저 들기도 했다. 



퇴근 후 거실에 앉아서 그런 그들의 시범경기 하이라이트를 TV로 보며 땅콩과자를 먹고 있었다. 밖에서는 살짝 비가 내리고 있었고 바람도 제법 거세게 불었다. 그런 분위기에서 긴장이 풀리고 하루를 보낸 피곤함까지 더해져서 그런지 나는 결국 살짝 졸았다. 그러다가 나는 어느새 깊이 잠이 들어서 고개를 숙인 채 꾸벅꾸벅 졸고 있었던 것 같다. 한 참을 졸던 나는 문자가 오는 소리에 잠에서 깼다. 



문자 내용은 내게 새로운 내담자가 배정되었으니 빨리 내담자에게 연락해서 접수 상담 (Intake Session) 날짜를 정해서 사무실 매니저에게 알려달라는 것이었다. 땅콩 과자를 한 움큼 잡아서 입에 넣고 씹었다. TV에서는 지고 있던 팀의 타자가 투런 홈런을 터트려서 동료들이 함께 기뻐하는 장면이 나오고 있었다. 순간적으로 입에서는 고소하고 짭조름하고 달콤한 맛이 절묘하게 섞여져서 느껴졌고, 눈으로 보는 홈런 장면은 나름 흐뭇한 느낌을 느끼게 해 주어서 전반적으로 만족스러운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순간적으로 잠기운이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 나는 곧바로 예비 내담자에게 연락을 해서 두 주 후의 수요일 저녁 7시에 그녀와 만나기로 시간을 맞추면서 접수 상담예약을 했다.  


이후 바쁜 일정 속에 약 두 주 남짓 정도의 시간이 휘리릭 가버렸다. 수요일은 오후에 스탭 미팅도 있고 동료와의 컨설팅 미팅도 있어서 바쁜 날에 속한다. 늦은 점심으로 인근 식당에서 파스타를 먹고서는 저녁을 먹지 못해서 조금 배가 고팠다. 텅 빈 사무실에서 시계를 바라보며 그녀를 기다렸다. 내가 그녀에 대해 알고 있는 기본 정보는 50대 한국인 1세대 여성이고, 전문직을 가진 사람으로서, 결혼 후 지금까지 캘리포니아에 거주하고 있다는 것이 현재로서는 전부였다. 약속된 7시가 넘어서 7시 5분이 되었을 때 노크소리와 함께 정장 차림의 내담자가 가벼운 미소를 띠며 들어왔다. 오는 길에 차가 생각보다 많이 막혀서 늦었다며 미안해했다. 나는 재차 괜찮다고 말하며 내담자를 안심시키고 물을 한 잔 따라주었다. 60분 동안의 접수 상담은 기본적으로 내담자의 기본정보 (인적사항, 교육 배경 및 이력, 사회 경력 정보, 종교, 가족 정보, 상담 목적 등) 수집을 목적으로 한다. 어찌 보면 행정적이고  단순한 성격의 세션으로 보일 수 있으나 상담사는 이 첫 세션을 통해 단순한 정보들뿐만 아니라 그 사람에 대한 많은 것을 추가적으로 파악하게 된다. 예를 들어 정서적인 안정성, 인지 기능성, 옷차림을 통한 유추, 말투/말속도, 표정, 위생 상태, 몸체형/몸무게 등을 통해 그 사람이 언어적으로 표현하지 않은 다른 부분들을 비언어적인 요소들로도 그 사람의 정신건강상태를 점검하게 된다. 내가 이 내담자에게 한 시간 동안의 세션을 통해 느낀 것은 첫째, 매우 똑똑하다, 둘째, 사고방식이나 센스가 매우 젊다, 그리고 셋째, 예의가 무척 바르다는 것이었다. 그녀는 이런 장점들을 기반으로 자신의 커리어를 유지하고 키우며 성공한 여성으로 불릴 수 있는 사회적 위치까지 온 느낌이 들었다. 그래서 첫 세션은 무척 수월하고 신속하게 진행되었다. 내가 질문을 하면 그녀는 마치 그 질문을 미리 읽고 준비해 온 사람처럼 청산유수로 답변했다. 



