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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공학자의 책장 Feb 09. 2020

재앙에 대처하는 법

페스트 - 알베르 카뮈

안녕하세요 공학자의 책장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2020년은 잘 보내고 계신지요?  


1월에 참 많은 일들이 있었습니다. 개인적으로도 그렇고 세계적으로도 그랬죠. 중동에서는 전쟁이 일어날 뻔 했고, 지금은 우한 발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로 많은 사람들이 죽어가고 있습니다.  


중국에서는 이 문제가 확대되는 것을 막기위해 연휴를 늘리고 우한을 봉쇄하였는데요, 이 때문에 우한에 살고있는 분들이 겪는 불편함이 상당할 것이라 생각됩니다. 특히 식품과 의약품이 부족해지면 그곳에서 살아가는 분들은 더 혼란스럽고 두려울 것입니다.  


저도 작년 훈련소에서 독감에 걸려서 1주일간 격리치료를 받았었는데 좁은 병동에 갇혀서 24시간 감시당하면서 앓아 누워있는게 상당히 힘들었습니다. 평소에 TV를 보지 않다 보니 남는 시간 동안 할 수 있는 거라고는 책을 읽는 것 밖에 없었습니다. 그때 읽었던 책 중에 가장 기억에 남는 건 단연 페스트 인데요. 군대에서 전염병으로 격리당한 체 읽어보니 그 전까지는 먼 과거에 살던 타인의 이야기로만 여겨지던 이야기가 개인의 이야기로 다가왔습니다.  


페스트는 이방인으로 유명한 알베르 까뮈가 1947년 발표한 소설로  프랑스 오랑이라는 도시에서 페스트가 창궐하면서 일어난 일들을 적어 두었습니다.  


까뮈가 이 소설을 통해 표면적으로 보여주는 이야기는 전염병이라는 보이지 않는 위험에 둘러 쌓인 패쇠 된 마을이라는 빠져 나가지도, 피하지도 못하는 현실 속에서 고분분투하는 개인들 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페스트는 이방인에서 다루었던 부조리를 우리의 삶 한가운데로 가져온 것처럼 여겨집니다. 아인슈타인이 1905년 특수상대성이론을 발표하고 10년 뒤 더 범용적으로 적용되는 일반상대성이론을 발표한 것처럼 1942년 식민지에서 일어난 특수한 살인 사건을 통해 운명에 대한 인간의 반항을 이야기하는 이방인을 발표했던 카뮈는 5년뒤 세계의 역사에서 수없이 반복되었던 전염병을 통해 운명에 적극적으로 반항하는 인간들을 이야기하는 페스트를 발표합니다. 페스트라는 절망 속에서도 자신의 길을 걸어가는 리유와 타루, 그랑, 랑베르를 통해 우리는 좀 더 공감할만한 뫼르소를 만나게 됩니다.


페스트에서 이방인을 직접적으로 차용하는 부분도 있는데요 궁금하신 분들은 engineer’s bookshelf 인스타 계정에 들어오시면 확인 할 수 있습니다.   


재앙이란 모두가 다 같이 겪는 것이지만 막상 우리의 머리 위에 떨어지면 여간해서는 믿기 어려운 것이 된다. 이 세상에는 전쟁만큼이나 많은 페스트가 있어왔다. 그러면서도 페스트나 전쟁이나 마찬가지로 그것이 생겼을 때 사람들은 언제나 속수무책이었다.

“오래가지는 않겠지. 너무 어리석은 짓이야.” 전쟁이라는 것은 필경 너무나 어리석은 짓임에 틀림없는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전쟁이 오래가지 않는다는 법도 없는 것이다. 어리석음은 언제나 악착같은 것이다.

재앙이란 인간의 척도로 이해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재앙이 비현실적인 것이고 지나가는 악몽에 불과하다고 여긴다. 그러나 재앙은 항상 지나가 버리는 것은 아니다. 악몽에 악몽을 거듭하는 가운데 지나가 버리는 쪽은 사람들, 그것도 첫째로 휴머니스트들인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대비책을 세우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사업을 계속 했고 여행을 떠날 준비를 했고 제각기 의견을 지니고 있었다. 미래라든가 장소 이동이라든가 토론 같은 것을 금지해 버리는 페스트를 어떻게 그들이 상상인들 할 수 있었겠는가? 그들은 자신이 자유롭다고 믿고 있었지만 재앙이 존재하는 한 그 누구도 결코 자유로울 수는 없는 것이다.


