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합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요? 제가요?
199x년, 나는 처음으로 유서를 썼다. 8절지 스케치북 맨 뒷장에 주황색 사인펜으로 꾹꾹 눌러썼던 글. 자세한 내용은 기억에 없지만, 획을 꺾어 최대한 잘 쓰려고 노력했던 ‘유서’라는 글자만큼은 지금도 각인처럼 내 어린 시절 한가운데에 깊게 박혀있다. 작은 골방과 스펀지로 만든 싸구려 접이식 소파침대, 그리고 스케치북에 울면서 유서를 써 내려가는 아홉 살의 나. 이것이 내 기억 속 자살사고의 시초다.
나는 오랜 시간을 우울과 함께 살았다. '높은 곳에서 뛰어내리면 땅에 도착하기 전에 심장마비로 죽는다던데' 누군가가 했던 말을 철석같이 믿고, 높은 곳만 쳐다보며 길을 걷던 시절도 있었다. 그나마도 대학생 때 유럽에서 스카이다이빙을 한번 해보고는 진실이 아님을 알았다. 신발이 벗겨질까 봐 맨발로 경비행기에 올랐던 나는 발이 발판에서 떨어질 때의 느낌을 지금도 기억한다. 정말 끔찍한, 내 목숨이 이승으로부터 멀어지는 느낌. 그때 아마도 처음으로 깨달았던 것 같다. '나는 죽고 싶지 않아'
201x년 9월, 처음으로 '죽고 싶다'가 아닌, 다른 생각이 내 머릿속을 파고들기 시작했다. '내가 나를 죽일 것 같다' 그날 나는 가장 가까운 정신과에 전화를 걸어 당일 진료를 예약했다. 처음 보는 사람 앞에서 그렇게 많이 울어본 일이 있을까? 앞에 놓인 크리넥스를 푹푹 뽑아 눈물을 닦으며 통곡하는 나에게 의사는 우울증 검사를 제안했고, 일주일 뒤 중증 우울증 진단을 내렸다. 퍼즐이 맞춰지는 느낌이었다. 그래서 내가 계속 죽고 싶었구나. 그래도 나는 아직 살고 싶구나.
첫 정신과 치료로부터 10년이 지난 올해, 나는 다시 정신과를 찾았다. 선생님, 살아있는 게 너무 힘들어요. 직업활동을 하고 싶지 않아요. 여기까지 오려고 그 많은 시간과 돈을 들였는데 난 이 일로 돈을 벌 엄두가 안 나요. 살아있는 게 버거운데 그렇다고 죽고 싶지는 않아요. 나는 내가 상상해 본 적 없는 행복한 결혼생활을 하고 있어요. 내 남편과 함께 하는 지금 이 삶은 너무 좋아요. 그런데 내 부모가 내 숨통을 조여요.
돌이켜보면 나는 한 번도 나 스스로의 이유로 죽고 싶었던 적이 없었다. 처음으로 유서를 썼던 그때부터, 중증 우울증 진단을 받았던 첫 정신과 진료, 그리고 항우울제 처방을 다시 시작한 지금까지, 내 자살 사고의 중심에는 엄마가 있었다.
엄마.
혹자는 엄마라는 단어만으로도 뭉클함을 느낀다고 했는데, 난 그 단어만 떠올리면 머리털이 삐죽 서는 느낌과 동시에 심장을 꽉 쥐고 흔드는 듯한 고통을 느낀다. 엄마가 나를 학대하면서 키웠느냐고? 엄마와 나를 아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묻는다면 열 중 열하나는 말도 안 된다고 펄쩍 뛸 것이다. 엄마는 나를 정말 최선을 다해 키웠다. 성치 않은 몸으로 낮에는 경제 활동을 하고, 밤에는 병원에서 일주일에 몇 번씩 치료를 받으면서도 나를 예술가가 될 수 있게 뒷바라지를 했다. 그럼에도 나는 엄마가 살아있다는 것이 힘들고 괴롭다.
내 부모가 살아있는 게 왜 이렇게 나에게는 큰 고통일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을 나는 찾을 수 없었다. 내가 불효녀라서? 내가 나빠서? 내가 못돼서? 내가 배은망덕해서? 답도 없이 꼬리를 무는 수많은 질문의 굴레에서 나를 빼내어준 건 나의 새 정신과 의사였다. 그녀는 내게 복합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 간략히 ‘C-PTSD’에 대해 들어본 적 있느냐는 질문과 함께, 내가 그 병을 갖고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는 진단을 내렸다. PTSD는 각종 매체와 심지어는 밈으로도 널리 알려져 있는 반면, C-PTSD에 대해서는 금시초문이었다. 의사가 어리둥절한 나에게 'PTSD는 어떤 큰 사건이 벌어진 후에 얻게 되는 스트레스 장애라면, C-PTSD는 크지 않은, 사소한 사건이 계속해서 쌓인 후에 나타난다는 차이점이 있다'는 설명을 덧붙였다. 집으로 돌아와 검색 엔진으로 C-PTSD를 검색해 본 나의 눈에 들어온 한 구절.
'오랜 시간 반복된 신체적, 정신적 학대에 의한 복합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
이제 C-PTSD와 함께하게 된 나의 이야기를 천천히 풀어가 보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