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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공학자의 책장 Oct 11. 2019

당신이라는 기적

숨 - 테드 창

현대 과학은 우주의 다양한 종말을 예상하고 있습니다. 지구의 끝, 아니 인류의 끝은 이보다 이를 가능성이 높지요. 다시 말해, 언젠가 전 인류는 사라지고, 누구도 기억되지 않고, 이곳에 우리가 살았다는 어떠한 흔적도 남지 않는 순간이 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우리의 삶은 의미가 있을까요? 




이번에 소개드릴 책은 테드 창의 ‘숨’입니다. ‘숨’은 ‘당신 인생의 이야기’ 다음으로 나온 테드 창의 단편소설집입니다.


당신 인생의 이야기를 무척이나 재밌게 읽었기 때문에 바로 이어서 읽게 되었는데요, 두 권의 단편집을 이어서 읽다 보니 테드 창의 소설들을 관통하는 키워드들이 보였습니다. 그것은 기억과 운명, 그리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당신 인생의 이야기에 이어 숨 역시 기억을 추적하고 운명을 찾는 인간이 등장합니다. 그들의 운명은, 비록 미래지만 기록된 역사로서 존재하고 이 운명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은 없습니다. 그리고 그 운명은 정말로 막다른 길로 보입니다. 끝없는 구도와 합리적 추론을 통해 알아낸 결론은 그곳에 도달하는 과정이 지니는 의미를 부정합니다.


예를 들어 '바빌론의 탑'에서 하늘 위로 올라가기 위해 노력한 인간이 끝끝내 발견하는 것은 인간은 결코 하늘을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이고, '네 인생의 이야기'에서 자신의 운명을 모두 본 인간이 발견한 것은 모든 행복이 끝난 뒤 마주할 슬픔입니다.


'상인과 연금술사의 문'에서 상인은 과거로 돌아가지만 현재나 미래를 바꿀 수 없었습니다. ‘숨’에서 영원히 사는 기계인간은 자신의 기억에 대해 연구하다 자신들의 세계는 수세기 후에 멸망하게 될 수 밖에 없는 구조임을 알게 됩니다.


우리가 우리의 운명을 알든 모르든 운명은 그대로 실현됩니다. 정해진 운명을 향해 나아가는 것은 수동적이고 조금은 비참하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정해진 삶을 산다고 해서 그 삶에 의미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단편집 '숨'에 실린 첫번째 단편인 '상인과 연금술사의 문'에서 연금술사는 시간이 다른 두 지점을 연결할 수 있는 문을 만듭니다. 상인은 그 문을 통해 미래로 갈 수도 있었지만 과거로 가기를 원합니다. 그는 20년 전 노예무역을 하고 있었고 노예무역에 반대하는 아내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길을 나섭니다. 그리고 그가 다시 집으로 돌아왔을 때는 그의 아내가 사고로 죽은 후였습니다. 상인은 아내의 죽음을 마치 자신의 과오에 의한 것으로 여기며 20년이 지나도록 스스로를 용서하지 못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과거를 바꿀 수 없다는 것을 알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20년 전 아내를 만나러 길을 떠납니다.


그 여정을 통해 어떤 사실도 바뀌지 않았지만 그는 변합니다.


“저는 몇 시간 동안이나 해방의 눈물을 흘리며 거리를 배회했습니다. 그러면서 줄 곧 바샤라트가 한 말이 얼마나 옳았는지에 대해 생각했습니다. 과거와 미래는 같은 것이다. 우리는 그 어느 쪽도 바꿀 수 없고, 단지 더 잘 알 수 있을 뿐이다. 과거로의 제 여행은 아무것도 바꾸지 못했지만, 그곳에서 제가 배운 것은 모든 것을 바꿔 놓았습니다. 그리고 저는 그렇게 밖에 될 수 없었다는 사실을 이해했습니다. 만약 우리의 인생이 알라가 들려주는 이야기라면, 우리는 등장인물인 동시에 관객이고, 우리는 바로 그 이야기를 살아감으로써 그것이 전해주는 교훈을 얻는 것입니다.”


상인은 자신의 삶이 이미 정해져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지만 바로 모든 것이 정해져 있었기 때문에 자신이 바뀔 수 있었습니다.


단편 '숨'에서 등장하는 기계인간은 매일 공기가 가득 찬 폐를 교체해야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들의 육체는 티타늄으로 이루어져 있어 아주 큰 사고가 나지 않는 이상 영원히 살 수 있으나 폐를 제때 교체하지 않으면 죽습니다. 죽은 이후라도 공기가 가득 찬 폐로 바꿔주면 다시 살아나지만 이전 삶의 모든 기억을 잃습니다.


기계인간 중에 한 명은 자신들의 기억이 어디에 저장되는지 알아내기 위해 자신의 머리를 해부합니다. 그리고 기억은 단단한 판에 기록된 것이 아니라 뇌 속에 엮여있는 수많은 미세 통로를 흐르는 공기의 패턴이며 그렇기 때문에 공기를 다 써서 죽게 되면 기억을 잃는 것이라는 결론에 도달합니다.


