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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림림 Sep 06. 2019

토지, 금기와 여인들

얼마 전 리디북스에서 토지 세트를 10%싸게 판매하는 것을 알게 되었다. 가격이 꽤 비쌌기에 살까말까 고민했지만 결국 지르고 말았다. 언젠가 꼭 구입하고 싶다고 생각했던 책이여서 모르면 몰랐어도 알면서 안 살 수는 없었다.


사실 나는 대하 소설을 좋아하지 않는다. 성격이 급해서인지 빨리 끝나는 것을 선호한다. 이런 이유로 대하 소설을 가까이한 적이 손에 꼽는데 유일하게 본 대하소설이 있으니 그것이 바로 ‘토지’다.


청소년 시절 어린이 토지를 읽었다. 인물들이 많아 조금 버거운 감도 있었지만 그래도 재밌었다. 토지를 읽으면 내가 그 시대에 있는 거 같았고, 굵은 물줄기같이 강력한 힘이 느껴졌다. 사실 어두운 이야기를 안 좋아하는데도 이상하게도 토지는 읽게 되는 묘한 힘을 가지고 있었다.


토지를 읽고 얼마 후 드라마 토지가 방영되었고 나는 열심히 시청했다. 약 2-3년전 다시 드라마를 보게 되었다. 대사가 분명 구어체가 아닌 문어체인데도 거슬리지가 않는다. 가슴속 무언가를 툭툭 건드렸다.


그로부터 얼마 후, 토지를 치정 중심으로 다시 읽었다. 일을 위한 분석이라는 구차한 변명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러다 신기한 것을 발견했다. 토지의 주인공 최서희와 그녀의 어머니 별당아씨, 그리고 할머니 윤씨 부인이 금기와 관련있다는 것 때문이었다.


먼저 윤씨 부인부터 보자. 그녀는 절에 불공을 드리러 갔다가 동학당 김개주에게 겁탈을 당하고 김환(구천)을 낳는다. 물론 그녀의 의지와 전혀 관계없이 벌어진 일이었지만 당시 사회 풍습상 용인 될 수 없는 일이었다. 이 일은 그녀의 몸과 마음에 크나큰 상처였을 것이다.


김개주에 대한 윤씨 부인의 마음이 정확히 어땠는지 모르겠다. 내가 놓쳤을 지도 모르지만 윤씨 부인이 김개주에 대해 어떤 마음이었는지 정확한 서술은 나오지 않았다.


하지만 그래도 김개주한테 아주 작은 감정(증오든 무엇이든)이라도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 김개주가 죽었다는 것을 듣고 윤씨 부인은 눈물을 흘렀다. 소설에는 정확히 이렇게 서술되어 있다.


‘윤씨는 김개주가 전주 감영에서 효수되었다는 말을 문의원으로부터 들었을 때, 무쇠 같은 이 여인의 눈에 한 줄기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 다음으로 최서희의 어머니 별당 아씨. 모두 잘 알겠지만 김환과 도망쳤다. 김환은 윤씨 부인의 아들이기에 결론적으로 시동생과 바람핀 게 된다. 그야말로 엄청난 막장이다.


근데 사실 나는 두 사람이 광에서 도망치기 전 정말 부적절한 관계였는지는 모르겠다. 광에 갇히기 전두 사람이 은밀한 시간을 갖는다거나 이러한 장면이 없었다. 그저 사람들이 부적절한 관계라하여 광에 갇히고 (윤씨 부인이 광을 열어주어) 연기처럼 사라진 것만 나온다.


마지막으로 최서희. 최서희는 머슴인 김길상과 혼인했다. 물론 신분제가 철폐되었기에 법적으로 두사람의 신분은 동등하였으나 사람들의 인식에는 양반과 상놈의 구분이 지워지지 않았던 시대였다. 그런데도 최서희는 김길상과 혼인한다.


혹자는 최서희가 다시 고향으로 돌아가기 위해 김길상과 전략적인 혼인을 한 것이 아니냐는 생각을 할 수 있으나 내 생각은 다르다. 최서희에게 김길상은 유일한 존재이고 사랑이었다.


좋아하던 이도령이 고향에서 이미 결혼한 것을 알고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던 최서희였다. 그런 최서희가 김길상이 가스댁(과부댁)에게 마음을 주는 것 같자 자존심을 버리고 찾아간다. 가스댁의 집에서 김길상의 목도리를 발견하고 동요하지만 이내 비슷한 목도리를 사서 숙소로 돌아온다.


물론 그것이 김길상의 자존심을 건드려 두 사람이 싸우게 되지만 말이다. 한번도 자존심을 꺽은 적이 없는 최서희가 자존심을 꺽은 유일한 상대가 김길상이다.


윤씨 부인, 별당 아씨, 최서희. 세 인물이 모두 금기시 되는 관계를 맺었다는 것은 우연이라 보기 어렵다. 아마 세 인물을 통해서 박경리 작가님이 하시고 싶은 이야기가 있었으리라 생각한다.


좁은 식견으로 유추해보건데 금기(족쇄)에 여인들의 삶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보여준 것이 아닐까 생각이 든다.


공교롭게도 세 인물 다 남자의 신분이 낮다. 김개주는 중인이었고, 김환은 양반이라 할 수는 없는 신분이었으며, 김길상은 머슴이었다.


여기에 윤씨 부인과 별당 아씨는 기혼자이기까지 하니 족쇄는 더 강해진다. 근데 참 이상하게도 윤씨 부인과 별당아씨는 이 관계에서 주도적인 입장이 아니다. 윤씨 부인은 겁탈을 당했고, 별당 아씨는 의혹이 확인되지도 않은 상태에서 광에 갇히게 된다. 윤씨 부인이 풀어주지 않았다면 사실여부와 상관없이 목숨을 잃었을 수도 있다.


자신이 주도적으로 결정한 일이 아니더라도 족쇄가 채워진 이상 이 여인들이 할 수 있는 없었던 거 같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마음 한쪽이 좀 답답해지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그럼에도 한줄기 희망이 있으니 최서희와 김길상이다. 비록 김길상이 신분적 열등감 때문에 계속 밖으로 돌았을지언정(딴짓을 한건 아니고 독립운동을 했다.), 최서희는 김길상을 선택했고 가정을 이뤘다. 그래서 이 커플은 아린 한편 흐뭇하다.


그 끝이 비교적 행복해서 그런지 몰라도 나는 이 커플을 참 애정한다. 그들의 모습을 만날 생각에 가슴이 설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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