그 이후 그녀와 매주 한 번씩 만나며 상담 세션을 진행했다. 그녀는 상담에 대해 무척 동기부여가 되어 있었고, 호기심이 많고 집중력이 강했다. 그래서 나도 그 내담자와 세션을 하는 중에는 덩달아서 집중력이 더 높아지게 되는 나 자신을 보게 되기도 했다. 그녀의 상담목적은 "분노"와 "우울함"을 완화하고 삶을 조금 더 기쁘게 살고자 하는 것이었다. 겉보기에는 성공한 커리어 우먼으로서 표정도 당차 보이고 화려해 보이기도 했지만, 그녀는 어느 순간부터 자신의 내면의 갈증이 채워지지 않은 채 몇 년을 버텨왔고 이대로 가다가는 내면에 더 큰 병이 생길 것이라고 예상해서 상담소를 찾은 것이었다. 내담자는 약 1년 전부터 항우울제를 복용하고 있었다. 초반에는 어느 정도 효과가 있었지만 점차 약의 복용량이 늘어났는데 오히려 그 효과가 떨어지는 것 같았고, 내담자는 계속 그 약을 먹는 것이 몸에도 별로 좋지 않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약을 계속 먹어야 할지 고민이라고 말했다. 


다행히도 내담자는 나를 신뢰했고, 나와 상담하며 자신의 이야기를 자유롭고 편안한 분위기에서 쏟아내는 것을 좋아했다. 처음에는 내가 질문을 하거나 상담을 가이드하면서 그녀가 말을 하도록 보조했지만, 어느 순간부터는 내가 말을 중간에 한 두 마디만 해도 그녀는 실타래처럼 계속 말을 쏟아내었다. 그래서 현재 나는 그녀의 어린 시절의 경험들, 힘들었던 순간들, 성향, 인지 패턴, 그리고 현재의 고민들을 많은 부분에서 파악하게 되었다. 그런 내담자의 이야기를 듣다 보니 '이 분은 참 대단한 삶을 각고의 인내와 의지력으로 버티며 살아오셨구나'라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그런 내담자를 돕고자 우리는 많은 것들을 시도했다. 인지행동치료(CBT)와 IFS (내면가족체계 치료)를 중심으로 그녀가 사람들과 더 긴밀한 관계를 맺으며 지지적 효과를 얻을 수 있는 만남을 자주 갖도록 권면했고, 일에 너무 몰입하기보다 종종 자신만의 쉬는 시간을 갖도록 Self-Care를 자주 하도록 제안했으며, 남편과 아이들과의 관계에서도 적절한 바운더리를 갖기를 생각해 보도록 권유했다. 이 외에도 정말 많은 치료법들과 아이디어들을 적용해 보고자 부단히도 노력했다. 그 때마다 그녀는 그런 것들을 처음 생각해 봤다고 하면서 놀라기도 했고, 고마워하기도 하고, 호기심을 보이기도 했다. 그런 과정들을 통해 그녀도 차츰 회복과 변화를 향해 천천히 나가고 있다는 느낌도 많이 들었다. 


하지만, 이 케이스는 생각보다 훨씬 복잡하고 쉽지 않은 케이스였다. 그런 상담 아이디어들과 치료 계획들은 효과가 있기는 했으나 매우 제한적으로 효과가 있는 느낌이었다. 게다가 그녀의 이야기를 듣다 보면 다뤄나가야 할 부분들이 점차 증가하고 서로 복잡하게 연관되어 있어서 그런 큰 문제적 상황에서 상담사인 나마저 압도되는 느낌도 들었다. 그래서 이 케이스를 두고 동료들과 회의를 통해 컨설팅을 받기도 했고, 나 또한 그녀와의 상담을 녹화한 영상들을 다시 돌려보며 고민을 해야 했다. 그동안 나와 내담자가 서로 노력하고 협동하며 시도한 것들은 분명 효과가 없는 것들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것들이 그다지 효과가 있는 느낌도 아니었다. 그것은 마치 화살로 비유하면 쏜 화살이 목표점의 정가운데를 맞추지 못한 채 과녁의 주변부분만 아주 겨우 맞히고 있는 그런 느낌이었다. 그렇게 상담사로서는 도전받는 느낌과 허탈감, 그리고 길을 잃은 듯한 느낌 속에서 그녀의 케이스를 다루며 매주 만나 마주해야 했다. 