재앙은 언제고 찾아오고 언제나 찾아옵니다. 그 앞에 개인은 무력합니다.  


관념과 현실

페스트에 휩쓸려 새 한 마리 볼 수 없게 된 아테네, 말없이 죽음의 고통에 몸부림치고 있는 사람들만 가득한 중국의 도시들, 썩은 물이 뚝뚝 떨어지는 시체들을 구덩이에 처넣고 있는 마르세유의 도형수들…


페스트는 어느날 갑자기 쥐들의 죽음과 함께 오랑에 찾아옵니다. 쥐들의 죽음은 사람들의 죽음으로 이어졌고, 사람들이 그것을 인지했을 때, 페스트는 이미 도시를 지배하고 있었습니다. 도시가 폐쇄되고 시민들은 죽음의 섬에 격리 당합니다. 사람들은 각자의 방법으로 페스트를 맞이합니다.  


의사로서 사명을 다하고자 하는 리유, 어떤 이유에서건 사람을 죽게 하고, 그 죽게 하는 행위를 정당화하는 일체의 것을 거부하기로 결심하고 자원봉사자 보건대를 조직하는 타루, 혼돈스러운 세상 속에서도 자신의 길을 묵묵히 이어나가던 조제프 그랑. 오직 사랑하는 연인을 다시 만나고 싶어 필사의 탈출을 시도하다가 마지막 순간에 보건대에 합류하는 기자 랑베르, 혼돈 속에서 세상에 자신을 찾은 코타르, 이 재앙을 신의 형벌이라고 선언한 파늘루 신부 이들의 모습은 재앙에 대처하는 우리들 개개인의 모습을 대변하는 듯 합니다.  


이들의 방식은 크게 두가지로 나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먼저 파늘루 신부로 대변되는 관념적 대응과 의사 리유로 대변되는 현실적 대응입니다.  


페스트 초기 오랑의 신부 파늘루는 출애굽기를 인용해 다음과 같은 설교를 합니다.


“이 재앙이 처음으로 역사상에 나타났을 때, 그것은 신에게 대적한 자들을 처부수기 위해서였습니다. 애굽 왕은 하느님의 영원한 뜻을 거역하였는지라 페스트가 그를 굴복시켰습니다. 태초부터 신의 재앙은 오만한 자들과 눈먼 자들을 그 발아래 꿇어앉혔습니다. 이 점을 잘 생각하고 무릎을 꿇으시오.”


이 논의에 사용되는 명제들은 관찰을 통해 참과 거짓을 판별한 것이 아니라는 점에서 연역적입니다.  


그 설교는 사람에게 자신들이 미지의 죄악 때문에 감금 상태를 선고받았다는 생각을 하게 만들었고 페스트가 천벌이라는 첫번째 명제에 동의하는 순간 인간은 속죄와 순응을 강요받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재앙에 대한 본질적인 해결책이 되지 못합니다. 페스트가 죄지은 어른들 뿐만 아니라 죄 없는 어린이들까지 죽음으로 몰아가는 장면은 죽음이라는 필연은 아무런 이유도 없이 찾아온다는 것을 잘 보여 줍니다.  


반면 자신의 손으로 환자들을 치료한 리유는 자신의 눈 앞에 일어나는 참상이 페스트에 의한 것이라는 것을 인식하며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페스트’라는 말이 입 밖에 나온 것도 사실이고, 바로 이 순간에도 재앙이 희생자 두서넛을 후려쳐서 쓰러뜨리고 있는 것도 사실이었다. 마땅히 해야 할 일은 쓸데없는 두려움의 그림자를 쫓아 버린 다음 적절한 대책을 세우는 것이다. 그럼 다음에야 비로소 페스트가 멎을 것이다. 왜냐하면 페스트가 머릿속에서의 상상, 머릿속에서의 그릇된 상상이 아니게 될 터이기 때문이다. 만약 페스트가 멎는다면 모든 일은 잘 될 것이다. 그 반대의 경우라면, 우리는 페스트가 어떤 것인지를 알게 될 것이고, 우선은 그에 대비하는 조처를 취하고 다음으로는 그것과 싸워서 이기는 방법이 있는지를 알게 될 것이다.


