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명배우여서, 퇴사합니다. 240922
아침에 우유가 간당간당했다.
원체 양에 대한 감각이 없는 나는 고민하다가 텀블러에 우유를 부었는데, 나만 아는 텀블러에 보이는 적정 높이보다 훨씬 낮았다. 이걸 지금 마시고 싶진 않고, 다시 붓고 텀블러 씻을 생각 하니 귀찮았다. 1분 1초가 소중한 아침 출근 시간이니까. 그러다 냉장고 속 두유가 떠올라 두유를 반 섞어 라테를 만들어 나왔다.
버스가 정차하고 반신반의하며 한입 들이켜는 순간 이건 내가 찾던 맛이랄까? 우유는 너무 맑고, 두유는 너무 걸쭉해서 고민했던 지난날이 우스울 정도로 왜 이 생각을 못했지? 싶었다! 버스 안으로 햇살은 차올라 눈앞이 반짝였고, 좋아하는 노래가 마침 이어폰에서 흘러나왔다 이토록 영화 같은 아침이라니! 뭉클할 지경이었다. 그러다 생각했다. ‘이런 제가 우울하다고요?’
나와 비슷한 점이 많은 지인은 나의 이야기를 듣고 자신의 이야기를 꺼냈다.
우울증으로 칩거를 하던 지난날 얘기를 하며 자기도 자신이 우울한 줄 몰랐단다.
의사 선생님의 한마디 한마디에 “제가요?”를 반복했다고 한다. 그러며 그녀는 한마디를 더 얹었다.
“그래, 우리 같은 사람들은 본인이 우울한 줄 몰라. 넌 그냥 평생을 그렇게 바쁘게 살아서 더 몰랐던 거야. 내가 맨날 말하잖아 난 너같이는 못 산다고.”
퇴사하고 제발 아무것도 하지 말고 잠부터 자라는 그녀였다.
나의 오랜 친구는 나의 퇴사가 실은 반가웠다고 했다. ‘이제 얘가 낮에라도 좀 잘 수 있겠구나.’ 싶어서.
사랑하는 사람들이 해주는 말은 큰 울림을 줬다.
사람이 미치게 싫다가도 사람을 미치게 사랑하는 것은 필연적으로 연결되어 있겠다는 생각이 가끔 들 때가 있다.
오늘은 이곳에서의 마지막 시향회를 했다.
나름 매장에 자주 나오는 프로모터와 짧은 담소를 나누고, 사람들 틈바구니 속에서 많은 고객에게 인사를 하고, 누구는 내 인사에 물건을 사기도 하고, 누군가는 그냥 스쳐갔다. 응대가 대화로 변하기도 하고, 연줄이 닿았던 몇 명이 머릿속을 스쳤다. 마침 몇 년 동안 내 스케줄에 맞춰 구매하러 오시는 고객이 전화가 걸려 와 수요일에 가면 있냐고 물었다. 그날은 그 고객과의 마지막 자리 일 것이다. 알게 모르게 정이 든 사람에게 퇴사를 한다고 얘기를 해야 할까, 아니면 다른 직원에게 토스하면 될 일이니 굳이 쓸쓸한 마지막 인사를 해야 할까?
마지막 시황보고서를 작성하고, A1에 커서가 머문다. 진하게 갇힌 네모를 보며, 수도 없이 눌렀지만 그동안 유심히 들여다보지 못한 마음에 미안함이 울컥거렸다.
매출이 저조한 행사였지만 그런대로 시향회의 마지막 끝.
내일은 오전 출근입니다! 퇴근 후 집에서 어떤 요리를 해 먹을까 행복한 고민으로 밤을 맞이해 봐야겠습니다. 주말 마무리 잘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