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시작해버렸다
화려한 내 일정 목록.
피아노, 일본어, 영어, 독서, 러닝, 헬스.
보기엔 참 그럴싸하다.
뭔가 열심히 사는 사람 같다.
그런데 실상은?
어떤 날은 피곤해서 쉬고,
어떤 날은 바빠서 못하고,
어떤 날은 그냥 안 하게 된다.
그래놓고 또,
어반스케치 강의를 신청했다.
기존 것들만 해도 벅찬데 말이다.
처음 수강신청할 땐 별 생각 없었다.
'재밌겠는데?'
그런데 개강 날이 다가올수록,
점점 후회가 밀려왔다.
'왜 신청했지?'
첫 수업 날.
별로 가고 싶지 않았지만,
어쨌든 문을 나섰다.
일단 가보고,
안 맞으면 그만두면 되지, 뭐.
강의실에 들어서니 대부분 기존 회원들이었다.
익숙한 분위기, 능숙한 손놀림.
다행히 나 같은 초보자들도 있었다.
처음엔 2명인 줄 알았는데,
한 분이 늦게 오시면서 총 3명이 되었다.
한 분은 평범해 보이는 아줌마였지만,
말투와 행동이 뭔가 테토녀스러웠다.
다른 한 분은 할머니였는데,
소녀같이 수줍은 분이었다.
수업이 시작됐다.
초보자들은 오른쪽으로 이동해 앉았다.
강사님이 유인물 8장을 나눠줬다.
앞의 2장은 어반스케치의 의미와 배경이고,
나머지 6장은 따라 그릴 샘플들이었다.
오늘의 목표는 3페이지.
기초적인 선 연습이었다.
"어반스케치는 긴 선이 필요 없어요.
작은 칸들로 충분해요."
A4 스케치북을 16등분으로 나누고,
그렇게 작은 칸들을 채워나갔다.
직선, 사선, 동그라미.
패턴을 반복해서 그렸다.
한참 그리던 중,
앞자리 할머니가 돌아보셨다.
"저기, 한 거 좀 보여주실래요?"
본인이 느리다고 생각하신 것 같았다.
내 종이를 보여드렸다.
"전 여기밖에 못했는데.."
할머니가 소녀처럼 수줍게 웃으셨다.
나보다 조금 느리셨다.
그런데 그게 위안이 됐다.
혼자 헤매는 게 아니구나.
문득 옆자리가 궁금해졌다.
슬쩍 보니,
테토녀 아줌마는 시원시원하게
막힘 없이 그리고 계셨다.
'오. 빠르시다.'
역시.
내가 본 느낌이 맞았다.
벌써 3장을 다 채우고 계셨다.
나랑 할머니는 2장도 못 채웠는데 말이다.
수업이 끝났다.
시간은 빨리 갔고,
2페이지를 채 못채웠다.
'내가 느린가?'
뭐, 그렇게 중요하진 않지.
처음 하는 건데.
강사님께서
다음 수업까지 오늘 못한 부분 채워오라고 하셨다.
이런, 숙제라니.
그래도,
나오면서 슬쩍 미소가 지어졌다.
그렇게 가기 싫어했는데.
막상 해보니까 할 만했다.
잘하지 못해도,
천천히 해도,
괜찮았다.
결국은 걱정했지만 할 만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