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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공학자의 책장 Oct 12. 2019

당신 인생의 종착지를 이미 알고 있다면

당신 인생의 이야기 - 테드 창

삶 끝에는 죽음이 있고, 행복은 언젠가 끝나고, 결국에 모든 것은 사라진다는 것. 이러한 운명을 알지만 한 발짝 더 나아가는 것, 그것이 바로 ‘당신 인생의 이야기’입니다.




저는 영화 Arrival을 통해 이 책을 알게 되었는데요, 국내에는 2017년에 컨택트라는 제목으로 개봉했었습니다.


영화를 보면서 특히 인상적이었던 부분은 어느 날 갑자기 외계인이 당도했다는 기괴한 상황이 주어졌음에도 그 안의 인물들의 행동은 현실적이었다는 점이었습니다. 언어학자인 루이스가 외계의 언어를 이해하는 과정은 외계의 언어가 아닌 어떤 언어에라도 적용할 수 있는, 지극히 일반적인, 그러나 합리적인 접근 방식이었습니다.


물론 현실적인 인물이 등장하는 SF작품은 많습니다. 다만 많은 경우 극중 갈등의 해소를 위해 SF라는 장르의 힘을 마치 데우스 엑스 마키나 처럼 사용하며 허무맹랑한 결말 혹은 열린 결말로 이야기를 끝내버리고 마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Arrival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비현실적인 가정에서 시작한 이야기는 끝끝내 그 핍진성을 잃지 않고 결론에 도달합니다. 너무나도 마음에 들었던 영화였고 2017년 최고의 영화 중 한 편으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저는 Arrival의 원작 소설이 있다는 걸 알고 큰 기대를 가지고 'Story of your life'를 구매하였었습니다. 그래서 이 책이 제 기대를 충족시켰냐고요? 네, 넘치도록 충족시켜 주었습니다.


중의적인 책 제목이 참 마음에 듭니다


소설과 수필의 차이에 대해 한 번쯤 이야기를 드린 적이 있었던 거 같은데요, 당연히 소설은 허구의 기술이고 수필은 진실의 기록입니다.


수필은 실제로 일어났던 이야기를 적어둔 것이기 때문에 태생적으로 진실입니다. 그러나 현실은 매우 복잡하고 그 때문에 현실에서 발생한 모든 일이 예상가능한 것은 아닙니다. 우연에 우연이 겹쳐 말도 안 되는 일이 일어나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실제로 일어났기 때문에 진실입니다. 현실의 사건은 어떠한 목적을 수행하고자 발생하지 않으며, 사건의 의미는 사건이 발생한 후에나 부여할 수 있습니다.


반대로 소설은 태생적으로 거짓말입니다. 따라서 이 거짓말이 그럴듯하게 보이기 위해서는 타당한 근거가 존재해야 합니다. 잘 꾸며진 거짓말은 진짜 일어난 일보다 그럴듯하게 들립니다. 이 이야기는 불필요한 것들이 배제되었고 궁극적으로 도달하고자 하는 목적을 가지고 있습니다. 소설이라는 것은 근본적으로 작가가 하고 싶은 메시지를 우화라는 매체를 통해 전달하는 것입니다.


그럼 소설은 현실성을 어떻게 획득될 수 있을까요? 거기에는 몇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소설은 하나의 세계를 새롭게 새우는 일입니다. 어떤 세계 든 존재하기 위해서는 그 세계 안에서 통용되는 법칙이 필요합니다.


지금 우리가 사는 세계를 봅시다. 이 세계에서는 공을 던지면 다시 땅으로 떨어집니다. 어떠한 장치도 없이 공을 공중에 띄어 둘 수 있다고 하면 그건 허무맹랑한 이야기입니다. 질량을 가진 물체는 서로 당기는 힘을 받고, 공은 지구로 당겨집니다. 따라서 이 세계에서는 공이 아무 이유 없이 공중에 떠 있으면 그것은 현실성을 해치며 이야기가 허구임을 알려줍니다.


소설 속 세계는 우리가 사는 세계와 다를 수 있고, 다른 규칙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그 세계의 규칙을 통해서 하늘에 떠 있는 공을 설명할 수 있다면 그 세계에서 공이 허공에 떠 있는 것은 현실적이게 됩니다.


등장 인물의 합리적인 행동과 대사 역시 이야기에 현실감을 부여합니다. 우리는 어떤 한 인물이 지금까지 한 행위와 발언을 통해 그 인물이 앞으로 할 선택을 예측합니다. 현실에서도 우리는 누군가를 처음 만나면 그 사람의 말과 행동을 통해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판단을 하고 그 사람의 행동을 예측합니다. 이 예측을 벗어나면 이상하다고 여기게 되죠. ‘저럴 애가 아닌데…’, 혹은 ‘저런 애였어?’라는 생각이 드는 경험을 종종 해보셨을 것입니다.


