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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공학자의 책장 Oct 12. 2019

EVERYMAN

에브리맨-필립 로스

가장 먼저 나누고 싶은 이야기는 바로 우리 모두의 이야기, 에브리맨입니다.


그러나 가장 가슴 아린 것, 모든 것을 압도하는 죽음이라는 현실을 한 번 더 각인시킨 것은 바로 그것이 그렇게 흔해 빠졌다는 점이었다.


에브리맨은 주인공인 ‘그’의 장례식 장면으로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장례식장에는 많은 사람들이 참석하고 그의 삶을 기억합니다. 하나뿐인 형은 그를 추억하며 둘의 어린 시절을 되살려 내고, 첫 번째 부인 사이에서 낳은 아들들은 관 위에 흙을 덮을 때, 아버지에 대한 적대감 아래에 묻혀 드러나지 않았던 복잡한 감정을 경험합니다. 한때 그를 사랑했던 사람들은 슬픔 속에 그를 보냅니다.


한 사람의 죽음은 그 사람에게 있어서는 평생에 한 번뿐인 특별한 일이지만, 누군가의 죽음은 너무 흔해서 쉽게 잊힙니다. 몇 분 지나지 않아 그의 장례식이 끝나고 사람들은 떠납니다. 그러나 ‘그’는 홀로 남아있습니다.


그는 보석상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아주 어린 나이부터 아버지의 일을 도우며 보석을 다뤘죠. 그러다 어느 날 그는 탈장으로 입원을 하게 됩니다. 같은 병실의 한 아이가 죽어가는 것을 보며 사람이 그렇게 쉽게 죽을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그는 무사히 퇴원하였고 그의 삶은 다시 의미를 지니는 듯 보였습니다. 그는 미술을 전공하였고 그림을 그리고 살고자 하는 마음이 있었지만 부모의 기대에 부응하고자 취직을 하고, 결혼을 하고, 자식을 낳습니다. 그러나 결혼은 그의 감옥이 되었습니다. 그는 이혼을 하였고 이 이후로 그는 삶의 무의미함에 대한 예감 같은 것을 느끼게 됩니다.


그는 곧 자신의 두 번째 부인이 될 피비와 긴 여행을 떠납니다. 피비와 함께하는 삶은 무척이나 마음에 들었지만 밤의 해변을 산책할 때면 그는 어두운 바다와 별이 가득한 하늘을 보며 겁을 먹었습니다.


“힘차게 쿵쿵거리며 밀려들어오는 어두운 바다와 별이 가득한 하늘 때문에 피비는 환희에 젖었지만 그는 겁을 먹었다. 수많은 별은 그가 죽을 운명이라고 분명하게 말하고 있었다.”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젊을 때 가졌던 많은 것들이 그를 떠나갔습니다. 우선은 건강을 잃었습니다. 복막염과 협심증을 겪었고 바보같은 불륜으로 자신을 진정으로 사랑했던 피비를 떠나보냅니다. 평생 그를 지지해주고  사랑하던 형이 있었지만 매일 죽음을 향해 나아가는 그와 달리 형은 잔병하나 없이 건강하다는 이유로 시기합니다. 그가 광고계에서 이룬 성공은 은퇴를 하고 나자 무의미 해집니다.


세 번째 부인과 이혼한 후에 그는 실버타운에 정착해서 어릴 적 꿈이었던 화가가 되고자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몇 년이 지나자 그것도 지겨워졌습니다. 그의 그림 중 몇몇은 비싼 가격에 팔리기도 했지만 그가 세상에 보여줄 것은 더 이상 없었습니다.


“어쩌면 지금까지 쭉 그래 왔을 것이다. 그림은 귀신을 물리치는 일과 같았던 것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어떤 악한 것을 몰아내려고 했던 걸까? 그의 가장 오래된 자기기만? 아니면 살려고 태어났지만 사는 것이 아니라 죽는다는 지식으로부터 구원을 얻으려는 시도로 그림에 달려든 것일까? 갑자기 무에 빠져버렸다.”


그림을 그리는 것을 중단하자 시간을 보내는 것이 고통스러워졌습니다. 꾸준히 운동을 하며 몸은 더 건강해졌지만 그보다 중요한 것, 바로 삶의 의미를 잃어가고 있었습니다. 평생을 걸쳐 모으고 공부했던 책들이 왠지 우스꽝스럽게 보이고 평생을 바쳐온 일이 별거 아닌것처럼 느껴집니다. 실버타운의 거주자들과 대화를 해 보기도 했지만 그들은 손자들에 대해 이야기하고, 자신의 존재 이유 역시 손자들에게서 찾고 있었습니다. 이미 수십 년의 결혼생활을 거친 거주자들은 결혼의 행복에 여전히 묶여 있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더 이상 실버타운에 어울리지 않는다는 생각을 합니다.


“그 어떤 것도 그의 호기심에 불을 붙이지 못했고 그의 요구에도 답을 해주지도 못했다. 그의 그림도, 그의 가족도, 그의 이웃도. 아침에 널을 깐 산책로에서 그의 옆에서 조깅하는 젊은 여자들을 빼면 아무것도. 맙소사, 그는 생각했다, 한 때 나였던 남자! 나를 둘러쌌던 생활! 나의 것이었던 힘! 그때는 어디에서도 ‘이질감’은 느낄 수 없었다! 한 때는 나도 완전한 인간이었는데.”


