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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공학자의 책장 Oct 11. 2019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밀란 쿤데라 혹은 니체의 영원 회기

The unbearable lightness of being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라는 제목을 보면 이보다 더 이상 좋은 제목은 없을 거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데 영어 제목도 이에 못지않게 좋아 보입니다. being이라는 단어를 보면 아마도 많은 분들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문장이 있을 것입니다.


"To be or not to be, that is the question"


William Shakespeare의 Hamlet을 대표하는 문장이죠. "죽느냐 사느냐 그것이 문제로다!" 로도 잘 알려져 있는데요. 여기서 be가 존재를 의미합니다. 그러니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서 존재란 결국 살아가는 것, 삶을 의미합니다. 우리의 삶은 왜 못 견딜 정도로 가벼운 것일까요? 그 이야기를 한 번 해보겠습니다.




이 책은 다른 것보다 제목의 덕을 톡톡히 보고 있는 책인데요, 제목에 공감이 가는 동시에 그 이유가 무척이나 궁금해져서 책을 펼치게 만듭니다.


그 덕인지 데미안, 이방인, 위대한 개츠비, 그리스인 조르바와 함께, 상당히 오랜 시간 동안 스테디셀러의 위치에 올라가 있는 소설입니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은 프라하를 배경으로 살아가는 토마시, 테레자, 사비나, 프란츠 이 네 인물 간의 사랑을 통해 인간이 내재적으로 타고나는 의무의 부재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이 책은 특이하게도 소설의 중간에 작가가 직접 화자로 등장하기 때문에 현실을 더 선명히 보여주기 위한 한 편의 우화라는 소설의 본질을 상기하며 읽게 합니다.


“작가가 자신의 인물들이 실제로 존재했다고 독자로 하여금 믿게 하려 드는 것은 어리석은 짓일 것이다. 그들은 어머니의 몸이 아니라 영감을 불러일으키는 몇몇 문장, 혹은 핵심 상황에서 태어난 것이다. 토마시는 ‘einmal ist keinmal’, 이라는 문장에서 태어났다. 테레자는 배 속이 편치 않을 때 나는 꾸르륵 소리에서 태어났다.”


이렇게 작가가 직접적으로 앞으로 나와있는 탓인지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은 소설 이라기보다는 프라하라는 무대 위에서 벌어지는 연극을 보는 듯한 기분이 들게 합니다. 그래서 이 소설의 캐릭터들은 현실성이 떨어지지만 독자는 이들이 작가의 의도를 전달하기 위한 하나의 퍼펫이라고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밀란 쿤데라가 이런 연극을 통해서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이것에 대해 이야기하기 전에 우리는 가벼움과 무거움, 그리고 영원회귀에 대해 먼저 이해를 하는 게 좋을 거 같습니다.


니체 – 영원회귀

이 부분은 앞서 리뷰한 책인 ‘숨’에서 도 한 번 설명을 한 내용인데요, ‘상인과 연금술사의 문’에서 연금술사는 과거와 미래는 동일한 것이고 일어난 일을 바뀌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러나 동시에 이야기는 동일한 사건을 바라보며 거기에서 무엇을 얻는지는 바뀔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상인은 과거로 돌아가서 죽은 아내를 다시 살려낼 수는 없었지만 아내의 죽음에 대한 죄책감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만약 과거를 바꿀 수 있다면, 어떤 것이 의미를 지닐 수 있을까요? 모든 잘못을 고칠 수 있다면, 우리는 한 발자국도 앞으로 나아갈 수 없습니다. 동시에 미래를 두 번 살아볼 수 없기 때문에 어떠한 것도 확신을 가지고 선택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선택은 일어나고, 미래는 쓰인 대로 일어납니다. 우리가 이 삶을 다시 산다고 해도 모든 일은 동일하게 반복됩니다. 즉 영원 회귀란 다시 되돌아 가더라고 같은 것을 반복할 뿐이라는 이야기입니다. 이러한 1회성은 이 삶을 수정할 방법이 없다는 점에서 삶에 무게를 부여합니다.


니체는 영원회귀는 가장 무거운 짐이라고 했습니다. 만약 뭐든 다시 할 수만 있다면, 삶은 가벼워집니다.

그러나 토마시는 이야기합니다.


“모든 것이 일순간, 난생처음으로, 준비도 없이 닥친 것이다. 마치 한 번도 리허설을 하지 않고 무대에 오른 배우처럼. 그런데 인생의 첫 번째 리허설이 인생 그 자체라면 인생에 과연 무슨 의미가 있을까? 그렇기에 삶은 항상 밑그림 같은 것이다. 그런데 ‘밑그림’이라는 용어도 정확하지 않은 것이, 밑그림은 항상 무엇인가에 대한 초안, 한 작품의 준비 작업인데 비해, 우리 인생이라는 밑그림은 완성작이 없는 초안, 무용한 밑그림이다.

토마시는 독일 속담을 되뇌었다. 한 번은 중요치 않다. 한 번뿐인 것은 전혀 없었던 것과 같다. 한 번만 산다는 것은 전혀 살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다.”