리유의 대응은 귀납적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머릿속에서의 그릇된 상상에서 벗어나 현실을 바라봅니다. 현실에서 정보를 얻고, 전략을 수립하고, 대응을 합니다. 관념적 공포를 극복하고 사람들과 힘을 합쳐 페스트에 맞서 싸웁니다.


리유와 함께 힘을 합쳐 사람들을 도운 인물로는 보건대의 일원이었던 타루, 그랑, 랑베르가 있습니다.


초기에 관찰자적 입장을 고수하던 타루는 점차 이야기의 중심으로 들어와 보건대를 만들고 환자들을 돕기 위해 고군분투했지만 페스트가 사그라들 무렵 페스트에 걸려 죽습니다.


그랑은 혼돈 속의 도시에서 자기이 해야할 일을 묵묵히 이어나갈 뿐 아니라 사랑과 선의 그리고 예술이 가진 힘을 보여주는 인물입니다.


기자인 랑베르는 페스트로 도시가 폐쇄되자 어떤 식으로든 도시를 벗어날 방법을 찾습니다. 그리고 결국 도시를 나갈 수 있게 되죠. 그러나 그는 도시에 남기를 선택합니다.  


이들는 종교지도자인 파늘루와 의사인 리유와 달리 조금 더 우리에게 가까운 인물로 그려집니다. 이들은 자신 앞에 펼쳐진 재앙으로부터 거리를 두려고 했었지만 벗어나지 못합니다. 아니 오히려 재앙 속으로 들어가기를 선택합니다. 이들은 공포에 현혹되지 않고 남을 돕기를 선택했고 힘들어하는 이들과 함께합니다.  


타루가 페스트로부터 도망쳤다면 그는 과연 살아남을 수 있었을까요? 잘 모르겠습니다. 살았을 수도 있겠습니다. 그런데 그는 어차피 죽게 될 것입니다. 사람이니까요. 살고 죽고는 선택의 문제가 아닙니다. 다만 거기에 어떻게 대응할지는 선택의 문제입니다. 죽음의 직전까지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보고, 현혹되지 않고 죽음에 저항하겠다는 것, 그건 선택입니다.  


“리유”  하고 마침내 그는 또박또박 말을 꺼냈다. “사실대로 말해 주세요. 그럴 필요가 있어요.”

“약속하지요.”

타루는 그 두툼한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웃었다.

“고마워요. 나는 죽고 싶지 않아요. 그러니 싸워 보겠어요. 그러나 지는 판이면 깨끗하게 최후를 마치고 싶어요.”


타루가 죽고 얼마 안되 오랑 시는 페스트에서 해방됩니다. 사람들은 환호성을 지르며 자신들의 승리를 축하하지만 사실 어디에도 승리는 없었습니다.  


시내에서 올라오는 환희의 외침 소리에 귀를 귀울이면서, 리유는 그러한 환희가 항상 위협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상기하고 있었다. 왜냐하면 그는 그 기쁨에 들떠 있는 군중이 모르는 사실, 즉 페스트균을 결코 죽거나 소멸되지 않으며, 그 균은 수 십 년간 가구나 옷가지들 속에서 잠자고 있을 수 있고, 방이나 지하실이나 트렁크나 손수건이나 낡은 서류 같은 것들 속에서 꾸준히 살아남아 있다가 아마 언젠가는 인간들에게 불행과 교훈을 가져다주기 위해서 또다시 저 쥐들을 흔들어 깨워서 어느 행복한 도시로 그것들을 몰아넣어 거기서 죽게 할 날이 온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본다면 인간의 죽음은 극복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어떤 종교도, 어떤 과학도 아직까지 이 사실을 바꾸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반항할 수 있습니다. 타루의 죽음은 이것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건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어쩌면 우리에게 주어진 유일한 자유는 의미 없어 보이는 삶을 의미 있게 만들어보려는 시도, 무의미에 대한 반항일 것입니다.  


까뮈는 이방인에 이어 페스트에서도 종교에 대한 회의감을 숨기지 않았지만 소설 속 등장인물들의 행동은 어딘지 성스러움이 느껴집니다.  


관념에 현혹되지 않고 현실을 그대로 보려고 노력하는 한 운명에 대한 인간의 반항은 계속될 것입니다.  


R.I.P

Li Wenlia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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