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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공학자의 책장 Dec 08. 2019

삼천육백오십삼일

이반 데니소비치, 수용소의 하루 - 알렉산드로 솔제니친

안녕하세요 공학자의 책장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오늘 소개드릴 책은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입니다.  


이 책은 한 인간이 수용소에서 보내는 하루를 통해 행복과 불행의 아이러니, 소비에트 체제의 아이러니를 드러내고 이것들을 통해 인간의 본성에 대한 깊은 성찰을 가능하게 합니다.   


행복과 불행 


여러분, 불행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나요? 불행이 무엇인지 이야기하는 것은 행복이 무엇인지 이야기하는 것만큼이나 어렵게 느껴집니다.  

행복과 불행에 관한 명언들은 많이 있지만 어떤 것이든 모든 행복과 불행을 설명하지는 못하는 듯합니다. 겉으로는 행복해 보이는 사람이 혼자 불행 속에서 살아가는 경우도 있고, 어떻게 저렇게 살지 싶은데 행복하게 사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라셀라스가 모든 것을 가졌지만 불행한 한 인간에 대한 이야기였다면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는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지만 그럭저럭 행복하게 살아가는 한 인간의 이야기입니다.  


슈호프는 2차 세계대전 중 독일군 포로가 되었다가 풀려났다는 죄목으로 수용소 10년형을 선고받았습니다. 그는 나름대로 기술도 있고 눈치도 있는 인물이라 수용소 생활에 잘 적응할 수 있었고 8년이 넘는 수용생활 동안 죽지 않고 생존할 수 있었습니다.  


그의 하루는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수용소에서의 하루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습니다.  


슈호프는 아주 흡족한 마음으로 잠이 든다. 오늘 하루는 그에게 아주 운이 좋은 날이었다. 영창에 들어가지도 않았고, <사회주의 생활단지>로 작업을 나가지도 않았으며, 점심 때는 죽 한 그릇을 속여 더 먹었다. 그리고 반장이 작업량 조정을 잘해서 오후에는 즐거운 마음으로 벽돌 쌓기도 했다. 줄칼 조각도 검사에 걸리지 않고 무사히 가지고 들어왔다. 저녁에는 체자리 대신 순번을 맡아주고 많은 벌이를 했으며, 잎담배도 사지 않았는가. 그리고 찌뿌드드하던 몸도 이젠 씻은 듯이 다 나았다. 눈앞이 캄캄한 그런 날이 아니었고, 거의 행복하다고 할 수 있는 그런 날이었다.

   

그의 하루는 참 단순하고 보잘것없어 보입니다. 고통을 피했다는 것에, 배 부르게 먹을 수 있었다는 것에 행복해하는 슈호프의 모습은 그가 얼마나 고통에 무감각 해졌는지를 잘 드러내 보입니다. 그리고 슈호프의 고통스러운 삶을 보며 우리가 얼마나 많은 것을 가지고 있는지 알게 됩니다.  


그런데 불행 속에서 살아가는 슈호프는 자신의 하루가 거의 행복했다고 합니다. 참 아이러니하지 않나요?  


행복은 불행 속에서만 찾을 수 있다는 말이 있습니다. 어쩌면 행복한 줄 모르는 우리는 행복 속에 사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소비에트적 인간 


슈호프의 행동을 보면 단지 밥을 먹기 위해 노동을 하는 것이 아니라는 걸 알게 됩니다.  강제노역임에도 그의 노동에는 경건함이 보입니다. 슈호프는 자신에게 주어진 일에 완전히 집중하고, 그 일을 빠르고 정확하게 완수하기 위해 최선을 다합니다. 슈호프에게 노동은 자아의 실현으로 보이기까지 합니다. 노동에서 자아를 실현하니는 이, 이런 사람을 흔히 소비에트적 인간이라고 합니다. 소련이 추구하는 인간상이죠.  



이제 슈호프의 눈에는 아무것도 들어오지 않는다. 눈부신 햇살을 받고 있는 눈 덮인 벌판도, 신호를 듣고 몰려나와 작업장을 이리저리 왔다 갔다 하는 죄수들도, 아침부터 파고 있던 구덩이를 아직껏 파지 못하고 또 그곳으로 걸어가는 죄수들도, 철근을 용접하러 가는 녀석들이며, 수리공장 건물에 마루를 얹으려고 가는 죄수들도 전혀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슈호프는 오직, 이제부터 쌓아 올릴 벽에만 온 신경을 집중했다. 그가 맡은 구역은 허리 높이까지 쌓아 올린 왼쪽부터, 킬리가스가 맡게 된 벽과 맞닿아 있는 오른쪽까지이다.  


소련 체제의 비합리성을 가장 잘 드러내는 수용소에서 소련 체제의 희생양 중 하나로 수용된 슈호프가 소비에트적인 인간의 면모를 보인다는 것 이런 아이러니가 또 없습니다.    