그녀와는 매주 수요일 저녁 7시에 만났다. 그 날도 그저 그런 수요일이었던 것 같다. 약간의 긴장감과 궁금함, 그리고 상담사로서의 의욕을 갖고 시계와 그녀의 케이스 연구 노트를 번갈아 바라보며 그녀를 기다렸다. 답답한 마음에 잠시 눈을 감았다. 그 때도 마음 속에 그녀하면 떠오르는 이미지였던 양궁 과녁판이 떠올랐다. 과연 그녀에게 마음 속 과녁판의 정가운데 있는 그것은 무엇인가? 무엇이 그녀의 가장 필요한 내면 결핍이며 그것을 어떻게 서로 파악하고 그것을 채울 수 있게 도와줄 수 있을 것인가?



잠시 후 그녀가 노크를 하고 사무실로 들어왔다. 여느 때처럼 서로 간단한 말들을 주고 받고 안부를 확인하며 상담을 시작했다. 그녀의 말을 들으면서 한 편으로 나는 계속 양궁의 과녁판 이미지를 그녀의 얼굴과 마음에 오버랩시키며 생각했다. 상담사는 이렇게 내담자의 말을 들으면서 한 편으로는 생각을 해야 할 때가 많다. 그렇게 하면서 상담사는 집중력을 잃으면 안 되고 오히려 내담자와 서로 한 팀이 되어 협동하며 내담자의 내면을 계속 살펴야 한다. 이 날은 그 전 주 세션 때보다는 왠지 마음이 많이 편했다. 우연이었을까? 아니면 그 동안 축적된 상담 내용이 우리를 그곳으로 인도한 것일까? 세션중간에 우리는 이런 대화를 하게 되었다.


나: "그렇군요. 그러면 지난주에는 업무 스트레스에서 잠시 자유로워지기 위해서 무엇을 하셨나요?"

내담자: "바닷가에도 가고, 어떤 레스토랑에도 가고, 딸하고 인근 공원에도 가서 산보도 하고 그랬어요"

나: "도움이 되었나요?"

내담자: "네, 그런 것들이 도움은 되요... 하지만, 큰 도움은 아니에요"

나: "네, 큰 도움은 아니라는 말씀이군요... 내담자님은 지금까지 살아오시면서 가장 건강하고 행복했던 순간들이 언제였나요?"

내담자: "대학생 때, 그리고 첫 직장 생활 할 때에요"

나: "혹시 그 때 왜 그렇게 행복하고 건강할 수 있었다고 생각하세요?"

내담자: "매일 꿈이 있었고 열심히 살면서 인정받았고, 노력한 만큼 진전되는 게 있었으니까요"

나: "네, 그렇군요. 꿈, 인정, 그리고 노력에 따른 보상 (Reward)들이 있어서 행복했던 것인가요?"

내담자: "음... 네, 맞아요... 바로 그거 같아요 보상"

나: "네? 보상이란 말에 크게 반응하시는데, 왜 그러시는지 더 자세히 말씀해 주시겠어요?"

내담자: "네, 지금 생각해 보면 그 동안 나와 타인들, 그리고 어떤 일들과의 관계는 어느 순간부터 내가 노력하고 애쓰는 것만큼의 보상이 전혀 없거나 거의 없었어요. 보상이라는 단어로 그런 상황을 표현하는 것도 조금 어색하지만... 현재로서는 그 단어가 그래도 제일 적절한 단어 같아요. 그것이 지난번 선생님이 말씀하신 emotional account개념과도 연결이 되요. 물론 제가 무슨 이득을 바라고 그러는 것은 아니지만 남편, 자녀들, 동료들, 일과의 관계에서 제가 지나치게 투자만 하고... 받는 것은 없고... 네, 맞아요. 이제 생각이 정리가 되는 것 같아요. 나의 내면의 결핍"


