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 기술자의 기술에 대한 피상적인 의견
O2O 스타트업들이 범람하던 2015년, 나는 스타트업에서 일할 것이라면 자체 기술을 보유한 기술 기반의 스타트업으로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차별화되는 기반 기술이 있어야 경쟁사로부터 쉽게 따라 잡히지 않는 경쟁 우위가 생기고, 혹시 사업이 잘 안 풀리더라도 작게 exit 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내가 2015년에 기술 기반 스타트업을 선택한 이유는 지금 생각해도 대체로 맞는 말이다. 단, 위 명제가 성립하기 위해서는 중요한 전제가 있다. 특정한 문제를 해결해주는 기술만이, 가치 있는 기술로서 스타트업의 자산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해결하고자 하는 문제가 분명하며 그 문제를 해결하는데 회사의 기술이 적합할 때, 경쟁 우위가 되고 exit 가능성을 높여준다.
다시 한번 강조하면, 특정 고객의 문제를 해결해주는 기술만이 사업적으로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기업이 풀고자 하는 문제를 자물쇠라고 한다면 기술은 일종의 열쇠이다. 열쇠를 일단 예쁜 모양으로 만들고, 그다음에 이 열쇠와 들어맞는 자물쇠를 찾는 것은 비효율적이고 힘들다. 반면에 풀고 싶은 자물쇠를 찾고, 그다음에 자물쇠에 맞는 열쇠를 만드는 것이 바람직한 접근 방법이다. 나는 스타트업의 기술이란 위 비유의 열쇠와 같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들어맞는 자물쇠(=해결하고 싶은 문제)가 있을 때, 비로소 열쇠(=기술)는 의미를 가지는 것이다.
기술을 보유하고 있으면 기술을 활용할 수 있는 영역을 잘 찾을 수 있지 않나라고 반문할 수도 있다. 내가 경험한 놀라운 점은 오히려 기술을 보유하고 있을 때 적용할만한 문제를 찾는 게 더 어려워진다는 점이다. 여기서 적용할만한 문제는 우리 기술 특성에 부합하고, 해결했을 때 큰돈을 벌 수 있는 문제를 말한다. 이미 개발하고 있는 기술의 특성에 따라 특정 사업 영역이나 동작 방식에 의존성이 생기기 때문에 기술로 해결할만한 문제를 역으로 찾는 것은 더 어려웠다.
스타트업이 특정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기술을 개발했는데, 사업 성과가 크지 않아 해결하고자 하는 문제, 고객, 시장을 바꾸는(Pivot) 상황이 되면 이미 개발한 기술은 계륵이 되기 쉽다. 기술을 차별점으로 투자를 받고, 팀원을 모으게 되기 때문에 기술을 가지고 문제를 찾는 방법을 계속 선택하게 된다. 그렇지만 위에서 말한 대로 기술을 바탕으로 문제를 찾아나가는 방식은 제한 사항이 생기기 때문에 일은 계속 꼬여나가기 쉽다.
따라서 좋은 기술을 문제와 분리해서 보면 안 된다. 또한 좋은 기술을 보유했다는 것만으로 성공의 필요조건이 충족되었다고 보기 어렵다. 기술 기반 스타트업을 운영하는 구성원들이나, 새롭게 기술 기반 스타트업에서 구직하고자 하는 사람들은 이 점을 명심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테크 스타트업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예비 창업자나 구직자들에게 스타트업의 기술에 대한 내 생각을 좀 더 알려주고 싶다. 일단 테크 기업의 기술에 대한 스티브 잡스의 생각을 엿볼 수 있는 영상을 한번 보자. 기술도 고객 중심적이어야 한다는 점과 떠오르는 기술을 선택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한다. 그의 고객 중심적인 기술에 대한 철학은 문제를 해결하는 기술만이 의미를 갖는다는 본 글의 핵심 주장과도 일맥상통한다.