소설 속의 인물도 등장과 동시에 독자에 의해 어떤 인물인지 평가를 받게 됩니다. 그리고 인물의 대사와 행동 배경으로부터 그 인물이 앞으로 행할 행동이나 반응을 예상하게 되죠. 그 반응이 그럴듯하다면 이야기는 현실보다 더 현실적일 수 있게 됩니다.


그런데 만약 여기서, 작가의 서술이 독자가 예상하지 못한 이야기임에도 불구하고 더 그럴듯하다면 독자는 감탄을 하게 되는 것이지요.


당신 인생의 이야기는 그런 이야기가 여덟 편이나 실려 있습니다.


바빌론의 탑 (Tower of Babylon, 1990) - 네뷸러상 수상

이해 (Understand, 1991) - <아시모프>지의 독자상 수상

영으로 나누면 (Divided by zero, 1991)

네 인생의 이야기 (Story of Your Life, 1998) - 네뷸러상, 스터 전상 수상

일흔두 글자 (Seventy-Two Letters, 2000) - 사이드 와이즈 상 수상

인류 과학의 진화 (The Evolution of Human Science, 2000)

지옥은 신의 부재 (Hell Is the Absence of God, 2001) - 휴고상, 네뷸러상, 로커스상 수상

외모 지상주의에 관한 소고: 다큐멘터리 (Liking What You See: A Documentary, 2002)


물론 이 중에 가장 인상적인 이야기인 ‘네 인생의 이야기’를 소개하는 것이 마땅해 보입니다.


‘네 인생의 이야기’는 당신 인생의 전체를 다 알고 있다면 당신은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를 묻습니다. 이야기는 어느 날 지구에 나타난 외계 생명체인 헵타 포드의 언어를 해석하는 사라와 게리의 연구과정을 그리고 있습니다. 헵타 포드의 언어는 과거와 현재 미래의 구분이 없었고, 시제의 구분이 없는 언어를 쓰는 펩타 포드는 과거를 회상하듯 미래를 볼 수 있었습니다. 사라 역시 헵타 포드의 언어를 터득하자 자기 자신의 인생 전체를 볼 수 있게 됩니다. 그녀는 자신의 인생에 다가올 불행을 미리 알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길을 나아가기를 선택합니다.


여기에는 ‘사피어- 워프 가설’과 ‘페르마의 원리’ 혹은 4차원 시공간의 개념 등을 떠올릴 수 있는데요, 사피어 워프의 가설은 언어가 사고를 지배한다는 것이고, 페르마의 원리는 빛의 경로는 목적지까지 도착하는데 걸리는 시간을 최소로 하는 경로를 택한다는 이야기이며, 따라서 빛은 방향을 정하기 전에 목적지를 알아야 한다고 합니다. 4차원 시공간의 개념도 비슷한데요, 과거나 미래의 일이 시공간 상에 이미 다 정해져 있고 우리는 시간축을 따라 이동할 뿐인 것이죠.


이야기 속에서 펩타 포드의 등장은 비현실적이지만, 그들의 언어를 이해해 가는 과정, 그리고 그 언어의 습득으로 인해 사라가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이 바뀔 수 있는 이유 등이 아주 그럴듯하게 그려집니다. 물론 여기에 등장하는 가설이 옳다고 할 수는 없겠지만 우리는 외국어를 습득하면서 세상을 다른 눈으로 볼 수 있게 되는 그런 경험을 해 본적이 있습니다. 


여러 가설과 이론을 모르더라도 우리는 사라가 자신의 미래를 마치 과거를 회상하듯 서술하는 것을 통해 이야기에, 그리고 사라의 감정에 더 깊게 빠져듭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야기의 끝에서 그녀가 내리는 선택을 통해 독자 자신의 삶을 다시 한 번 되돌아보게 됩니다.


나는 처음부터 나의 목적지가 어디인지를 알고 있었고, 그것에 상응하는 경로를 골랐어.

이야기가 현실성을 지니는 또 다른 예로 이 단편집의 첫 번째 이야기인 바빌론의 탑에 대해서 조금 더 이야기드리겠습니다.


바빌론의 탑은 신이 있는 곳으로 가기 위해 건설한 탑이 천정에 닿은 후 하늘을 파내기 위해 고용된 광부의 여정을 이야기합니다. 그 탑은 몇 달을 걸어야 정상에 도착할 수 있었고 그는 그곳에서부터 하늘을 파고 더 위로 나아갑니다. 