젊은 시절의 힘이 그리웠던 그는 종종 인사를 하던 젊은 여자를 만나러 갑니다. 조깅을 하던 그녀를 불러 새워 잠시 이야기를 하자고 합니다. 마침 그녀는 광고회사에 다니고 있었고 그가 평생을 일해온 회사 이름을 알려주자 그녀는 감명받은 모습을 보입니다.


그는 “할 마음 있어요?” 하고 물어보았고, 그녀는 “뭘 생각하시는 건데요?” 하고 대답했다. 이제 어쩐담? 그는 선글라스를 벗었다. 그가 그녀를 뚫어져라 쳐다볼 때 그녀가 그의 눈을 보게 하려는 것이다. 이 여자가 그런 식으로 대답을 했을 때, 자기 말에 숨을 뜻을 이해한 걸까? 아니면 그냥 무슨 말인가 해야 하기 때문에 한 것뿐일까? 속으로는 겁을 먹고 힘겨워하면서도 자기 자신을 얼마든지 감당할 수 있는 사람처럼 행동하려고. 삼십 년 전이라면 그는, 비록 젊은 여자라고는 하나, 이 여자를 쫓아갔을 때 그 결과가 어떨지 의심하지 않았을 것이다. 수치스럽게 거부당할 가능성은 떠오르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 자신감이 주던 기쁨은 사라졌다.


그는 그녀에게 번호를 주었지만 그녀는 연락이 오지 않았습니다.


노년은 전투가 아니다. 노년은 대학살이다.


이후 그는 실버타운을 떠나 다시 뉴욕으로 돌아갑니다. 뉴욕에 도착하자 안 좋은 소식이 연달아 들려옵니다. 두 번째 부인인 피비는 뇌졸중으로 쓰러지고, 자신이 존경하는 상사는 죽었으며, 옛 동료들은 정신병원에 입원해 있거나 항암치료를 받고 있습니다.


그러나 죽어가는 것은 동료들 뿐만이 아니었습니다. 건강검진 결과 그 자신도 경동맥이 막혀 수술이 필요했습니다. 연속해서 7년의 입원이었습니다. 딸은 어머니를 돌봐야 했고, 형의 건강에 대한 시기로 형에게 연락을 하지 않은 지 꽤 시간이 지난 상태였기에 그는 홀로 수술을 받으러 갔습니다. 그리고 그는 수술실에서 살아서 돌아오지 못했습니다.


“-스스로 자초한 것이다. 마치 그에게 의미가 있는 사람들 가운데 세상에 남은 사람이 이미 줄어들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기라도 하는 것처럼, 그는 최초의 가족의 해체를 완료해버렸다.”

"자신이 없애버린 모든 것, 이렇다 할 이유도 없는 것 같은데 스스로 없애버린 모든 것, 더 심각한 일이지만, 자신의 모든 의도와는 반대로, 자신의 의지와는 반대로 없애버린 모든 것을 깨닫자, 자신에게 한 번도 가혹하지 않았던, 늘 그를 위로해주고 도와주었던 형에게 가혹했던 것을 깨닫자, 자신이 가족을 버린 것이 자식에게 주었을 영향을 깨닫자, 그는 주먹으로 가슴을 치기 시작했다. 그의 자책에 박자를 맞추어 쳤다. 보통 냉정하던 이 사람은 마치 기도하는 광신도처럼 사납게 자기 가슴을 쳤다. 이 실수만이 아니라 자신의 모든 실수, 모든 뿌리 깊고, 멍청하고, 피할 수 없는 가책에 시달리다 그는 큰 소리로 말했다. “심지어 하위도 업어! 이렇게, 심지어 하위도 없이 끝이 나다니!”


보석의 가치는 어디에 있을까요? 보석이 아름다움을 넘어서는 가치를 지니는 것은 그것이 불멸이기 때문입니다. 보석상의 아들이었던 그는 계속되는 입원과 수술에도 불구하고 다시 살아나고야 말겠다는 삶에 대한 집착이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죽었습니다. 자신이 가졌던 모든 것을 잃고 전신마취에서 깨어나지 못했습니다.


사람은 언젠가는 죽습니다. 보석이랑 다르죠. 그렇다면 삶의 가치는 무엇일까요? 그는 죽는 순간까지 그것을 찾지 못했습니다. 그에게 남은 것은 그를 진정으로 사랑해준 이들을 떠난 것에 대한 후회뿐이었습니다.


이 소설의 주인공의 이름이 끝끝내 나오지 않고 늘 '그'라는 3인칭 단수로 칭하는 것은 그의 삶이 우리 누구의 삶이라도 대변할 수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삶은 어느 날 갑자기 나에게 왔고, 어느 날 갑자기 떠납니다. 에브리맨은 우리 모두에게 주어진 시간은 한정되어 있고 내가 한 행동은 어떤 후회로도 되돌릴 수 없다는 것을 한 인간의 삶과 죽음을 통해 말합니다.


인간이 삶에서 의미를 찾고자 하는 시도는 끝없이 있어 왔습니다. 아마도 그 최전선에 문학이 있다고 이야기할 수도 있을 거 같습니다. 무수히 많은 시도가 있었지만 아직 삶의 의미에 대해서 명확한 대답이 나왔다는 생각은 들지 않습니다. 아니 오히려 문학은 삶 자체에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삶 자체에는 아무런 의미가 없으나 어떻게 사는지에 따라 우리는 삶의 무의미함에서 잠시나마 벗어날 수 있습니다. 삶의 의미는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만드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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