오히려 삶은 단 한 번만 살기 때문에 한없이 가볍다고 합니다. 이것은 우리가 알고 있는 영원회귀와는 완전히 반대의 의미입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한 없이, 전혀 살지 않은 것과 마찬가지로 가벼운 삶은 어째서 지속되어야 하는 것일까요? 이것을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무거움에 대해서도 잠시 이야기를 해봐야 합니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서 삶의 무거움은 ‘그래야만 한다’로 나타납니다. 의미가 없는 삶에 누군가 부여한 의미는 그래야만 한다는 표현으로 다가옵니다.


테레자는 토마시가 사비나와 바람을 피운다는 것을 알게 된 후 악몽에 시달립니다. 이 악몽에서 우리는 그래야만 하는 세계가 어떤 것인지 잘 알려줍니다.


“커다란 실내 수영장이었어. 여자만 스무 여명 있었어. 모두 완전히 알몸이었고 수영장 주변을 따라 발을 맞춰 행진해야 했어. 철창에 커다란 바구니가 매달려 있었고, 그 안에 한 남자가 있더군 챙이 큰 모자를 써서 얼굴을 가렸지만 나는 그 남자가 당신인걸 알았어. 당신은 우리에게 명령을 내리더군. 당신은 악을 썼어. 우리는 행진하며 노래를 부르다가 무릎을 꿇어야만 했어. 한 여자가 무릎을 꿇지 못하자 당신은 권총으로 쏘았고, 그녀는 죽어 수영장에 떨어졌지. 그 순간 다른 여자들은 박장대소하고 더욱 큰 소리로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어. 당신은 우리로부터 눈을 떼지 않다가 우리들 중 한 여자가 틀린 동작을 하면 쏘아 죽였어. 풀장은 물결에 따라 출렁이는 시체로 가득 찼고. 나는 더 이상 힘이 없어서 다음 동작을 할 수없었고 그래서 당신이 날 죽일 거라는 것을 알고 있었어!”


여기서 테레자의 공포는 죽음에 대한 공포가 아닌 다른 여자들과 발가벗고 행진을 한다는 것부터 시작됩니다. 테레자에게 있어 나체는 집단 수용소에서 강요하는 획일성이며, 모욕의 상징입니다. 자신의 육체가 평가절하 된 상태에서 그것을 즐기듯 노래 부르지 않으면 죽습니다.


“그것은 영혼 없는 자들의, 환호에 찬 유대감이었어다. 개성에 대한 환상이자 우스꽝스러운 오만인 영혼의 짐을 내던져버리고 모두가 비슷해졌다는 점에 대해 그들은 행복해했다.

철저하게 비슷하고 무차별화된 것을 즐거워하는 여자들은 그들의 유사성을 절대적인 것으로 만드는 미래의 죽음을 축하하는 것이다. 권총 소리는 죽음의 행진을 행복하게 마무리할 따름인 셈이다.”


존재에 무게를 부여하는 것은 존재 자체가 아니라 삶에 부여된 의무에 있습니다. 이러한 의무의 세계에서 해야만 하는 것들은 늘어나고 해야만 하는 것을 하지 않으면 죽습니다. 이때 죽음은 의무로부터 우리를 해방시키는 탈출구가 될 수 있습니다.


남이 부여한 의무로부터의 탈출, 그것은 삶을 가볍게 합니다. 삶은 너무 가벼워져서 의미를 가지기 힘들어집니다. 가벼움과 무거움 그 어떤 것도 답이 될 수 없는 것일까요?


조금 생뚱맞겠지만 이 질문은 다음과 같이 치환할 수 있습니다. 악몽 속에서 한없이 무거운 삶을 살아가는 테레자에게 권총을 쏘는 사람은 왜 그토록 가벼움을 추구하던 토마시였을까요?


우리는 소설의 끝에 도착해서야 이 질문에 대한 답을 할 수 있습니다. 소설의 끝에 테레자는 토마시에게 자신 때문에 토마시가 의사일을 그만두고 밑바닥까지 내려오게 되었다며 사과합니다. 그러나 토마시는 의아해하며 자신은 지금이 행복하다고 하죠.


“임무라니 테레자, 그건 다 헛소리야. 내겐 임무란 없어. 누구에게도 임무란 없어. 임무도 없고 자유롭다는 것을 깨닫고 나니 얼마나 홀가분한데.”


인생을 무엇보다도 가볍게 받아들이던 토마시는 테레자의 아래로 걸어 들어가 테레자의 무게를 견디기로 선택합니다. 반면에 인생을 늘 무겁게 받아들이던 테레자는 누군가 애써 지배하지 않아도 존재의 무게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자신에게 아무런 의무가 없다는 것을 토마시가 힘을 잃고 나서야 조금 알게 됩니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은 삶에 부여된 의무 같은 건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다른 말로 하자면 자유는 이미 주어져 있습니다. 우리가 이 자유를 피할 수 있는 곳은 의무의 무게 아래뿐입니다. 그리고 자유를 묶어주는 무게추가 무엇이냐에 따라 우리는 발가벗고 수영장을 따라도는 여자 중 한 명이 될 수도 있고 누군가를 사랑하고 자신에게 솔직한 한 명의 인간이 될 수도 있습니다.


여러분의 무게 추는 무엇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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