저는 여기서 탑을 오르는 광부 중 한 명이 고소공포증 때문에 탑을 더 이상 올라가지 못하는 일이 발생했을 때, 역시 광부인 주인공이 광부가 되려는 자들 중에도 막장이 무너질까 봐 더 이상 갱도에 들어가지 못하는 광부가 종종 있다고 이야기할 때, 허무맹랑하게만 보이던 바벨탑이 이야기 속 세계에서는 진짜 존재한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힐라룸이 다시 오른쪽 밧줄을 끌며 탑 가장자리를 나아가고 있을 때, 바로 아래층 경사로에서 고함소리가 들렸다.

“자네와 함께 온 광부들 중에 높은 데를 무서워하는 친구가 하나 있었어. 탑을 처음 오르는 이들 중에 이따금 그런 경우가 있지. 그렇게 되면 바닥을 얼싸안고 더 이상 올라가지를 못해. 하지만 이렇게 일 찍 그런 증상을 보이는 것은 드문데.”

힐라룸은 이해했다. “광부가 되려는 사람들에게도 비슷한 일이 일어날 때가 있네. 막장이 무너져 묻히게 될까 봐 두려워 갱도 속으로 들어가지 못하는 이들이 있지.”

“정말?” 루가툼이 등 뒤에서 말했다. “그런 이야기는 처음 들어보는 군. 높은 데 오니 자네 기분은 어떤가?”

“아무 느낌이 없어.” 그러나 힐라 룸은 난니를 흘낏 보았고, 두 사람 모두 같은 기분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손바닥에 땀이 나지 않아?” 난니가 속삭였다.

힐라룸은 밧줄의 거친 섬유에 양손을 문지르고 고개를 끄덕였다.

“아까 가장자리에 가까워졌을 땐 나도 그랬어.”

“우리도 소나 염소처럼 눈가리개를 쓰고 나아가야 할지도 모르겠군.” 힐라룸은 농담하듯 중얼거렸다.

“여기서 더 위로 올라가면 우리도 높은 곳을 두려워하게 될 거라고 생각해?”

힐라룸은 이 말에 관해 생각했다. 그러나 그는 이런 생각을 재빨리 머리에서 떨쳐냈다. 몇 천명이나 되는 사람이 아무런 두려움 없이 이곳을 올라오지 않았던가. 단 한 사람의 광부가 느끼는 두려움에 모두가 전염되는 것은 바보짓이었다.


땅을 딛고 살아가는 사람들은 하늘 위로든 땅 아래로든 떠나는 것을 본능적으로 두려워합니다. 누군가는 좌절하고 누군가는 견딜 뿐 모두 공포를 느낍니다.


그리고 이러한 공포가 존재하지 않는 주민들의 이야기에서 탑은 거의 만저질듯 가까이 다가옵니다. 


광부 일행이 탑을 더 올라가자 탑에서 더 이상 땅을 볼 수 없게 됩니다. 탑은 위로 보나 아래로 보나 똑 같이 허공에 떠 있는 실처럼 보입니다. 땅에서부터의 연속성이 사라지자 힐라 룸은 두려움을 느낍니다. 그러나 탑이 지어지는 수 세기 동안 탑에서 나고 자란 사람들은 땅이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해 어떠한 불안도 느끼지 않고 살아갑니다.


언젠가 작가 김영하는 부유함을 가장 잘 드러낼 수 있는 것은 가난에 대한 무지라고 했습니다. 땅에 대한 무지는 발 디딜 땅이 없음에 대한 공포, 허공에서 살아가는 공포의 씨앗마저도 없애버립니다.


The devil is in the detail

이렇듯 테드 창은 아주 사소한 곳에서 현실성을 만들어 냅니다. 아니 사소한 부분마저 구체적이기 때문에 현실성이 부여됩니다. 비록 그 세계는 하늘에 닿는 탑이 있는 세계이고 미래를 회상할 수 있는 세계이지만 책을 읽는 순간만큼은 지금 내가 있는 현실보다 더 현실적으로 다가옵니다.


뜬금없이 나타난 이상한 세계 속에서 캐릭터의 합리적인 선택의 결과가 우리를 그 세계로 속으로 대려다 줄 때, 이 맛에 단편소설을 읽지. 하는 생각이 듭니다.



'당신 인생의 이야기'에 나오는 '페르마의 원리'를 설명하는 방식이 마음에 드신 분은 '최소 작용의 원리' 나 라그랑지안, 헤밀 토니 안 등을 찾아보시기 바랍니다. 처음 그 내용을 읽었을 때 정말로 세상이 뒤집히는 것 같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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