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 02. 히레사케
어렸을 때부터 나는 뜨거운 것에 유독 약했다. 그리고 싫어했다. 밥도 갓 지은 뜨거운 밥보다는 찬밥을. 면을 먹을 때도 뜨거운 잔치국수보다는 얼음이 동동 띄워진 김치말이 국수를. 가락국수와 칼국수보다는 냉면을. 따뜻한 차를 마시기보다는 그 맛이 덜해질지라도 얼음을 띄운 차가운 차를.
나의 찬 음식 사랑은 계절에 관계없이 계속됐다. 그렇다고 더위를 많이 타는 체질이냐? 그건 아니다. 추위를 더 많이 타는 체질이다. 뜨거운 음식은 준비되자마자 바로 온전히 즐길 수 없으며, 호호 불어 음식을 식힌 뒤 천천히 음미해야 하는데 그 과정이 싫었다. 그렇다고 성격이 급한 편이냐? 그건 아니다. 너무 느긋해 주변인들의 답답함을 사기 일쑤다.
찬 음식을 좋아하는 유년 시절의 나에게 어머니는 말씀하셨다.
"집 밖에서 찬 음식 좋아한다고 말하지 말어, 찬밥 신세된다. 뜨거운 거 못 먹더라도 갓 지은 밥으로 대접받는 사람이 돼야지"
그 얘기를 듣고 10년도 훨씬 넘은 지금까지. 나는 당당히 말한다.
"저는 차가운 음식이 좋아요!"
이런 나에게 어머니는 어느 날 이렇게 말하셨다.
"너 이렇게 지내다가는 몸속에 피까지 차가워지는 거 아니냐"
그런데 이런 나를 홀린 뜨거움이 있었으니.
바로 히레사케다. 처음 맛을 본건 아주 추운 겨울 어느 날. 손을 불며 목도리를 풀며 들어갔던 을지로의 한 오뎅바에서였다. 첫 잔은 히레사케로 시작해야 한다는 친구의 권유에 나는 그게 무엇이냐고 물었고, 일단 마셔보라고 하는 친구의 말에 흔히 아는 사케겠지 라는 생각으로 흔쾌히 응했다.
"나 안 마실래"
펄펄 끓는 사케를 주전자에서 잔에 부어주는데 심지어 그 잔 안에는 뭔가가 들어있었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잔에 부은 사케에 불까지 붙여주는 것이 아닌가. 뜨거운데 뜨거움을 더하다니. 보자마자 내 입에서 나온 말이었다.
"맛만 봐"
그렇게 맛을 본 나는 말했다.
"사장님 히레사케 한잔 더 주세요"
내 인생에 아주 충격적이자 대단히 큰 사건이었다. 내가 처음으로 좋아하는 뜨거운 무언가가 생긴 일.
이제 쌀쌀해지고 으슬으슬해지는 날씨면 어김없이 바로 생각나는 것이 히레사케다. 거기에 완벽함을 위해서는 몇 가지 조건이 필요했다. 1) 날은 추울수록 좋으며. 2) 꼭 가게에 들어설 때 손은 차가운 상태로.(호호 불며) 3) 착석과 동시에 안주보다 앞서 주문할 것. 이 모든 조건이 맞물려 히레사케를 받아들이는 순간 내 몸은 나에게 말한다. 오늘 하루는 끝났다고. 이제 쉬라고. 모든 고단함과 긴장이 이 뜨거움 앞에 녹아내리는 순간이다.
그리고 앞에서 말했던 잔 속에 들어있던 무언가. 태운 복어 지느러미라고 한다. 그래서 그런지 히레사케에서는 일반적인 뜨거운 사케에서는 느낄 수 없는 향이 있다. 수많은 술과 칵테일을 마셔봤지만, 대개 술에 들어가는 무언가는 예뻐 보이기 위함이다. 예외적으로 샹그리아나 뱅쇼 같은 와인을 활용한 술들에는 향을 더하는 무언가가 들어가긴 하지만. 아니다 그것들과는 절대 비교할 수 없다.
뜨거운 사케에 생선 지느러미라니. 술이라기보다는 나는 알콜이 함유된 생선 지느러미 탕, 국이라는 표현이 더 어울리는 것 같기도 하다.
다른 술들은 그때그때의 상황과 곁들이는 음식들에 따라 칭하는 게 달라지겠지만 나는 히레사케만큼은 항상 똑같이 말한다. 히레사케를 위해 안주를 곁들인다고. 메인은 히레사케라고.
추운 걸 좋아하지 않는다. 뜨거운 것도 좋아하지 않는다. 그래도 나는 얼른 추운 겨울이 왔으면 좋겠다. 뜨거운 히레사케를 위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