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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다다 Jul 06. 2021

이력서를 낸다는 건 뭘까?

이 허기의 정체는


몇 통의 이력서를 쓰셨어요? 저는 몇 통의 이력서를 썼을까요? 제 컴퓨터 속에는 2007년부터의 이력서가 쌓여있습니다. 졸업일 같은 숫자를 참조하려고 둔 것도 있고 그냥 대체 나는 어디 문을 두드리며 산 거야 알고 싶어 놔둔 면도 있습니다. 와~ 내 인생이 이리도 바빴던가 싶게 제 이력서는 전국 곳곳에 뿌려졌고, 그 중 인연을 맺은 곳보다 인연을 맺지 않은 곳이 더 많습니다. 나만 그런 건가 했는데 드라마 같은 데 보면 이력서를 몇백 통 내서 합격한 그런 이야기도 있으니, 나만 그런 게 아닌가봉가 하지만 그렇다고 자괴감이 덜어지지는 않습니다. 옛날에는 나를 회쳐서 이력서를 쓰는 일에 대해 소설을 써볼까도 했어요. 하지만 이 이력서를 들여다보는 것 자체가 고역이라, 완성하지 못했습니다.  



나를 회 쳐서 이력서 쓰는 기분 아세요? 대부분 그렇겠지요.  


이전 회사를 나오며 다시는 회사 취직은 어렵겠지 생각했습니다. 나이는 마흔, 직장 경력의 정점을 찍고 나온 게 아닐까 싶었어요. 당시 바로 이직하지 않으면 대부분 그러하니까요. 저는 참 누구라도 그러하듯이 노래를 좋아하는데, 이런 상황에서 그 노래는 좀 슬프네요.  



어제는 오랜만에 이력서를 쓰며 파일들을 잠시 열었습니다. 봉인돼 있던 문이 열리듯 이력서 폴더가 열리고, 기분이 이상해졌습니다. 오랜만에 고깃감이 되어 도마에 누워있고 또 오랜만에 익숙하던 고깃감을 보며 칼을 손에 쥔 기분이요. 내게 아름다음을 주던 비늘은 맛과 상관없으니 빼내고 내 뼈를 이룬 것들도 누군가 맛 없어 할 것 같으면 빼내고, 맛있어보이는(대체 누구에게?) 살만 골라내 이력서를 쓰는 겁니다. 나는 발딱 엎드려 비늘도 뼈도 발라내지는 동시에, 칼을 들고 제일 맛있어보이는 살만 골라내고 있습니다. 이건, 뭔가, 정신분열적인 일 아닌가요?  



홍보 비스무리 업무를 하던 저는, 수목원에 취직하고 싶었습니다. 꽃이나 나무 이런 것을 보면 좋잖아요. 그냥, 아무 것도 안 해도 좋으니까요. 저만 그런 게 아니고, 제가 오늘 도서관에 반납하기 전 몇 구절 옮겨적은 책에도 그런 말이 있었어요.


거대하면 거룩하고 작으면 아름답다. 크면 숭고이고, 작아야 눈부시다. 작은 것들이 가만히 서 있는 것보다 바람결에 흔들릴 때 사람의 마음도 흔들린다. 그때 빛이 자연 속에서 아름다운 액센트를 만든다. 그 광채가 숭고와 신화보다 순간의 눈부심을 만들고, 그 눈부심을 우주의 미소다.
-<감히, 아름다움>, 배병우, p.232


나 혼자 그런 게 아니라 다들 그런 감각 같은 게 있는 거죠. 공통감. 수목원에서 느끼는, 나무가 흔들리고 초록이고 연두이고 할 때 행복감. 알 수 없이 그냥 좋은. 그래서 수목원에 이력서를 넣었습니다. 나무가 좋아서, 바다가 좋아서, 여기 왔으니 합당한 일이 아닌가 싶었어요. 돈도 벌어야 하구요. 돈이 없으면 쪼들리고, 집에 있는 식재료로도 당분간은 먹고 살 수 있지만(제 최근 수입의 마지막 돈으로 이마트 적금을 부어 쿠폰을 쓰느라 식재료를 엄청 사놨습니다. 5만원어치 10만원어치 사야 쿠폰을 쓸 수 있으니 이것저것 주워 담았어요. 그러는 내가 참 별로인데 하면서도요. 그냥 그날그날 먹고 살 것을 먹으면 되는데 왜 이리 주워담아 쟁여놔야 하지, 이것은 내 욕망인가 나는 거대자본의 노리개인가 내 욕망의 크기가 빙하를 녹이는데 빙하가 녹는 것은 걱정하면서도 쓸어담아 이 자본주의의 바퀴를 굴리는 나는 누구일까 하면서요), 그래도 수목원이니까요. 최저임금을 받고 식물 데이터베이스를 구축하는 일입니다. 잘은 모르지만, 수목원이니까, 집에서 좀 멀긴 한데, 그래도 하면서 이력서를 내러갔어요.  



<감히, 아름다움> 책을 다 읽고 정리하고 도서관에 반납하고 도서관에서 이력서를 출력해 수목원에 도착하니 5시 반이었습니다. 출입구에서는 수목원 입장시간이 마감됐다고 하더군요. 5월 중순의 5시 반 수목원에 드는 빛은 아름답지만, 입장은 불가합니다. 그래도 이력서를 내러 왔다니, 저기로 가라며 사무실을 가리켰습니다. 이력서를 내고 나와도 여전히 5시 반 수목원 나무들 사이로 빛이 찰랑대고, 그 풍경을 보러 왔다 생각해야지, 그냥 외출 나온 거다 생각해야지 하며 그 동네 유명하다는 돈까스집에서 반반까스를 먹고 지는 빛 속에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이력서를 내고 온 날은, 꼭 일하다 나를 잃어버리고 온 예전의 그날 같은 기분이 되고 맙니다. 옷도 벗지 못하고, 가만히 앉아서 주린이가 되어 주식을 들여다보지만, 어딘가 잃어버린 나는 그 지는 빛 속에 있나, 그 시간 속에 있나 하면서, 앉아만 있었습니다.  



그러다 동네 친구집에 돈까스집에서 남겨온 생선까스를 주고 주문진수산시장에서 샀다는 청어와 이면수를 한마리씩 얻는 물물교환을 한 뒤 바닷가를 걷다 돌아왔습니다.  



5월은 아카시아 계절이지요. 이팝은 가로수로 아름답지만, 아카시아의 향은 이길 수 없잖아요. 5월은 하얀 꽃이 무더기로 피는 계절이구나, 오랜만에 실감할 수 있게, 밤이 돼버린 하늘에 아카시아가 반짝이고 있었습니다. 코끝을 맴도는 아카시아향과 함께, 거기 아름다움이 있었다고, 오래 기억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집에 들어와 창을 열고 아카시아 냄새가 나나 서성이는 동안 냥님들은 얘가 왜 이래 하면서 이상해진 제 동태를 살폈구요, 그러나 이력서의 여파로 저는 또 집에 와서 옷도 갈아입지 않고 앉아있다 주린이가 되었다 반반까스도 먹어 배가 부른데 풍경도 향기도 좋은데 나는 왜 이리 마음이 허기지지 하며 앉아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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