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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다다 Jul 09. 2021

강릉에서 살고 있으니까

내일 뭘 하지 심각하게 전날 밤 고민합니다. 내가 좋아하는 일들을 적어보고, 그것들을 차례대로 해보기도 하는데, 한정된 재화 속에서 이 삶을 누릴 수 있는 방향으로 생각이 가게 됩니다. 가보고 싶은 이곳저곳을 적어보기도 하고, 하고 싶은 행위를 적어보기도 하는데, 대부분 예전에 아, 시간이 생기면 할 거야, 했던 일들입니다. 그냥 아무데나 좋아보이는 데를 걷고, 가서 책 보고, 멍때리고, 그런 겁니다.    


      

어젯밤 결정하기로는 파라솔을 빌려 바닷가에 앉아서 책 보다 물에 잠깐 들어가기도 하는 거였는데, 장마철라는데도 날이 맑아 바다에 잠깐씩 몸 담그다 나와서 책 보려고 했는데, 파라솔을 빌릴 수 없게 되었습니다. 계획을 변경하더라도 오늘은 밖에 나가야지 하고 생각한 데가 솔숲이 있는 해변이었습니다. 아직 알려지지 않아 평일에는 비교적 한산한 해변에서 두 달 즈음 전에 텐트를 치고 자기도 했습니다. 거기라면 볕을 피해 바다도 보고 책도 읽기 좋겠다 싶어 두 시간 반 정도 해변 앞 솔숲에 돗자리를 깔고 앉아 책을보고 커피를 홀짝이다 왔습니다.     



주변에는 돗자리 깔고 앉아 솔숲에서 고스톱 치는 어르신들이며, 바다 멍때리는 부부나 연인들이 두 커플 정도 있었고요, 친구들끼리 와서 깔깔거리거나 사진을 찍기도 하였습니다. 거기 앉아서 오래전에 읽다 만 책을 다시 처음부터 읽어 이야기 하나가 끝날 때까지 읽었습니다. 눕기도 하고, 앉기도 하고, 엎드리기도 하면서요.     



바람이 쌀쌀하다 싶어 집에 돌아와 쿠지라기식 라면(프라이팬+라면물 반+라면+치즈+달걀)을 하나 끓여 먹으며 ‘맛있는데’를 3번쯤 외치고 이 동네 최고 핫플인 하나로마트에 2천보를 걸어가 달걀과 두부를 사왔습니다.     



집에서 하나로마트 가는 길은 솔숲을 지나고 돌아올 때는 6번국도 종점을 지나 연곡천에서 보이는 갈매기들 쉼터를 지납니다. 어떤 날은 모랫길이 연결되고 어떤 날은 끊기는 그 길이 오늘은 연결되어 있나, 아닌가 보면 대부분 길은 끊겨 있습니다. 연결된 날은 꼭 가봐야지 하지만, 아직 한번도 가보지 못했습니다. 거기는 낚시하는 분들도 꽤 있는데, 밀려오는 파도 앞에 주르르 늘어서 고기를 기다립니다. 갈매기들 쉼터는 사람 먹을 것도 많구나, 싶은 그런 곳인데, 오늘도 한 사람이 거기 서서 파도 앞에 서있었습니다. 파도를 마주 보고 서있는 한 사람을 보는 건 왠지 모르게 기분이 이상하고요, 그런 채로 길을 걸으면 방파제가 있고 턴하는 순간 바다가 있겠지 하는데 정말 바다가 있습니다.      



예전에는 저기 멀리 바다가 있을 것 같아, 하던 곳들에도 바다는 없어서, 아, 이 기분은 뭘까 했는데, 이제는 아, 여기를 돌면 바다가 있을 것 같아, 하는 곳에 바다가 있습니다. 방파제에 낚시 하는 사람들이 있고요, 저 방파제를 한번도 안 가봤는데 지금은 짐이 있으니 다음에 가봐야지, 하며 돌아서고 얼마 지나지 않아 비가 내리기 시작했습니다. 비를 본 것과 바다를 본 것이 거의 같은 순간일 정도로, 이런 순간에는 리 오스카의 ‘비포 더 레인’이 나와야 하는 게 싶게 빗소리가 굵었고, 다행히 예보를 보고 나와 우산을 가져왔기에 우산을 펼쳐들고 바다 옆 데크에 들어섰을 때 바닷가에 있던 사람들이 어딘가로 재빠르게 피신하고는, 바다에는 노란 파라솔 한 채 아래 사람이 있을 뿐 고요했습니다.      




비가 거세게 내리고, 호우주의보가 뜨는 와중에 번개가 치고 천둥이 치고, 빗소리가 우산을 때리고, 점점 물안개가 차오르며, 멀리 등대 불빛만 보이기 시작할 때, 아, 이래서 등대가 필요하구나, 멀리 주문진 등대 불빛이 밝아질 때면 정말 저 빛은 보이네, 하면서 한동안 바닷가에 서있다 비에 홀딱 젖어 집에 돌아오니, 오늘도 9천보를 걸었고요, 샤워를 하고 나오니 저녁이 지나고 밤이 왔습니다.

     


왠지 이 풍경은 오래 기억에 남겠구나 싶은 그런 날이 있잖아요. 오늘의 풍경은 그렇지 않을까, 내가 강릉에 왔고, 이렇게 된 바에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해야지 했는데 그렇게 살고 있구나, 그런 날의 풍경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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