스티브 잡스, 용기를 말하다 : https://www.youtube.com/watch?v=LkNeKRHro0k
스티브 잡스가 말한 것처럼 기술도 주기가 있다. 처음 개발되어 시장에서 활용되다가 마침내 뒤안길로 사라지는 Life-cycle말이다. 기술 기반 스타트업을 시작하거나, 조인하려는 사람이라면 향후 떠오르는 기술을 선택하는 게 중요하다. 기술의 성장에 따라 자연히 회사도 성장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훌륭한 에반젤리스트나 테크니션이 아니라면 기술의 전망에 대해서 예측하는 게 사실 어렵다. 최근 몇 년간 붐을 이루었던 IoT, Wearable가 이제는 조정기에 들어간 것이 예시가 될 수 있다. (조정기 이후에 다시 활성화될 수도 있지만 현재 체감하는 분위기는 위 기술 트렌드들이 기대보다는 저조하다는 느낌이다.) Next Big Thing을 예측해서 그 흐름에 합류하는 것 생각보다 어렵고 위험한 일 일수도 있다.
또한 개발된 기술과 현장에서 상용화된 기술은 천지차이라는 점도 말하고 싶다. 기술의 컨셉이 훌륭하고, 크라우드 펀딩 등에서 공유되는 프로토타입이 동작을 잘한다고 할지라도 세상에서 상용화되는 것과는 차이가 크다. 특히 비공학도들이 기술의 컨셉만 이해하고, 현실에서의 튜닝에 대해서는 무지한 채로, 기술에 대한 환상을 품는 경우가 있는 것 같다. 나도 역시 그랬다. 개발 중인 기술에 대해서는 좀 더 객관적으로 바라봐야 한다.
스타트업이 개발하고 있는 기술은 대개 초기 단계의 기술이고, 개발 중인 기술인 경우가 많다. 기술에 대해서 제3자로서 판단해야 한다면, (사실상 비 테크니션으로 판단하기 어렵다고 생각한다.) 기술의 주기와 상용화 단계에 대해서 잘 알아봐야 한다고 말하고 싶다. 물론 가장 중요한 것은 그 기술이 어떤 문제를 해결하는 데 사용될 수 있는가이겠지만.
내가 창업자가 아니기 때문에 특히 구직자들에게 몇 가지 주관적인 의견을 공유드리고 싶다. 좋은 기술 스타트업에서 기술로 세상의 변화를 만들고 싶은 분들이라면 한번 고민해봐 주시면 좋겠다. 특히 비공학도로서 기술에 매력에 빠진 사람들은 한번 더 객관적으로 스스로와 회사를 바라봐야 한다.
1) 기술보다는 문제를 찾아야 한다.
기술이 해결하고자 하는 문제를 정확히 설정하고 기술을 고도화하는 게 정도이다. 문제부터 찾는 게 기술을 발전시킨 후 해결할 수 있는 문제를 찾는 것보다 빠르다. 작은 고객 세그먼트라도 문제를 해결해주어 세상에서 자꾸 사용되어야 그 기술도 더욱 빠르게 발전한다. 연구실 안의 기술만으로는 세상을 바꿀 수 없다.
2) 이머징(Emerging) 테크를 선택하라. 니치(Niche)한 테크가 아니라.
기술에 대한 신념이 있다면 향후 크게 성장할 이머징(Emerging) 기술을 선택하는 게 전망이 더 밝을 것이라 생각한다. 무엇이 크게 성장할지 모르겠다면 기존 기술의 보완재이거나, 사각지대를 공략하는 니치(Niche)한 기술은 피하는 게 좋다. 기술 자체로 크게 성장하기 어렵다. 단, 이머징 테크와 니치한 테크를 비교하는 것은 두 기술 모두 해결하고자 하는 문제가 분명하지 않은 경우만 해당한다. 해결하고자 하는 문제가 분명하다면 니치 시장도 기술로 충분히 공략할 수 있다. 기술로 성장하는 유효 기간은 짧겠지만 말이다.
블록체인, 딥러닝 등 비 기술자 입장에서 생소한 용어들이 업계 사람들의 입에서 자주 나오고 있다. 결국 아무리 훌륭한 기술도 해결하고자 하는 문제가 없다면 공허한 것이다. 잘 모르는 영역에 대해 막연한 기대를 품는 것보다 그 기술이 어떤 문제를 해결할 수 있고, 실제로 상용화되어 해결하고 있구나를 기준으로 검토하는 게 기술에 대한 크게 틀리지 않는 판단을 내릴 수 있는 방법이라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