이런 대화의 흐름을 통해서 우리는 내담자의 내면의 과녁의 정가운데에 보다 가까운 곳으로 접근하게 되었다. 이후에 내담자는 본인이 왜 그 "보상"이라는 말에 꽂혔는지 자세히 이야기 했다. 학생 때와 신입 사원때 그녀는 꿈이 크고 높았다. 매일 그 꿈이 그녀를 설레게 했고 아침에 기쁨과 희망 속에 그녀를 눈뜨게 하는 삶의 촉매제였다. 꿈을 향해 노력하는 본인과 본인의 삶이 좋았고, 그 노력은 좋은 성적, 취업, 높은 연봉과 승진 등으로 이어졌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그런 공식이 깨지고 통하지 않게 되었다. 그녀의 정신과 감정에 힘을 주는 에너지원은 사실 휴식이 아니었다. 그녀는 여전히 자신을 설레게 하는 꿈과 목표가 필요했고, 이제까지 가족들을 돌보며 그 목표에서 벗어난 생활을 해왔는데 그런 희생과 노력을 주변에서는 제대로 인정하고 알아주지 않아서 내면의 갈증과 결핍이 채워지지 않았다고 한다. 이제 주변을 위해 헌신을 할 만큼 했으니 그동안 소외되고 거의 지워지다시피 된 자신의 삶을 되찾고 자신의 꿈과 희망, 그리고 그것들을 위해 노력하는 자신의 모습을 다시 어느 정도는 확보하겠다는 것이었다. 그녀가 눈을 크게 뜨고 자신의 새로운 계획과 의지를 설명하고 있을 때 내 눈 앞에 양궁 과녁판의 정중앙에 꽂히는 화살이 떠올랐다. 오랜만에 10점짜리 샷이 명중된 느낌이었다. 



그 후에도 내담자는 마치 유레카를 외치는 사람처럼 자신이 앞으로 무엇을 어떻게 추구하고 실행하고 싶은지 장황하게 말했다. 그 내용들은 그 동안 나와의 상담시간에 언급되었던 내용들이 대부분이었는데, 그런 테마와 내용들이 그녀가 그렇게 말하니까 왠지 새롭게 들렸다. 내담자는 내면의 아픔이 많은 사람이다. 그리고 앞으로 계속 생각하며 삶을 새롭게 구성해 나갈 여지도 많은 사람이다. 예를 들어 타인과의 바운더리 재설정, 수치심의 이슈, 효과적인 커뮤니케이션, 그리고 극단적인 인지적 가정 등이 그런 것들이다. 그러나 그 무엇보다 내담자는 정작 자기 자신을 전혀 사랑하지 못하는 것이 가장 안타까운 이슈이다. 그녀는 이런저런 문제로 정신적으로나 감정적으로 탈진된 채 오랫동안 살아와서 자신을 사랑한다는 것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그리고 그렇게 하기 위한 에너지조차도 없다고 종종 이야기한다. 이 날 그녀는 내가 본모습 중에 가장 가벼운 마음과 기뻐하는 모습으로 나와 인사하며 사무실에서 나갔다. 그런 그녀의 뒷모습을 보고 있으니 마음이 짠하면서도 기뻤고, 또 고맙기도 했다. 상담은 상담사와 내담자 간의 협동을 통해 이루어질 때 이상적인 과정을 거쳐 내담자의 치유를 돕게 된다. 이런 의미에서 그녀는 단순한 내담자라기보다는 나의 훌륭한 협동자이다.


그동안 상담 세션을 가지면서 우리는 그녀의 내면의 외침과 본질적 결핍에 쉽게 다다르지 못하고 겉돌고 돌아왔다. 그리고 우연히 이 날 그녀의 내면의 정중앙이 터치되었다. 물론 내담자의 케이스는 끝난 것이 아니고 어찌 보면 이 날을 계기로 본격적으로 시작된 셈이다. 다른 내담자들과의 상담 경험에서 주고 받은 대화들과 아이디어들을 모두 내려놓고 철저히 "지금 여기 (Here and now)"관점으로 이 내담자의 케이스를 다루며 내담자와 세션을 이어나갈 생각에 나 역시 새로운 힘을 얻는다. 이런 순간이 상담사가 느끼는 보람의 순간 중에 하나라면 하나이다. 


그녀가 떠난 뒤 사무실을 간단히 정리하고 시계를 보니 8시가 훌쩍 넘어 있었다. 창 밖을 보며 크게 심호흡을 해보았다. 그동안 해결을 쉽게 하지 못하고 진척을 이루지 못한 케이스가 급진척을 이룬 느낌이 들어서 퇴근을 하는 나도 발걸음이 가벼웠다. 오늘은 집에서 잼을 바른 식빵과 땅콩과자를 먹으며 야구를 봐도 절대 졸리지 않을 것만 같아 운전대를 잡고 차 시동을 켜는 나도 오랜만에 환하게 미소를 지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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