수용소 = 사회 


사회는 다양한 인간이 모여 이루어지고, 수용소 역시 다양한 인간이 모여 이루어집니다. 어떤 간수들은 자신들의 지위를 이용해 죄수들을 괴롭히기도 하고, 적당히 뇌물을 받으며 혜택을 누리게 해 줍니다.  부유한 죄수들은 소포로 들어오는 음식들을 적당히 뇌물로 제공하면서 편한 생활을 합니다. 간수들 입장에서도 소포를 모조리 압수해버리면 죄수가 더 이상 소포를 받지 않을 것이기에 적당히 취할 것만 취합니다. 부유한 죄수들 주변에 콩고물이 혹시 떨어지지 않을까 눈치를 보는 죄수도 있고, 그들의 편의를 봐주고 보상을 받는 슈호프 같은 인물도 있습니다.  



노동을 할 때 역시 틈만 나면 쉴 궁리를 하는 죄수들도 있고, 일단 주어진 일은 책임감을 가지고 마무리하는 죄수들도 있습니다. 리더는 더 많은 일을 받아서 팀 전체의 배급량을 늘리고, 팀원들은 미우면 미운대로 서로 힘을 합쳐 일을 끝내고 더 많이 고생한 이들이 더 많은 빵을 받습니다. 눈치가 빠르고 정직한 이들은 동료의 신임을 얻고 약삭빠른 밀정꾼들은 잠자는 사이에 죽어나갑니다. 


사회에서 격리되어 엄격하게 통제되어 생활하는 수용소라는 곳에서도 인간의 삶은 근본적으로 크게 바뀌지 않습니다.  


가끔 놀랍습니다. 인간이라는 것이 얼마나 다양하면서도 얼마나 똑같은지!  



자유 


슈호프는 하루를 마무리하기 전 오늘 하루도 영창을 가지 않았다는 것에 안도하며 혼잣말을 하다가 오 하느님… 이라는 말이 나와서 옆자리에 누워있는 알료쉬카와 짧은 대화를 나눕니다. 그는 슈호프에게 당신의 영혼이 하느님을 찾는데 왜 영혼이 원하는 대로 살지 못하느냐고 묻습니다.  


슈호프는 기도를 해봐야 생활이 바뀌는 것이 없다고 하지만 알료쉬카는 당장의 먹을 것이나 밖으로 나가는 것을 바라지 말고 우리 영혼에 관해 기도하라고 합니다. 


알료쉬카는 신을 믿는다는 이유로 수감되었고 그 때문에 수감생활은 그에게 신에게 다가가는 고행일뿐입니다.  

뭣 때문에 당신은 자유를 원하는 거죠? 만일 자유의 몸이 된다면, 당신의 마지막 남은 믿음마저도 잃어버리게 될 거예요. 감옥에 있다는 것을 즐거워하셔야 해요! 그래도 이곳에선 자신의 영혼에 대한 생각을 할 수 있으니까요. 


슈호프는 문득 자신이 정말 자유를 원하는지 한 번 고민해 봅니다.  


처음 수용소에 들어왔을 때는 아주 애타게 자유를 갈망했다. 밤마다 앞으로 남은 날짜를 세어보곤 했다. 그러나 얼마가 지난 후에는, 이젠 그것마저도 싫증이 났다. 


-중략-


이봐 알료쉬카 자네는 감옥살이를 한다고 해도 그다지 억울할 것이 없을 거야. 자넨, 그리스도의 명령에 따라 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해 감옥에 들어왔으니까. 하지만, 난 무엇 때문에 여기 들어왔지? 1941년 전쟁 준비를 갖추지 못했기 때문일까? 그렇다고 그게 나와 무슨 상관이 있단 말인가?


우리가 진정으로 자유로운 순간이 살면서 몇 번이나 있을까요? 우리가 내리는 모든 선택은 내 주변 환경에 의해 정해집니다. 그래서인지 ‘상황이 이래서….’라는 말 참 많이 쓰고 삽니다. 살아온 길을 돌아보면 우리의 운명은 거의 항상 타인에 의해 결정되는 것 같습니다. 공학을 하는 입장에서 나의 자유를 막는 구속조건들이 나를 발전시키는 원동력이라고 생각하지만요.    


양말 한 짝 받고 싶다...


글을 마치며...


비록 슈호프의 하루는 제 하루보다 춥고 힘겹고 배고프지만 저랑 슈호프랑 크게 다르지 않은 것도 하나 있습니다. 바로 일생이 하루의 반복이라는 것입니다. 오늘은 어제와 비슷하고, 내일은 오늘과 비슷할 것입니다.  


이렇게 슈호프는 그의 형기가 시작되어 끝나는 날까지 무려 십 년을, 그러니까 날수로 계산하면 삼천육백오십삼 일을 보냈다. 사흘을 더 수용소에서 보낸 것은 그 사이에 윤년이 들어있었기 때문이다.  


슈호프는 바라는 것 없이 불행을 피한 것에 만족하며 산 덕에 큰 문제없이 수용생활을 끝낼 수 있었습니다. 만약 자신이 가지지 못할 것들을 꿈꾸며, 매일 소시지와 흰 빵을 먹고, 담배를 원 없이 피기를 원했더라면 페츄코프처럼 맞고 다녔을 것이고 바깥의 생활을 못 잊었다면 중령처럼 영창에 갔을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수용소에 갇힌 것도 아닌데 왜 매일 똑같은 삶을 살아가는 것일까요?  


긴 글 끝까지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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