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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벼리 Apr 11. 2024

티비도 없고 전기도 끊기는 이 섬이 좋은 이유는

내가 자연을 사랑하기 때문이야 엄마.


내일은 이 여행의 목표인 코모도 데이트립을 하는 날이다. 우리는 리조트에서 제공하는 투어상품을 이용해서 코모도 섬으로 간다. 아이와 단 둘이니 조금이라도 편했으면 했고, 리조트 투숙객들과 한배를 타니 조금 더 프라이빗 하지 않을까 하는 이유에서 선택을 했지만, 이 생각은 리조트에 처음 발 들인 순간부터 후회했다.


아마도 원아일랜드 리조트 특성상 우리 모녀를 제외하곤 죄다 신혼부부들로 보이는 젊은 커플들만 있었는데, 후회한 이유가 신혼부부라니, 웃기는 이유지만 내가 리조트에 와서 마주한 장면들이 대부분 주위의 시선에 아랑곳하지 않고 둘만의 뜨거운 세상에 빠져있는 행복한 모습들이어서 그랬을까?


아이랑 단둘이 간 작은 동양인이 고군분투하며 아이를 챙기며 끙끙 대는 모습이 나도 모르게 '나 멋진 엄마지?'의 느낌보다는 '여자혼자 아이를 데리고 이런 데를 여행하는 걸 어떤 시선으로 볼까'를 자꾸 의식하고 있었던 거다.


거기다가 나는 단어 단어정도만 연결해서 단답형 대화만 가능한 수준의 영어실력이라 누군가와 눈을 마주치는 게 두렵고 나에게 말을 걸지 말았으면 좋겠다는 긴장감을 안고 있었다. 분명 우리 모녀를 마주하는 모두가 따뜻하고 친절했지만, 나는 자꾸만 작아지고 있었다.


투어 하루 전부터 긴장하는 성향의 소심한 내가 아이를 데리고 외딴섬까지 와 있다니!

난 용기가 대단하고 멋진 엄마야!라고 혼자 계속 마인드 컨트롤을 하며 최대한 즐겁게 보내려고 노력했다.


이 섬이 참 좋은데 시끌벅적한 관광객들 맞춤형 여행지였던 발리섬이 자꾸 그립기도 하고, 이곳을 내가 언제 다시 와볼 수 있을까 생각하다 보니 시간이 가는 게 아쉽기도 하고 사람의 마음은 참 알다가도 모르겠다.






우리는 고장 난 고프로는 쿨하게 잊어버리기로 하고, 잘 닦아서 배터리를 분리한 뒤 아예 가방에 싸버렸다.

이 환상적인 산호섬을 눈과 마음에만 담아두는 게 아쉬워서 채집통에 핸드폰을 올려두고 여러 방법을 써 보았지만 결과물은 만족스럽지 못했다.


내 핸드폰은 아이폰 14프로, 방수가 된다 그랬는데 그냥 넣어봐?라는 생각도 잠시 해보았지만, 이 핸드폰에 남은 여정을 해야 할 정보들이 다 담겨 있기에 섣불리 할 수 없어 그마저도 포기하고, 그냥 최선을 다해 이곳을 즐기기에 집중한다.



오늘도 어김없이 라이언 피쉬와 트리거들이 우리를 맞이했지만 가까이 다가가면 입을 다무는 푸른 대왕조개와 우리 집에 왜 왔니! 하고 숨는 건지 놀아달라는 건지 알 수 없었지만, 말미잘 집 앞에서 우리를 빤히 쳐다보는 니모들 덕분에 행복했다.


발디딜 틈 없이 빼곡한 건강한 산호들

운이 좋으면 아기상어들이 해변까지 찾아오기도 한다는데, 우린 채채가 너무 겁을 먹어서 먼바다까지 나가보진 못 했다.


스노클을 즐기고 방으로 돌아와 가져온 비상식량으로 늦은 점심을 먹었다. 세라야 섬 리조트는 정말 리조트만 존재하는 곳이기 때문에 식사도 이곳 레스토랑 한 군데서만 해결해야 하는데 섬으로 운송하는 비용이 포함되어 있어서 음식값이 비싼 편이었고 (한국의 핫플로 소문난 이탈리안 레스토랑 정도의 금액) 3박이나 지내면서 모든 끼니를 해결하다 보니 음식이 물리기도 했다.


가져간 햇반과 참치와 김, 이것만 있으면 집밥 부럽지 않지. 다만 하루종일 눈으로 담은 살아있는 건강한 산호와 예쁜 말미잘들을 보고 난 뒤라 그런지, 건강하게 보존하려고 애쓰는 아름다운 산호섬에 플라스틱과 비닐 쓰레기를 남기고 온 것은 마음이 좀 쓰였다.



이곳에선 할 수 있는 게 그저 바다 바라보기 스노클 하기 그냥 쉬기. 이것뿐이라 지루할까 걱정도 했으나

쓸데없는 기우였다. 우린 읽고 싶은 만큼 책을 읽고 테라스에 찾아온 예쁜 동박새를 눈으로 쫓고, 챙겨간 루미큐브로 둘만의 시간에 집중해서 시간을 보내는데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아이가 어릴 때부터도 최대한 자연스러운 놀이로 세상을 보기를 바랐다. 장난감보다는 자연에서 뛰어놀고

티비나 영상보다 온몸의 감각으로 자연을 받아들이길 바랐다.


그렇게 키운 덕분일까, 아이는 티비도 없고 밤이면 정전이 되어 칠흑 같은 어둠이 찾아오는 이 섬이 너무 좋다고 한다. 노을이 어스름 내릴 때 찾아오는 박쥐가 반갑고, 밤이면 모래굴을 파는 땅게를 찾는 게 신이 났다.

까맣게 어둠이 내린 예쁜 바다에는 내가 누구게? 하고 튀어 오르거나 소리를 내는 물고기들을 쫓느라 시간 가는 줄 몰랐고, 밤이 되었더니 더 많은 라이언 피쉬들이 제티 근처로 찾아왔는데 누가 누가 더 못 생겼는지 아이랑 깔깔 거리며 웃는 게 행복했다.


매일 저녁 랜턴들고 제티투어를 나간다. 밤에만 오는 친구들을 찾으러!



"심심하지 않아?"

"아니 엄마, 내가 궁금해하는 생물들이 매일 찾아와 너무 행복해, 조용하고 평온해. 여기는 정말 천국 같아

일 년 정도 살아보고 싶어"



엄마가 안 되는 영어로 배낭 메고 이고 지고 힘들게 온 보람이 있구나, 신발 타고 온 세상을 누비고 싶다던 내 소박한 꿈을 함께 이룰 여행메이트로 손색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 고작 만 8세의 어린이지만 이 날을 오래 기억해 주길, 엄마와 나누었던 이 섬에서의 추억이 앞으로 아이가 살아가면서 만날 모든 걸림돌들에 용기를 주고 위로가 되어주길 기도했다.

어제는 우느라 목이 메었는데 오늘은 마음이 행복으로 차올랐다. 인생이란 이렇게 한 끗 차이로 울고 웃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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