이들의 폐에 충전된 공기는 몸의 구석구석을 돌며 몸을 움직이게 하고 몸에서 빠져나갑니다. 그러니까 삶의 원동력은 공기 그 자체가 아니라 공기의 흐름이며, 이 흐름은 폐와 대기 사이의 압력차에 의해 일어납니다.


이들이 사는 곳은 매우 두꺼운 크롬 천정에 둘러싸인 세계로 그 중심에는 아주 높은 압력의 공기를 제공하는 공기 저장고가 있고, 이곳을 통해 폐에 공기를 충전합니다. 이 세계는 닫힌 세계이기 때문에 공기 저장고의 공기를 소모하면 할수록 대기의 압력은 높아지게 되고 폐와 대기 사이의 압력 차이는 줄어듭니다.


결국 대기압과 폐의 압력, 아니 공기 저장고의 압력이 같아지면 그 세계의 모두는 죽음을 맞이하게 됩니다. 그는 이 상황에서 미래의 여행자에게 편지를 남깁니다. 자신들이 종말을 맞이한 이유와 그리고 혹시 이러한 일이 여행자에게도 일어날 수 있으니 미리 알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글을 씁니다.


이것은 마치 우리 우주에서 가장 강력한 법칙 중에 하나인 엔트로피의 법칙에 대한 오마주 같습니다. 엔트로피의 법칙이 예견하는 우주의 종말 중 하나도 모든 우주가 열적 평형상태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독자가 바로 먼 과거 기계인간이 남긴 기록을 발견한 여행자이고, 우리의 우주도 종말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는 것을 배우는 것이지요.


행운을 빈다 탐험 자여. 그러나 문득 궁금해진다. 혹시 당신들에게도 우리와 똑같은 운명이 닥치는 것은 아닐까? 얼마나 먼 미래의 일일지에 대해선 짐작조차 할 수 없지만 언젠가는 당신들의 삶은 우리의 삶이 그러했듯, 다른 모두가 그러하듯, 언젠가는 끝날 것이다. 아무리 오랜 시간이 걸린다 해도, 결국 모든 것은 평형상태에 도달할 것이다.

설령 이 사실을 자각한다 해도 슬퍼하지는 말기를. 나는 당신의 탐험이 단지 저장고로 쓸 수 있는 다른 우주를 찾기 위함이 아니었기를 희망한다. 지식을 원했기를, 우주가 내쉬는 숨으로부터 무엇이 생겨나는지 알고 싶다는 갈망에 의해 움직였기를 희망한다. 우주의 수명을 계산할 수 있다고 해서, 그 안에서 생성되는 생명의 다양한 양태까지 계산할 수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가 세운 건물, 우리가 일군 미술과 음악과 시, 우리가 살아온 삶들은 예측할 수 있는 것들이 아니었다. 그 어느 것도 필연적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우리의 우주는 그저 나직한 쉿 소리를 흘리며 평형 상태에 빠져들 수도 있었다. 그것이 이토록 충만한 생명을 낳았다는 것은 기적이다. 당신의 우주가 당신이라는 생명을 일으킨 것이 기적인 것처럼.


우연인지 아닌지 모르겠지만 지금까지 제가 리뷰한 책들은 모두 비슷한 주제를 다루는 것 같습니다.


결국 언젠가 모든 것이 사라지고 무의미해지는 순간이 다가올 텐데 우리가 살아간다는 것에 어떤 의미가 있는가?


저는 그 이유가 아마도 이러한 소설들의 주제가 아주 일반적인 주제이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은 한정되어 있다는 것, 일어난 일은 결코 바꿀 수 없다는 것, 아주 먼 시간이 후에는 모든 것이, 나뿐만이 아니라 정말 모든 것이 사라질 것이라는 것 이것들은 가정이 아닙니다. 이 세계의 법칙이 그러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삶에 여전히 의미가 있을까요? 우리의 인생 하나하나가 그것을 증명하기 위한 시도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누군가 여러분에게 여러분이 좋아하는 우주론이 맥스웰 방정식 Maxwell's equations(전자기 현상의 모든 면을 통일적으로 기술하고 있는, 전자기학의 기초가 되는 방정식으로 이 방정식을 기본으로 하여 맥스웰이 전자기장 이론을 확립했음)을 위배한다고 지적한다면 맥스웰 방정식에 문제가 있다고 하면 된다. 또 이 우주론이 관측 결과와 모순이 되는 것으로 밝혀지면 실험 학자들은 종종 실수를 저지른다고 하면 된다. 그러나 여러분의 이론이 열역학 제2법칙을 위배하는 것으로 밝혀지면 희망을 버리는 것이 좋다. 큰 모욕을 감수하고 여러분의 이론을 포기하는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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